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앙~!”

계곡 너머로 바람을 가르고 포물선을 그리며 145m를 호쾌하게 날아간 화살이 과녁을 때린다. 가슴 속까지 시원한 소리가 울려 퍼진다.

황학정 사대에서 계곡너머로 활을 쏘는 궁사들. 사진 강나리 기자.
황학정 사대에서 계곡너머로 활을 쏘는 궁사들. 사진 강나리 기자.

서울 서촌 인왕산 동쪽 기슭 사직단을 지나면 ‘국궁 1번지’, ‘국궁 종가’로 불리는 황학정이 나온다. 도심 한가운데임에도 산자락으로 들어서니 어느새 초록의 향기가 가득하다.

황학정 바로 앞 활을 내는 사대射臺 위 벤치에 앉으면 과녁 너머 멀리 서울 도심 건물들이 달걀 바구니 안에 담긴 듯 펼쳐진다. 노을이 지는 저녁이나 동이 트는 아침이면 더욱 황홀한 광경을 마주할 수 있다.

황학정 사대 위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 풍경. 아침 동 틀때와 저녁 노을이 지면 장관이다. 사진 황학정 제공.
황학정 사대 위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 풍경. 아침 동 틀때와 저녁 노을이 지면 장관이다. 사진 황학정 제공.

주변에 오래된 목련나무가 듬직하게 서 있어 이른 봄이면 화사한 꽃망울을 터트려 장관을 이루고, 여름에는 시원한 그늘을 드리운다. 사대 왼쪽 산자락을 따라서 바위를 뚫고 힘차게 자란 소나무가 세 그루나 있어 강인한 생명의 신비를 느낄 수 있다.

황학정의 라성택 사두(활터의 대표)는 “우리 활터는 인위적인 시설물이 아니라 아름다운 자연경관 속에 자리했다”라며 “황학정 곁에 작은 약수터가 있는데 그 위에 황학정의 아름다운 풍광을 읊은 ‘황학정 8경’이 새겨진 바위가 있다”고 소개했다.

(시계방향으로) 황학정 내 바위를 뚫고 자란 소나무, 황학정 8경이 새겨진 약수터 바위, 봄날의 황학정. 사진 강나리 기자, 황학정 제공.
(시계방향으로) 황학정 내 바위를 뚫고 자란 소나무, 황학정 8경이 새겨진 약수터 바위, 봄날의 황학정. 사진 강나리 기자, 황학정 제공.

고대부터 ‘활의 민족’으로 불린 한국인에게 황학정은 남다른 의미가 있는 활터이다. 오랫동안 활은 강인한 호국정신이 깃든 무예이자 선비의 심신수양 덕목으로 사랑받으며, 전국에 관官과 민간에서 세운 활터(사정)가 많았다.

그러나 조선 후기 점차 포와 총이 전쟁의 주 무기가 되면서 활쏘기는 쇠퇴했다. 특히 재래의 문물제도를 버리고 근대 신문물로 개편하던 1894년 갑오경장 때 군 무기에서 활이 배제되고, 무과시험에서도 제외되었다.

본래 황학정은 광무황제(고종)가 대한제국을 선포한 지 2년째인 1898년 경희궁 내 회상전 담장 옆에 만든 활터로, 고종이 활쏘기 연습을 하던 곳이었다. 쇠퇴하던 조선의 궁술이 다시 활기를 되찾는 사건이 1899년에 일어났다.

독일 하인리히 폰 프로이센 왕자의 방한이었다. ‘덕국 친왕’으로 불린 하인리히 왕자는 독일 동아함대 제2전대장이었으며, 기함 ‘도이칠란트’호를 타고 고종 황제를 알현하기 위해 조선을 찾았다. 이는 조선과 대한제국을 포함해 근대 최초의 국빈방문이었다.

일제의 노골적인 침략야욕으로 국가존망의 위기에 놓인 고종황제는 독립국으로서의 권위를 서구열강에 알리는 것이 시급했던 터라 매우 중요한 행사였다.

(시계방향으로) 독일 하인리히 왕자가 방한한 후 독일에서 발행된 그림엽서, 오른쪽 상단에 한국과 일본의 지도가 있다. 프랑수아 봉땅 전임 주한 벨기에 대사(2012~2016)의 국궁사랑은 남달랐다, 조선 선비의 활쏘기 민화, 옛 황학정 그림. 사진 황학정 제공.
(시계방향으로) 독일 하인리히 왕자가 방한한 후 독일에서 발행된 그림엽서, 오른쪽 상단에 한국과 일본의 지도가 있다. 프랑수아 봉땅 전임 주한 벨기에 대사(2012~2016)의 국궁사랑은 남달랐다, 조선 선비의 활쏘기 민화, 옛 황학정 그림. 사진 황학정 제공.

하인리히 왕자는 알현 자리에서 조선의 무예를 보여주길 원했다. 고종은 조선의 검술과 궁술을 선보여주었다. 왕자는 유럽에서도 발달한 검술에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으나 장안의 궁수 6명이 쏜 화살이 과녁을 맞힐 때마다 박수갈채를 아낌없이 보냈다.

그는 조선의 활쏘기에 크게 심취해 황학정에 반나절을 머물렀다. 당시 유럽에서 검술은 국민체육이 될 만큼 익숙했으나, 유럽의 여느 활보다 훨씬 멀리 날아가는 강력한 조선의 활에 하인리히 왕자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라성택 사두는 “유럽에 헝가리 활, 영국 활 등이 있는데 보통 사거리가 50m에 불과하다. 그에 반해 우리 활은 140~200m를 거뜬히 날아가니 얼마나 놀라웠겠나. 이날의 흔적은 독일에서 한국의 활쏘기를 그린 엽서가 발행된 것으로 확인할 수 있다”며 “당시 왕자는 고종에게 활쏘기를 국민체육으로 장려할 것을 권했다고 한다”고 전했다.

독일 하인리히 왕자가 감탄한 조선의 활. 왼쪽은 시위를 걸어놓은 '얹은 활', 오른쪽 위에는 평상시 보관할 때 활시위를 벗긴 '부린 활', 오른쪽 아래는 화살촉을 둥글게 만든 박두, 버들잎 모양의 유엽전, 무과시용 습사용으로 사용한 철전. (국궁 전시관 자료). 사진 강나리 기자.
독일 하인리히 왕자가 감탄한 조선의 활. 왼쪽은 시위를 걸어놓은 '얹은 활', 오른쪽 위에는 평상시 보관할 때 활시위를 벗긴 '부린 활', 오른쪽 아래는 화살촉을 둥글게 만든 박두, 버들잎 모양의 유엽전, 무과시용 습사용으로 사용한 철전. (국궁 전시관 자료). 사진 강나리 기자.
다양한 조선의 활. (시계방향으로) 신기전, 수노기, 궐장노, 호미궁. 사진 강나리 기자.
다양한 조선의 활. (시계방향으로) 신기전, 수노기, 궐장노, 호미궁. 사진 강나리 기자.

이를 계기로 고종황제는 잠든 호국정신과 민족 자긍심을 깨우고 병사들의 체력 증진을 위해 백성들에게 활쏘기를 장려하는 칙령을 내려 1899년 8월 10일 황학정을 열고 사계를 조직했다. 이듬해인 1900년 3월 8일 황태자(훗날 순종)의 생일인 천추경절에 황학정을 공식 개정하고, 황태자가 직접 총재를 맡고 초대 사두는 민영환이 맡았다.

고종의 칙령으로 소멸 직전이던 조선의 활쏘기 문화가 되살아나 전국에 수많은 사정이 문을 열고 활기를 되찾았다. 궁술장려칙령은 바람 앞 등불과 같은 위태로운 나라와 백성의 존속을 염원하는 고종의 절절한 심정이 아니었을까.

황학정 누정 안에는 고종 황제의 영정사진과 태극기가 걸려 있다. 사진 강나리 기자.
황학정 누정 안에는 고종 황제의 영정사진과 태극기가 걸려 있다. 사진 강나리 기자.

그러나 일제강점기 한국의 전통 무술을 금지하면서 또다시 위기를 맞았다. 일제에 의해 1922년 경희궁이 헐리면서 황학정도 강제철거되어 인왕산 아래 활터인 등과정 옛터(현 위치)로 이전하게 되었다. 광복 후에도 6.25 한국전쟁 중 과녁이 없어졌지만, 기둥과 지붕이 건재해 복구할 수 있었다.

(위) 1900년 3월 8일 황태자(훗날 순종)의 생일인 천추경절에 공식개정한 황학정. (아래) 광복 후 1958년 4월 열린 제1회 남녀 활쏘기 대회 여자부문.  활쏘기는 여성들도 즐겨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에서 대갓집 마님이 활 쏘는 장면이 사실에 근거했음을 보여준다. 자료 황학정 국궁전시관.
(위) 1900년 3월 8일 황태자(훗날 순종)의 생일인 천추경절에 공식개정한 황학정. (아래) 광복 후 1958년 4월 열린 제1회 남녀 활쏘기 대회 여자부문.  활쏘기는 여성들도 즐겨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에서 대갓집 마님이 활 쏘는 장면이 사실에 근거했음을 보여준다. 자료 황학정 국궁전시관.

위기 속에서도 조선의 활 문화를 지킨 이들로 인해 1928년 조선국술연구회(현 대한궁도협회)를 조직하고 제1회 전조선궁술대회를 개최했으며, 1929년 최초의 국궁지침서 ‘조선의 궁술’도 발간했다. 광복 이후 국궁을 이끈 황학정은 1959년 황학정 내에 최초로 양궁부를 설치했고 이것이 발전해 대한양궁협회가 탄생했다.

현재 올림픽을 비롯해 세계무대에서 한국의 양궁이 남녀를 통틀어 최고의 자리에 오를 수 있는 산실도 황학정인 셈이다. 황학정이 민간사정인 석호정(390년)보다 역사는 짧지만, 황실의 주도로 건립되고 국궁 부활과 양궁의 산실이란 면에서 한국 활쏘기의 종가로 자리 잡게 된 이유이다.

라성택 황학정 사두(대표)는 활쏘기가 인성의 무예이자 예禮의 스포츠라고 강조했다. 사진 강나리 기자.
라성택 황학정 사두(대표)는 활쏘기가 인성의 무예이자 예禮의 스포츠라고 강조했다. 사진 강나리 기자.

라성택 사두는 “활은 사예(射藝, 활 쏘는 기예)를 지켜 다하지 않으면 맞힐 수 없다. 깊은 단전호흡으로 마지막 만작 자세에서 숨을 멈추고 고도의 집중을 해야 하는데 숨이 흔들리면 몸이 흔들린다. 이때 바른 몸가짐으로 마음을 비워야 한다. 욕심으로는 할 수 없다”며 “자아실현과 자존감, 성취감을 높일 수 있는 생활스포츠”라고 강조했다.

또한, 그는 활쏘기가 예禮의 스포츠라고 했다. “사대에 섰을 때는 먼저 인사를 하고, 습사무언習射無言이라고 활을 쏠 때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 남의 활을 시기하거나 참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또, 동진동퇴同進同退라 해서 동시에 사대에 들고 나야지 자신의 활쏘기가 끝났다고 먼저 나가서도 안 된다. 바른 몸과 마음이 기본이다.”

라 사두는 오십견으로 고통받을 때 지인의 추천으로 7~8년 전 활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는 “지금은 어깨도 튼튼해졌을 뿐 아니라 구부정했던 자세도 당당하게 펴졌다. 황학정 정회원인 중에는 90대 어르신도 여럿”이라며 “남녀노소 없이 즐길 수 있는 전통 활쏘기를 널리 대중화하고 싶다”고 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사두를 따라 국궁전시관에서 우리 활 관련 유물들과 세계의 활을 관람한 후 황학정에 올랐다.

동남향을 향한 황학정 누정은 총 4칸으로 그중 동쪽 한 칸은 한 단 높게 누마루를 꾸미고 다락집처럼 높이 받친 장초석으로 주춧돌을 세웠다. 누정 안에는 황학정을 세운 고종황제 영정사진과 태극기가 위쪽에 나란히 걸려 있고 너른 마루가 있는데 평소에는 닫아둔다. 직궁례나 삭회가 열릴 때 누정의 방문들을 모두 들어 올리면 날아오를 듯한 지붕 아래 멋진 공간이 펼쳐진다.

(위)황학정 누정 아래 사대. 1922년 경희궁이 일제에 의해 헐리면서 황학정이 현재 위치로 이전했다. 사진 강나리 기자. (아래) 분합문(들어열림문)으로 개방하면 멋진 공간이 펼쳐진다. 사진 황학정 제공.
(위)황학정 누정 아래 사대. 1922년 경희궁이 일제에 의해 헐리면서 황학정이 현재 위치로 이전했다. 사진 강나리 기자. (아래) 분합문(들어열림문)으로 개방하면 멋진 공간이 펼쳐진다. 사진 황학정 제공.

직궁례는 전수관에서 연습과정을 마치고 첫 활을 내는 것을 축하하는 자리로, 선후배 궁사들과 함께하는 오리엔테이션과 같은 개념이다. 삭회는 두레의 일종이다. 매월 그동안 배우고 연습한 기량을 겨루며 교감하는 자리를 마련하는데 15명씩 조를 이룬 사원(정회원)들이 차례로 음식을 대접한다.

사두는 “명궁이던 정조대왕은 수시로 활쏘기 대회를 열고 과녁을 명중하면 상을 내리지만 못 맞히면 벌주 석 잔을 내려 신하들이 크게 취했다고 한다. 삭회에서도 실력을 겨뤄 상도 주고 벌주를 주던 전통을 계속 유지해 왔다”고 했다.

라성택 사두는 “예전에 경복궁 서편 인왕산 아래 서촌에는 5개의 활터가 있었다. 황학정과 인왕산 기슭 옥동에 있던 등용정登龍亭, 삼청동의 운용정雲龍亭, 사직동의 대송정大松亭, 누상동의 백호정白虎亭”이라며 “현재는 터만 남은 곳도 있는데 우리 활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서촌 오사정 탐방 코스를 문화재청에 신청 중”이라고 했다.

그는 “한복을 입고 북촌과 서촌을 구경한 젊은이들과 관광객들이 우리 활터에 들러 활을 쏘며 심신 수양과 예절의 스포츠인 우리 활 문화를 깊이 체험하고 경복궁으로 가는 것을 제안하고 싶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