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3년 일제에 의해 훼철되었다가 100년 만에 복원된 광화문 월대 공간. 사진 강나리 기자. 세종대왕이 1442년 친히 궁을 나와 무과시험을 실시하고, 1450년 오색비단 장막을 늘어뜨린 장식 무대인 채붕(彩棚)을 세우고 흥미로운 놀이(잡희雜戲)를 베풀어 백성과 즐거움을 나눈 공간이 새로운 모습을 갖췄다. 훼손되고 파괴된 지 100년 만에 지난해 10월 복원을 마치고 시민의 품으로 돌아온 광화문 월대 공간이다.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 앞으로 시원하게 쭉 뻗어 나온 월대는 좌우로 날개를 활짝 편 듯한 경복궁 담장과 어우러져 조선의 법궁 정문다운 위용을 되찾았다. 훼손되었던 경복궁의 중심축이 완전하게 복원된 것이다. 그런데 궁궐 전각 앞에 만들어진 월대가 아니라 궁궐 정문에 위치한 월대는 동아시아에서는 없는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궁궐 건축 양식이라 한다. 금단의 영역인 궁궐과 백성들의 거주지 사이를 연결해주는 다리인 셈이다. 월대 앞에서 경복궁을 지키는 해태상. 서쪽 해태상에서 바라본 월대와 광화문. 사진 강나리 기자. 경복궁의 정문 광화문 앞으로 시원하게 뻗어나온 월대와 좌우 해태상. 사진 강나리 기자. 일반적으로 월견대(月見臺, 달을 보는 대)에서 유래했다는 월대는 궁궐이나 건물 앞에 놓인 넓은 기단으로 일정한 높이의 단상이다. 건물의 위엄을 높일 뿐 아니라 각종 행사가 펼쳐지는 무대로서 기능했는데 조선에서는 왕과 백성이 소통하던 공간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 중종도 이곳에서 무과시험을 지켜보았고, 1539년 궁을 나와 광화문 월대 공간에서 열린 산대놀이를 한참이나 구경하고 들어갔다고 기록되었다. 명종도 광화문에 나아가 무과시험을 실시했으며, 영조는 1744년 백성들의 상언(上言, 왕에게 올리는 문서)을 광화문에서 받도록 명하기도 했다. 또한, 고종 때(1891) 왕세자가 쌀을 하사하는 행사를 하기도 했다.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가 월대 개방을 앞두고 주최한 포럼에서 안창모 경기대 건축학과 교수는 월대를 “백성과 신하의 입장에서는 궁궐로 향한 길이지만, 반대로 왕의 입장에서는 백성을 향한 길”이라 정의했다. 안 교수는 “조선은 절대왕정이 아니라 왕권과 신권이 견제와 균형을 이루는 정치체제를 구축했던 나라이다. 왕의 공간인 경복궁과 왕을 견제할 수 있었던 재상의 공간인 육조거리를 잇는 월대는 대립보다는 견제와 균형의 장소이자 소통의 장소”라고 의미를 해석했다. 오는 1월 21일까지 서울시가 개최하는 '2023 서울 라이트 광화문' 중 광화문 앞에서 펼쳐지는 미디어파사드 쇼 '시공의 문-디지털 광화'가 매일 오후 6시~9시 매시간 정각에 35분간 펼쳐진다. 사진 강나리 기자. 역사 속에서 광화문 월대도 수많은 부침을 겪었다. 임진왜란의 참화로 경복궁이 파괴되면서 방치되었던 월대 공간은 고종 대에 조선의 법궁으로서 경복궁의 재건과 함께 1866년 3월 다시 정비하여 축조되었다. 그러나 1910년부터 일제는 우리 역사의 맥을 끊고 식민지로서의 위치를 건축적으로 나타내고자 본격적으로 경복궁 훼철을 시작했다. 광화문 월대를 포함한 90% 이상의 건축물들을 상징적으로 헐어내고 조선총독부 건물을 조선 왕의 정치공간인 근정전 바로 앞에 지었다. 1917년 화물 전차 부설에 이어 1923년 경복궁에서 조선부업공진회(박람회)를 개최하고자 준비하는 과정에서 많은 관람객을 유치하기 위해 영추문행 전차선로를 광화문 앞에 개설하면서 월대는 훼철되었고 난간석 등이 철거되었다. (위) 1923년 10월 4일자 동아일보 기사 속 '영추문 전차의 개통과 장식 중인 광화문' 사진. 광화문 앞 훼철된 월대를 볼 수 있다. (아래) 광화문 월대 발굴과정에서 월대를 부수고 Y자 형태의 복선으로 깔린 전차선로의 침목이 노출되었다. 사진 문화재청. 일제는 경복궁의 얼굴인 광화문 또한 없애려 했으나 큰 반발에 부딪히자 경복궁 동문인 건춘문 북쪽으로 이건했고, 월대 공간을 전차선로와 도로로 사용하면서 그 흔적은 땅 아래에 묻혔다. 옛 경복궁 월대 공간의 모습은 1915년 조선의 마지막 궁중 화가인 심전 안중식이 일제에 의해 이미 훼손되어가던 경복궁의 과거 모습을 그린 ‘백악춘효도’에 비교적 잘 나타나 있다. 또한, 구한말부터 1923년까지 촬영된 각종 사진 자료와 1910년 ‘조선고적도보’,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 평면도 등 몇몇 도면 자료로도 확인되었다. 2018년부터 본격 복원과정을 밟은 월대는 동구릉에 모여져 있던 난간석과 하엽석, 용두석 등 석물 40여 점을 기초로 원형 부재를 재사용하고, 원형 부재의 표면과 형태를 존중하여 문화유산 수리 장인의 손길에 의해 전통방식으로 다시 탄생했다. 임동조 석장을 포함해 약 30여 명에 가까운 장인들의 땀으로 이루어낸 성과이다. 아울러 지난해 8월, 월대의 중앙 어도(御道, 임금이 다니는 길)의 가장 앞부분을 장식하던 서수상(瑞獸像, 상상 속 상서로운 동물상) 석조각 2점을 고(故)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유족 측으로부터 기증받아 월대의 마지막 퍼즐을 완성했다. (위) 어도의 동쪽 소맷돌로 조각한 서수상의 바깥쪽 모습. (아래 왼쪽) 서쪽 서수상 (아래 오른쪽) 동쪽 서수상 정면 모습. 고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유족 측에서 기증했다. 사진 강나리 기자. 복원된 공간에는 익살스러우면서도 위엄을 갖춘 해치상(해태상)이 좌우를 지키고 어도를 중심으로 장식미를 더한 난간석을 둘러 100년 전 훼철되기 이전의 위용을 자랑한다. 먼저, 어도의 맨 앞 동서에 놓인 서수상은 월대의 석조 부재 중 가장 화려하고 격이 높은 대표 조형물인 소맷돌로 조각된 것이다. 얼굴 절반을 차지하는 큰 코와 부리부리한 큰 눈, 살짝 벌려 큰 어금니가 보이는 큰 입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가만히 바라보면 위압적이기보다 살짝 들린 입술 끝이 미소를 짓는 듯 친근하다. 앞발을 턱 아래 괴었고 정수리에는 한 개의 뿔이 났으며, 코에서 시작되는 수염과 눈 뒤쪽에서 시작되는 귀, 턱밑 수염 등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린다. 근정전의 서수상이 몸에 비늘이 조각되고 머리에 뿔이 2개로 용으로 추정되는 것과 달리 월대의 서수상은 비늘이 없고 머리에 뿔이 하나인데 해치와 닮은 듯 다르다. 경복궁 재건과정을 상세히 기록한 《경복궁 연건일기》에도 서수상의 명칭을 공란으로 두어 정확한 이름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월대 양 앞에서 목에 큰 방울을 달고 사주를 경계하는 해태상 중 서쪽편. 사진 강나리 기자. 해태는 성군을 도와 일을 하며 능히 사람의 옳고 그름과 선악을 판단하고 벌을 주는 영물스러운 동물이다. 사진 강나리 기자. 월대 남단에는 부리부리한 눈으로 사주를 경계하는 해치상(해태상) 두 쌍이 나란히 서 있다. 영물스러운 동물인 해태는 성군을 도와 일을 많이 하며, 능히 사람의 시비곡직(是非曲直,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만일 잘못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벌로 바다에 넘겼다고 한다. 모든 관리들이 궁궐을 출입할 때 경계하는 마음을 가지라는 것이니 정신을 차리고 올바른 정치를 하라는 뜻일 것이다. 또한, 경복궁 남측으로 화산(火山)인 관악산이 보임에 따라 불을 먹는 물짐승인 해태를 화재 예방의 의미로 궁궐 앞에 설치한 것이라 한다. 해태상의 원위치는 월대 남단에서 39.2m 떨어진 곳으로 추정되지만 도로 사정으로 인해 현 위치에 자리 잡았다. 광화문 월대는 창덕궁, 덕수궁 정문의 월대와 달리 양쪽에 난간석을 설치한 것이 특징이다. 진한색의 석재가 동구릉에 보관되었던 원형부재. 사진 강나리 기자. 난간석은 원형 부재와 새로운 부재가 섞여 있는 모습인데 당초 계획으로는 동구릉에 보관되었던 원형 난간석을 전면 배치하고자 했다. 그러나 복원과정에서 배수 등의 관계로 전면으로 갈수록 미세하게 낮아지고 목조건축 기둥의 안쏠림처럼 난간석도 미세하게 안쪽으로 쏠려있다는 점을 발견해 각자 제자리를 찾아 배치했다. 과거 흰색 바탕에 검은색 글씨로 잘못 복원되었던 광화문 현판이 원형 복원된 모습. 사진 강나리 기자. 경복궁 수문장. 화요일을 제외한 매일 10시와 14시 광화문과 홍례문 사이에서 수문장 교대의식(20분간)과 11시와 13시에 파수의식이 진행된다. 사진 강나리 기자. 월대 넘어 3개의 아치문으로 이루어진 광화문(光化門)이 서 있다. 광화는 “빛이 사방으로 퍼지니 그곳에서 이뤄진 것은 만천하에 미친다”라고 하여 올바른 정치를 펼쳐 온 세상에 미치기를 바라는 뜻이다. 광화문의 현판은 과거 흰색 바탕에 검은 글씨로 잘못 복원되었으나, 검은 바탕의 금색 글씨의 본래 모습을 찾아 단장했다. 광화문은 경복궁의 얼굴이자 대한민국 역사의 심장부에 위치한 상징적인 건축물이다. 원형 복원된 광화문 현판과 함께 월대의 복원으로 광화문이 비로소 완성되었다. 이 월대 공간이 또다시 즐거움을 나누고 소통의 공간으로 역할을 했으면 하는 바램이다.
조선 건국 초기부터 법궁 경복궁 내에 건립되어 왕과 신하들의 연회, 사신 접대, 그리고 가뭄 때 기우제 등 국가행사에 사용되던 아름다운 경회루 2층 누각이 열린다.문화재청 경복궁관리소는 오는 4월 1일부터 10월 30일까지 매일 오전 10시와 11시, 오후 2시와 4시 4차례씩 경복궁 경회루 특별관람은 시행한다. 다만 혹서기인 7월에는 제외되어 총 6개월간 추진될 예정이다.경회루는 경복궁의 침전영역 서쪽 연못 안에 조성된 누각으로 단일건물로는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가장 큰 전통 목조 건축물이다. 연못 안에 석재 기단부가 있고, 정면
열린송현의 높은 담장이 걷히고 난 후 경복궁의 주산인 북악산의 산세가 드러나고 중턱쯤 푸른 기와지붕을 얹은 청와대가 보인다.대한민국 정부가 공식 출범한 이래 대통령의 공간이자 주요 국정운영이 결정되는 곳이며, 국빈을 맞아들이던 특별한 장소가 개방되어 국민의 발길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지난 2월 24일 이후 전날 예약만 하면 누구나 그 공간을 밟아볼 수 있다.그런데 청와대를 방문하기 전 들러볼 곳이 있다. 광화문 앞쪽 대한민국역사박물관 8층 옥상정원에서 전경을 보면 광화문과 경회루 등 주요 전각, 그 뒤편에 청와대가 일직선상에 놓
경복궁에서 북촌으로 향하는 길, 너른 들판이 펼쳐져 시야가 탁 트인다. 4m 높이의 담장과 고층빌딩들로 가려져 답답했던 공간이 ‘열린송현’이란 이름으로 활짝 열리면서 비로소 한양도성을 둘러싼 아름다운 산세가 한눈에 들어온다.겸재 정선이 사랑했던 한양의 북악산(옛명칭 백악산)과 인왕산 산세를 바라보면 풍수지리를 잘 알지 못하는 이라도 조선 건국 때 왜 이곳을 수도로 삼아 법궁인 경복궁을 앉혔을지 끄덕여 질만큼 감탄이 절로 나온다.서울광장의 3배 넓이나 되는 열린송현은 지금 겨울을 맞아 허허벌판과도 같다. 하지만 오히려 눈앞을 막던 인
조선의 왕과 왕비, 왕실의 역사가 깃든 특별한 공간, 왕릉과 궁궐, 숲길을 따라가는 탐방여행이 시작된다.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는 9월 17일부터 11월 14일까지 조선 왕릉을 여행하는 천 가지 방법을 주제로 조선왕릉길 프로그램 ‘왕릉천(千)행’을 운영한다.이번 ‘왕릉천행’은 ▲사도를 그리는 ‘정조의길’ ▲왕실의 사랑을 담은 ‘영조의 길’ ▲소용돌이 속 ‘왕과 황제의 길’ ▲그리움을 담은 ‘단종의 길’ ▲영원을 담은 ‘왕의 숲길’총 5개의 주제로 총 14차례 진행된다. 전문가의 해설을 들으며 조선이 후손에게 남긴 소중한 공간에 얽힌 역
9월 1일부터 나들이하기 좋은 가을밤 조선의 법궁, 경복궁이 열린다.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경복궁관리소는 11월 6일까지 총 52일간 경복궁 야간관람을 개최한다. 야간 관람시간은 오후 7시부터 9시 30분까지로, 입장 마감은 8시 30분이다. 야간개방이 없는 월요일과 화요일을 제외하고 매주 수요일부터 일요일까지 개방하며, 추석 대체휴일인 9월 12일과 2022 가을 궁중문화축전기간인 10월 3일과 4일에도 개방한다.경복궁 야간관람은 도심에서 고궁의 밤의 즐길 수 있는 이색 체험으로 매년 봄과 가을 큰 인기를 끄는 행사이다.달빛이 깃든
UAE(아랍에미리트) 두바이에서 지난해 10월 개관한 ‘2020 두바이엑스포‘에서 1월 16일에 한국의 날과 한국 주간(1.16.~20.)을 개최한다. 문화재청(청장 김현모)과 한국문화재재단(이사장 최영창)은 이를 기념해 한국관(총 면적 4,651.41㎡, 지상4층, 지하1층) 내에 마련된 ‘한국의 문화유산관’에서 전통 복주머니와 왕가 보자기 문양이 새겨진 스카프를 현지 관람객들에게 증정하는 행사를 준비했다. 또한, 하이브(의장 방시혁)와의 협업을 통해 한국관 중정 ‘마당‘에서 문화유산 배경의 방탄소년단(BTS) 공연영상도 상영할
조선시대에는 광화문에서 세종로 사거리에 이르는 대로를 '육조거리'라 했다. 조선왕조가 한양에 수도를 정하고 법궁인 경복궁을 건설하면서 그 앞에 자리한 육조거리는 곧 국가의 권위를 상징했다. 육조거리에는 의정부와 육조, 사헌부, 한성부 등이 있었으며, 조선의 주요 정책들이 그곳에서 만들어졌다.서울역사박물관이 기획한 '한양의 상징대로, 육조거리' 특별전에서는 조선의 정치ㆍ행정의 중심이었던 600여 년 전 광화문 앞 육조거리의 모습과 관원들의 생활상을 볼 수 있다. 전시는 서울역사박물관 1층 기획전시실에서 3
조선의 법궁(法宮)이었던 경복궁의 발굴과 복원 30년사(史)를 되돌아보는 특별전이 열린다.국립고궁박물관은 우리 역사의 과거와 현재를 잇는 전시인 ‘고궁연화’를 12월 1일을 시작으로 내년 2월 27일까지 개최한다. 연화는 ‘年華(빛나는 해)’ 또는 ‘煙花(봄의 경치)’ 두 가지 중의적인 의미로, 고궁연화는 경복궁 복원이 끝나고 맞이하게 될 찬란한 시간이자 봄을 의미한다.이번 전시는 현재 경복궁이 연간 천만 명이 찾는 문화유산으로 거듭나기까지를 사계절에 빗대었다. 전각 4곳에 역순으로 투영하여 겨울, 가을, 여름, 봄 순으로 거슬러
조선의 첫 궁궐이자 법궁인 경복궁은 태조 4년(1395)에 창건되고, 고종 5년(1868) 중건되었으나 일제의 치밀한 계획 하에 철저히 훼손되었다. 이후에도 한국전쟁 후 중앙청과 박물관, 군 부대가 들어서는 등 수난은 계속되었다.1991년부터 추진한 경복궁 복원 30년을 맞아 문화재청(청장 김현모)은 오는 4일 금요일 오후 10시 50분 한국방송공사(KBS) 1TV ‘다큐 On(온)’을 통해 경복궁의 역사와 복원을 조명하는 다큐멘터리 ‘조선의 첫 궁궐, 경복궁 다시 서다’를 방영한다.경복궁 복원사업은 단순히 일제강점기 헐린 전각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