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 서쪽 열린 송현(서울공예박물관 교육관 옥상에서 바라본 전경). 사진 강나리 기자.
경복궁 서쪽 열린 송현(서울공예박물관 교육관 옥상에서 바라본 전경). 사진 강나리 기자.

경복궁에서 북촌으로 향하는 길, 너른 들판이 펼쳐져 시야가 탁 트인다. 4m 높이의 담장과 고층빌딩들로 가려져 답답했던 공간이 ‘열린송현’이란 이름으로 활짝 열리면서 비로소 한양도성을 둘러싼 아름다운 산세가 한눈에 들어온다.

겸재 정선이 사랑했던 한양의 북악산(옛명칭 백악산)과 인왕산 산세를 바라보면 풍수지리를 잘 알지 못하는 이라도 조선 건국 때 왜 이곳을 수도로 삼아 법궁인 경복궁을 앉혔을지 끄덕여 질만큼 감탄이 절로 나온다.

경복궁을 감싸안은 인왕산의 줄기. 사진 강나리 기자.
경복궁을 감싸안은 인왕산의 줄기. 사진 강나리 기자.
배화여자대학교 뒤편으로 인왕산 범바위가 보인다. 사진 강나리 기자.
배화여자대학교 뒤편으로 인왕산 범바위가 보인다. 사진 강나리 기자.

서울광장의 3배 넓이나 되는 열린송현은 지금 겨울을 맞아 허허벌판과도 같다. 하지만 오히려 눈앞을 막던 인공적인 구조물들이 사라져 110년 만에 굽이굽이 물결치는 산줄기를 제대로 볼 수 있다는 것이 매력적이다. 작은 틈도 허용하지 않고 건물이 들어서는 도심에서 만날 수 있는 특별한 공간이다.

송현(松峴)이란 이름은 소나무숲이 있는 구릉지, 즉 솔고개에서 유래된 말이며 경복궁을 보호하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신라의 수도 경주 반월성을 둘러싼 신성한 숲 계림과도 같다. 〈태조실록〉에는 태조 7년(1398년) 5월에 “경복궁 왼쪽 언덕(송현)의 소나무가 말라 언덕 인근의 집을 철거하라고 명했다”고 적혀 건국 초부터 이미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청와대를 품은 북악산(옛이름 백악산)의 연꽃모양의 봉우리. 사진 강나리 기자.
청와대를 품은 북악산(옛이름 백악산)의 연꽃모양의 봉우리. 사진 강나리 기자.
북악산 줄기 너머로 북한산 보현봉이 보인다. 사진 강나리 기자.
북악산 줄기 너머로 북한산 보현봉이 보인다. 사진 강나리 기자.

경복궁과 창덕궁 두 궁궐 사이에 자리한 송현은 조선 시대 왕족과 명문 세도가들이 살던 곳이었다. 바로 옆에 자리한 지금의 서울공예박물관 터는 왕실 가족을 위한 안동별궁이었다. 고종의 아들이자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 순종이 왕세자 시절 안동별궁에서 순명효황후를 세자빈으로 맞이했다.

열린 송현과 맞닿아 있는 옛 안동별궁터. 지금은 서울공예박물관이 들어서 있다. 사진 강나리 기자.
열린 송현과 맞닿아 있는 옛 안동별궁터. 지금은 서울공예박물관이 들어서 있다. 사진 강나리 기자.

그러나 일제의 침략과 더불어 송현 터는 한국 근현대사의 고비를 고스란히 간직한 공간이 되었다. 1900년대 송현은 조선말 문신으로 을사오적의 처형을 주장하고 1910년 국권을 강탈당하자 자결한 우국지사 김석진의 집이었다. 그러나 1910년대 친일반민족행위자인 윤덕영 일가의 집이 들어섰고 1920년대에는 일제가 수탈을 위해 설립한 조선식산은행 사택으로 쓰였다.

밤에 본 열린송현. 산줄기를 따라 불빛이 길을 이룬다. 사진 강나리 기자.
밤에 본 열린송현. 산줄기를 따라 불빛이 길을 이룬다. 사진 강나리 기자.
1.2m로 낮아진 담장 너머 불빛 속 열린송현. 사진 강나리 기자.
1.2m로 낮아진 담장 너머 불빛 속 열린송현. 사진 강나리 기자.

광복 이후에도 1950년대부터 40년 간 미국대사관 직원 숙소로 쓰였고 1997년 삼성생명이 매입해 현대미술관 건립을 계획했으나 고도‧용적률 제한 등으로 무산되고 2008년 대한항공이 매입해 도심 한옥호텔 건립계획을 세웠으나 무산되었다. 현재 서울시가 소유하고 있으며, 2024년까지 시민이 이용할 수 있도록 개방되었다. 향후 2025년부터 ‘이건희 기증관’과 송현문화공원을 조성해 2027년 개방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