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팀은 이른 새벽 금관가야 마지막 왕, 구형왕의 릉(경남 합천) 답사를 마치고 아침을 먹었다. 물 맑은 산청의 다슬기와 호박잎, 그리고 청양고추가 들어간 뽀얀 해장국은 겨울 추위 속에 답사를 다녀온 사람들의 몸을 녹이고 속을 시원하게 풀어주었다. 답사에서 컨디션을 좌우하는 것 중 하나가 음식인데 답사팀의 운이 좋았다.

겨울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아침, 다음 목적지는 경남 함안 아라가야 유적지였다. 함안 아라가야 박물관과 함께 2013년 12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유네스코 세계유산회의에서 가야문화를 대표하는 유적으로 가치를 인정받아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된 말이산 고분군을 둘러보았다.

경남 함안 아라가야의 말이산 고분군에 오르는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답사팀. [사진=강나리 기자]
겨울비를 뚫고 경남 함안 아라가야의 말이산 고분군에 오르는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답사팀.  [사진=강나리 기자]

아라가야는 경남 함안을 중심으로 창원, 진주, 의령 일부에 걸쳐 형성되었다. 아라가야 또한 금관가야, 대가야와 마찬가지로 1세기 경 소국형태로 있다가 부여족이 이동했던 3세기 말 4세기 초 본격적인 국가의 모습을 갖췄다. 바닷가 8개국 연합을 형성했던 칠포국(칠원) 등을 병합해 진동만을 통한 해외진출이 가능해지면서 강력한 국가로 성장했다.

아라가야는 광개토태왕비문에는 안라安羅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일본서기> 흠명 5년 3월조 기록을 보면 “무릇 임나는 안라를 형(兄)으로 여기고 오로지 그 뜻에 따른다.”고 했다. 또한 일본서기 편찬에 가장 많이 인용된 사서 중 하나인 <백제본기>에는 “안라를 부(父)로 여긴다.”고도 기록했다.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정경희 국학과 교수는 “가야연맹 중 강성하고, 특히 일본과의 관계에서 가장 힘을 가졌던 나라는 금관가야와 아라가야였다.”고 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가야와 관련하여 우리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은 금관가야와 대가야 정도이며, 아라가야는 비교적 생소한 편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정경희 교수는 이에 대해 “가야의 나라들이 신라에 흡수되어 신라의 관점에서 역사가 기술되었다. 신라는 교류나 접촉이 활발했던 금관가야와 대가야(고령)를 중심으로 기록했고, 이로 인해 두 나라가 가장 강성했다는 인식이 지배적”이라고 설명했다. 정 교수는 “실제 문화수준이나 지배영역 등 여러 요소로 살펴보면 금관가야 다음으로는 아라가야, 그 다음은 다라가야 순으로 번성했다고 봐야한다.”고 설명했다.

경남 함안은 구석기시대부터 사람들이 살기 좋은 땅이며, 경남에서 고인돌이 가장 많은 지역이기도 하다. (시계방향으로) 함안박물관에 전시된 빗살무늬 토기, 각종 항아리와 돌칼 돌 화살촉 등, 울산반구대 암각화와 함께 가장 잘 알려진 함안의 동촌리 바위그림과 도항리 바위그림 묘사도, 도항리 바위그림. [사진=강나리 기자]
경남 함안은 구석기시대부터 사람들이 살기 좋은 땅이며, 경남에서 고인돌이 가장 많은 지역이기도 하다. (시계방향으로) 함안박물관에 전시된 빗살무늬 토기, 각종 항아리와 돌칼 돌 화살촉 등, 울산반구대 암각화와 함께 가장 잘 알려진 함안의 동촌리 바위그림과 도항리 바위그림 묘사도, 도항리 바위그림. [사진=강나리 기자]

아라가야의 500년 수도였던 함안은 남쪽은 높고 북쪽이 낮은 분지로, 북과 서는 낙동강과 남강이, 남과 동은 600m가 넘는 산으로 둘러져 있는데, 구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기 좋은 땅이었다. 구석기 유물 뿐 아니라 특히 청동기시대 고인돌, 선돌 등 거석 제단시설이 많아 경남지역에서 고인돌이 가장 많이 발굴된 곳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에서 대표적인 바위그림으로는 국보 제285호 인 울산 반구대 암각화와 함께 도항리 바위그림(함안군 가야읍)과 동촌리 바위그림(함안군 군북면)을 꼽는다.

불꽃문양 토기, 말 갑옷 등 뛰어난 유물들…문화강국, 아라가야

말이산 고분군 바로 앞에 위치한 함안박물관에 들어서자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은 기증자 명단이었다. 함안박물관 개관 전인 2001년부터 ‘박물관 건립을 위한 유물 수집 운동’을 벌여 군민들이 520여 점을 기증했다고 한다. 개인이 소장한 문화유산을 기증함으로써 함안의 역사와 문화를 밝히고 후대에 전해, 모두가 향유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는 면에서 매우 뜻 깊다.

말이산고분군에서 출토된 아라가야의 유물을 소장한 함안박물관 입구에 있는 유물기증자 명단. [사진=강나리 기자]
말이산고분군에서 출토된 아라가야의 유물을 소장한 함안박물관 입구에 있는 유물기증자 명단. [사진=강나리 기자]

이들 기증품 중에는 아라가야 토기의 상징인 불꽃무늬 토기를 비롯해 특색 있는 토기가 많았다고 한다. 다른 가야의 토기와 구분되는 이 불꽃모양의 창을 낸 굽다리 접시를 통해 여러 가야 중 독특한 문화를 가진 독자적인 정치세력이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 불꽃무늬 토기는 아라가야 영역 외에도 김해, 부산 합천 창녕, 울산, 경주, 김천 등 가야 신라문화권인 영남지역과 고대 일본의 중심지였던 긴키近畿지역(옛날 기나이에 가까운 지방이라는 뜻)에서 출토되어 1,500년 전 아라가야의 대외교류 관계를 추적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한다.

아라가야의 상징적인 토기는 불꽃모양의 창이 하단에 나있는 불꽃무늬 토기이다. 토기를 제작하던 모습을 재현한 모습(상단)과 상징인 불꽃무늬(하단 왼쪽)과 불꽃무늬 토기들.
아라가야의 상징적인 토기는 불꽃모양의 창이 하단에 나있는 불꽃무늬 토기이다. 토기를 제작하던 모습을 재현한 모습(상단)과 상징인 불꽃무늬(하단 왼쪽)과 불꽃무늬 토기들.

아라가야가 진동만과 대한해협, 세토나이 해를 거쳐 왜와 직접 교류했음을 보여주며, 고분보다는 생활유적에서 주로 출토되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이는 아라가야인들이 직접 일본으로 건너가 활약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가 된다.

매우 발달한 가야의 토기가 일본 스에기(須恵器)토기의 원류라고 할 수 있다. 스에기는 4~5세기 일본 고분시대 중기에서 평안(平安, 헤이안)시대에 걸쳐 제작된 토기(녹로로 빚어 고온에서 구운, 비교적 경질(硬質)인 회흑색 토기이다. 이 토기는 주로 한국에서 건너간 이들이 구웠다고 전한다.

불꽃무늬토기 분포로 분 아라가야의 영영과 대외교류 지도. 아라가야의 토기가 일본 규슈지방 기나이, 이즈모까지 진출한 경로를 보여준다. [사진=강나리 기자]
불꽃무늬토기 분포로 분 아라가야의 영영과 대외교류 지도. 아라가야의 토기가 일본 규슈지방 기나이, 이즈모까지 진출한 경로를 보여준다. [사진=강나리 기자]

반면 아라가야 고분유물에서 주변 다른 가야나 신라, 백제 등지에서 제작되어 들여온 것으로 생각되는 외래계 유물이 다수 확인되어 수출과 수입이 활발했던 무역강국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박물관 안에는 불꽃무늬 토기 외에도 각양각색의 토기가 많았고, 항아리 등을 덮는 문양 뚜껑도 눈길을 끌었다. 뚜껑의 윗면에는 중앙점을 기준으로 한 개 또는 여러 개의 동심원을 둘러 구분지은 후 동심원과 동심원 사이의 공간에 빗금무늬, 짧은 선 무늬 등을 반복적으로 장식했는데, 얼핏 고조선 유물인 청동 다뉴세문경의 정교한 문양을 떠오르게 했다.

아라가야는 매우 높은 문화수준을 갖춘 나라로 다양한 유물이 발굴되었다. (시계방향으로) 고조선의 청동 다뉴세문경을 떠올리게 하는 문양뚜껑, 등잔모양 토기, 수레바퀴 모양 토기, 유리구슬. [사진=강나리 기자]
아라가야는 매우 높은 문화수준을 갖춘 나라로 다양한 유물이 발굴되었다. (시계방향으로) 고조선의 청동 다뉴세문경을 떠올리게 하는 문양뚜껑, 등잔모양 토기, 수레바퀴 모양 토기, 유리구슬. [사진=강나리 기자]

 

또한, 말을 탄 무사의 모습을 한 기마토기, 수레바퀴모양의 토기, 가야지역 박물관마다 빠지지 않는 유리구슬들, 새 모양 장식이 달린 미늘쇠, 중앙의 큰 구멍과 사방 4개의 구멍이 난 등잔모양 토기 등도 보였다. 정경희 교수는 “기마 토기의 인물이 쓴 뿔 모양의 모자는 북방의 문화이다. 그들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나타낸다. 새 모양 장식이 달린 미늘쇠는 제천의례와 관련된 유물이다. 또한 등잔모양 토기의 5개구멍은 선도의 삼원오행 사상 중 오행인 기氣화火수水토土천부天符를 상징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평했다.

사람과 말 모두 군장을 갖춘 아라가야의 기미인물. [사진=강나리 기자]
사람과 말 모두 군장을 갖춘 아라가야의 기미인물. [사진=강나리 기자]
함안 말이산 고분군 마갑총에서 발굴된 말 갑옷. (상단) 고구려 벽화나 기마인물 토기(하단 왼쪽)에서 표현된 말 갑옷의 실물이 최초로 발굴되었다. 아라가야의 말 갖춤새(하단 오른쪽). [사진=강나리 기자]
함안 말이산 고분군 마갑총에서 발굴된 말 갑옷. (상단) 고구려 벽화나 기마인물 토기(하단 왼쪽)에서 표현된 말 갑옷의 실물이 최초로 발굴되었다. 아라가야의 말 갖춤새(하단 오른쪽). [사진=강나리 기자]

박물관 안 아라가야 유적 중 단연 눈에 띄는 것은 900장 이상의 작은 철판을 가죽 끈으로 연결해 만든 말 갑옷이었다. 이 말 갑옷은 1992년 말이산 고분군 북쪽 끝자락 마갑총에서 발굴되었다. 고구려 고분벽화나 기마인물형 토기에서 표현된 것과 같은 말 갑옷이 거의 완전한 형태로 최초로 출토된 것이다. 그밖에도 각종 말 갖춤새와 철제품과 금, 은, 유리, 옥으로 만든 장신구들이 아라가야의 강력한 위상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우리가 아라가야의 역사 중 주목할 것이 있다. 아라가야는 529년 신라, 백제, 왜 등 당시 가야를 둘러싼 여러 나라들이 참여하는 고대의 국제회의라고 할 ‘안라고당회의’를 개최했다는 기록이 있다. 다른 가야들에게 형 또는 아버지의 나라라고 불리던 아라가야는 6세기 초 왜 국제회의를 소집했을까?

* 가야문화유산답사기는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국학과 천손문화답사팀이 지난 2017년 12월 9일과 10일 양일간 경남 고령, 합천, 산청, 함안, 김해 등 대표적인 가야문화권의 고분군과 박물관을 탐방한 내용이다. 답사팀은 동 대학원의 정경희 교수가 이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