대한제국 법궁, 덕수궁 제 모습 찾기 본격 추진
대한제국 법궁, 덕수궁 제 모습 찾기 본격 추진
  • 정유철 기자
  • npns@naver.com
  • 승인 2018.06.20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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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명문 제자리로 이전, 선원전 3단계로 2038년까지 복원

 덕수궁은 1897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한 후 경술국치인 1910년까지 13년간 대한제국의 궁궐로 사용한 곳으로, 당시에는 중명전과 옛 경기여고가 있던 자리까지 포함된 넓은 궁역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1919년 고종이 승하한 후 덕수궁의 궁역이 여러 이유로 잘려나가고, 궁궐의 전각들은 훼철(毁撤)되었다.

  1920년대에는 현재의 덕수궁과 미국대사관 사이에 담장 길을 조성하여  덕수궁이 둘로 쪼개지고, 조선왕조의 근원인 선원전 영역은 총독의 손에 넘어가 조선저축은행 등에 매각되고, 선원전은 헐려 창덕궁으로 옮겨졌다. 또한, 덕수궁 중심영역의 공원화 계획으로 돈덕전마저 헐려나가고, 함녕전의 정문이었던 광명문도 지금의 자리로 옮겨져 유물을 보관하는 전시관으로 변해버렸다. 
 
문화재청(청장 김종진)은 19일  ‘덕수궁 광명문 제자리 찾기’ 기공식을 시작으로 일제가 변형, 왜곡한 덕수궁의 제 모습을 찾기 위한 노력을 올해부터 본격적으로 추진한다. 문화재청은 1919년 고종의 승하 이후 제 모습을 잃어버린 덕수궁의 원래 모습을 되찾고자 덕수궁 복원사업을 추진하여 광명문, 돈덕전, 선원전의 원형을 연구하여 원래 모습으로 복원해 나갈 계획이다. 

덕수궁 광명전. 문화재청은 19일 ‘덕수궁 광명문 제자리 찾기’ 기공식을 시작으로 일제가 변형, 왜곡한 덕수궁의 제 모습을 찾기 위한 노력을 올해부터 본격적으로 추진한다. [사진=문화재청]
덕수궁 광명전. 문화재청은 19일 ‘덕수궁 광명문 제자리 찾기’ 기공식을 시작으로 일제가 변형, 왜곡한 덕수궁의 제 모습을 찾기 위한 노력을 올해부터 본격적으로 추진한다. [사진=문화재청]

□ 광명문, 제 자리로 이전

대일항쟁기에 옮겨진 광명문을 제자리로 이전하기 위해서 문화재청은 2016년 원래 자리를 발굴하여, 광명문과 배치형태가 같은 건물지 1동을 확인하였다. 건물지는 12기의 적심시설을 가진 정면 3칸, 옆면 2칸의 건물지로, 경운궁(덕수궁의 옛 이름) 중건 배치도(1910년) 상의 광명문지와 그 위치와 배치상태 그리고 평면형태가 같은 것으로 판명되었으며 발굴결과를 토대로 실제 이전을 위한 실시설계도를 완료하였다. 광명문 제자리 찾기 공사는 6월 19일 기공식 행사를 시작으로 올해 말까지 완료할 예정이다.

돈덕전과 석조전(『애뉴얼리포트』, 1911년 조선총독부) [사진=문화재청]
돈덕전과 석조전(『애뉴얼리포트』, 1911년 조선총독부) [사진=문화재청]

 

문화재청은 광명문 내부에 보관한 유물들은 올해 안으로 보존처리를 할 예정이다. 창경궁 자격루(국보 제229호)와 신기전은 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재보존과학센터(대전)로 옮겨 보존처리하고, 흥천사명동종(보물 제1460호)은 부피와 중량을 고려하여 경복궁 궐내각사지에 임시 처리장을 만들어 보존처리할 예정이다. 보존 처리를 마치면 자격루와 신기전은 국립고궁박물관으로, 흥천사명동종은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적절한 장소를 검토하여 이전 설치한다.   

□ 돈덕전, 대한제국 관련 자료관으로 재탄생

  돈덕전은 1902년 고종 즉위 40주년을 맞아 칭경(稱慶, 축하의 의미)예식을 하기 위한 서양식 연회장 용도로 지었다. 고종을 만나기 위한 대기장소나 외국사신 접견장소, 국빈급 외국인 방문 시 숙소 등으로 활용되었으며, 1907년에는 이곳에서 순종이 즉위하였다. 하지만 순종이 거처를 창덕궁으로 옮긴 후에는 덕수궁 공원화 사업 때문에 같이 훼철되었고 이후에는 아동 유원지로 활용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문화재청은 돈덕전 복원을 위한 발굴조사를 지난해 마쳤으며, 지금은 복원을 위한 설계를 하는 중인데 연내에 공사를 시작하여 2021년 완공할 예정이다. 다 복원되면 대한제국과 관련한 자료관 등으로 활용할 계획이다.  

돈덕전 복원 조감도. [사진=문화재청]
돈덕전 복원 조감도. [사진=문화재청]

 

□ 선원전, 2038년까지 3단계로 복원 추진

  덕수궁 선원전은 고종이 대한제국 황제로 즉위하기 전 가장 먼저 신축했던 중요한 건물이었다. 1900년 10월 화재로 불타게 되자, 당시 미국공사관 북쪽 수어청자리(정동부지, 옛 경기여고 터)로 옮겨 1901년 7월 11에 복원하였다. 1919년 1월, 고종이 승하한 후에는 모두 없어져 다른 건물이 들어섰다가 해체되는 과정을 겪어왔다.

  광복 이후에는 경기여고 용지로 쓰이다가 주한미국대사관에 양도되었다. 2003년 6월 미국대사관 기숙사 건립을 위한 문화재 지표조사 중에 덕수궁 선원전 터가 확인되면서 용산 미군기지 내 부지와 맞교환하기로 합의되어 2011년 우리나라에 다시 소유권이 넘어왔다. 선원전 권역인 정동부지는 2011년까지는 미국대사관, 경기여고 등의 부지로 사용되었다. 이후 교환한 부지 사이에 경계벽을 설치하고 아관파천 당시 고종이 걸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고종의 길’을 지난해 말 완공하면서 복원이 시작되었다.

  문화재청은 2038년까지 진전(眞殿)인 선원전(璿源殿), 빈전(殯殿)으로 사용되던 흥덕전, 혼전(魂殿)인 흥복전 등 주요 전각과 부속건물(54동), 배후림(상림원), 궁장(宮牆) 등을 3단계에 걸쳐 복원해 나갈 예정이다. 문화재청은 올해는 선원전 지역의 발굴조사를 위하여 미 대사관에서 사용하던 조선저축은행 사택, 미부대사관 관저 등 건물 9동과 시설물을 철거한다. 

 철거 전 작년에 완공된 ‘고종의 길’과 철거 건물들도 개방하고, 선원전이 해체된 후 여러 용도로 사용되던 역사적 장소를 국민이 둘러볼 수 있도록 일정 기간 공개한다.  

덕수궁 중명전은 1897년 경 황실 도서관으로 지어졌으며 당시의 명칭은 ‘수옥헌(漱玉軒)’이었다. 1901년 화재로 전소된 후 지금과 같은 2층 벽돌 건물로 재건되었으며, 건물 설계는 독립문, 정관헌 등을 설계한 러시아 건축가 사바찐(A.I.Sabatin)이 맡았다. 이후 1904년 경운궁(현 덕수궁)에서 대화재가 발생하여 고종이 이곳을 편전으로 사용하면서 ‘중명전(重眀殿)’으로 불리게 되었다.
 

덕수궁 종합정비 조감도. [사진=문화재청]
덕수궁 종합정비 조감도. [사진=문화재청]

 중명전은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던 비운의 장소이자,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했던 의미 깊은 곳이기도 하다. 이후 일제의 강압적 훼손에 의해 한때 외국인클럽으로도 사용되었고 1976년 민간에 매각되기도 하였다. 문화재청은 2006년 정동극장으로부터 중명전의 소유권을 인수받아 2007년 12월부터 원형복원을 시작, 이를 근대 역사 교육 및 체험의 장으로 조성(상설전시 공간)하여 2010년 개방하였다. 

덕수궁(德壽宮)이라는 궁궐의 명칭은 선조가 임진왜란으로 의주로 피난하였다가 한양으로 돌아왔으나, 궁궐들이 소실되어 마땅히 머무를 곳이 없어서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사저(私邸)였던 곳을 1593년에 임시행궁으로 사용하였다. 이후 광해군은 1608년 이곳에서 즉위하고 3년 후인 1611년에 임시행궁을 경운궁(慶運宮)으로 명명하였다.

고종은 아관파천 후 1897년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옮겨가게 되고 대한제국 선포 후 법궁(法宮), 임금이 정사를 보며 생활하는 궁궐으로 삼았다. 그러나 1905년 을사늑약 체결이후 1907년에 고종이 순종에게 양위한 직후 순종은 경운궁을 덕수궁(德壽宮)으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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