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익숙해서 눈에 들어오지 않던 풍광도 ‘여행자의 눈’으로 보면 뜻밖의 특별함을 찾을 수 있습니다. 조선 건국 초부터 600년이 넘는 동안 수도 역할을 해온 서울의 숨은 명소와 보물, 그리고 사람들의 이야기를 만나봅니다.

조선 제4대 세종대왕의 셋째아들 안평대군의 별서 무계정사의 활터자리에 세워진 '무계원'. 사진 종로문화재단 제공.
조선 제4대 세종대왕의 셋째아들 안평대군의 별서 무계정사의 활터자리에 세워진 '무계원'. 사진 종로문화재단 제공.

인왕산 자락 시간의 층이 켜켜이 쌓인 부암동의 한 골목 봄철 철쭉이 핀 담장길을 따라가면 고즈넉하게 자리 잡은 ‘무계원(武溪園)’이 나타난다.

무계원은 조선 4대 세종대왕과 소헌황후 심씨 사이에서 태어난 셋째아들 안평대군 이용李瑢이 당대 문신, 학자들과 교류하던 별서인 무계정사의 활터 자리에 세워진 한옥형태의 문화체험공간이다.

무계원 인근에는 불과 몇 미터 위쪽에 근대 단편소설의 선구자로 ‘운수 좋은 날’을 쓴 현진건 선생의 집터가 나오고, 그 위로 ‘몽유도원도’를 현실에서 구현하고자 두어 칸 무계정사를 세우고 1천 그루의 복숭아나무를 심은 안평대군의 집터가 나온다.

무계원 대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계단을 따라 올라간 경사진 부지 위에 팔작지붕에 홑처마로 소박한 안채와 사랑채, 행랑채가 안마당을 둘러싸고 있다. 가장 큰 건물인 사랑채를 따라 오른편으로 돌아서면 숨은 듯 작은 공간이 펼쳐진다. 꽃들과 여러 종류 나무로 가꾼 작은 정원에 놓인 낮은 돌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사랑채의 툇마루가 있다.

무계원의 사랑채. 사랑채를 따라 뒤뜰로 가면 소담한 정원이 나온다. 사진 강나리 기자.
무계원의 사랑채. 사랑채를 따라 뒤뜰로 가면 소담한 정원이 나온다. 사진 강나리 기자.

이 툇마루에 앉아 눈을 감으면 숲속인 듯 새소리와 고요함이 밀려오고 책을 읽다가 기대어 깜빡 졸음에 빠지면 더없이 평안해지는 곳이다. 비 오는 날 들른다면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소리에 복잡한 뇌 속, 가슴 속이 씻겨나갈 수도 있겠다.

다시 대문 앞쪽으로 돌아와 계단 위 핵심 공간으로 들어서면 왼쪽 행랑채 상설전시관에서 무계원 이름의 기원이 되는 조선 초기 산수화 ‘몽유도원도’의 영인본과 디지털 아트를 만날 수 있다. 몽유도원도는 대표적인 해외 반출 문화재로 진품은 현재 일본 덴리대학 부속 덴리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다.

현재 무계원은 조선 초 안평대군 당시의 한옥 형태가 아니다. 어린 임금 단종을 둘러싸고 권력의 대척점에 있던 형 수양대군(세조)에 의해 역모죄로 사사된 안평대군의 집터는 그 누구도 살지 않고 폐허로 남았다. 

조선 시대 역모죄 죄인의 집터는 반역의 기운이 다시 살아날 수 있다고 하여 그 누구도 살지 못하도록 파훼하여 저수지를 만들거나 수풀로 만들었다. 일례로 양반, 상놈, 노비, 스님 모두가 더불어 사는 세상을 꿈꾸었던 조선시대 최초의 공화주의자 정여립의 사례를 들 수 있다. 선조는 정여립을 반역으로 몰아 기축옥사를 일으켰고 조정에서는 혈맥을 끊어 버린다고 정여립의 집터를 파헤치고 숯불로 지졌으며, 이후 제비산에 어떤 건물도 지을 수 없도록 했다.

그런데 무계정사를 지은 안평대군은 시와 글씨, 그림에 능한 예술가로 조선은 물론 명나라 황제와 사신들에게서 명필로 칭송받았다. 게다가 아버지 세종의 명으로 북방개척을 통해 확보한 4진 중 회령을 맡아 함경도에서 문제를 일으키던 야인들을 토벌한 문무에 다재다능한 인물이었다.

그런 이유로 안평대군이 머문 무계정사 터에는 왕기가 서렸다는 이유까지 덧붙여져 오랫동안 다 허물어져 가는 흉가로 남았다. 남은 흔적은 무계정사 안 바위에 ‘무계동’이라고 새긴 것인데 현재는 안평대군의 집터가 사유지되어 그 안에 있는 바위를 쉽게 볼 수 없다.

현재 무계원은 1910년대 서화가 이병직이 지은 한옥 '오진암'을 이축한 것이다. 사진 종로문화재단.
현재 무계원은 1910년대 서화가 이병직이 지은 한옥 '오진암'을 이축한 것이다. 사진 종로문화재단.

지금 무계원 건물은 1910년대 종로구 익선동에 지어진 유서 깊은 한옥으로, 조선말 서화가이자 미술애호가였던 송은 이병직의 집 ‘오진암’을 이축한 것이다. 오진암은 1970년대 삼청각, 대원각과 더불어 제3공화국 정치사의 중요 장소로 한 시대를 풍미한 한정식 요정으로 사용되었다. 특히, 7.4 남북공동성명을 도출한 논의가 이루어진 역사적 장소이기도 했다.

2010년 오진암 자리에 관광호텔이 신축되면서 사라질 위기에 처하자 김영종 종로구청장의 노력과 각 분야 장인들의 참여로 현재 무계원 자리로 옮겨 복원했다. 무계원을 찾은 이들 중 옛 오진암을 기억하는 이들도 있어 “예전 오진암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여기가 영화 ‘장군의 아들’을 촬영한 곳이다”라며 추억했다고 문화해설사는 설명한다.

안평대군의 꿈 속 무릉도원 무계정사는 흔적을 찾아볼 수 없지만, 그가 당시 왕실 최고의 화원 안견을 통해 구현하고자 한 세계는 ‘몽유도원도’에서 확인할 수 있지 않을까? (2편 계속)

▶ 대중교통으로 무계원(종로구 창의문로 5가길 2)을 가려면 지하철 1호선 종각역 3-1번 출구, 5호선 광화문역 2번 출구, 3호선 경복궁역 3번 출구에서 부암동주민센터 또는 무계원 정류장에서 하차하면 된다.  부암동 주민센터 오른편 골목으로 3분 정도 걸어 오르면 무계원에 도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