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문화 답사팀은 대가야 고분에서 발길을 돌려 대가야왕릉박물관(경북 고령군 대가야읍)에 들어섰다. 발 아래 지산동 고분 내부가 펼쳐졌다. 돌덧널무덤 안에는 왕의 무덤인 으뜸덧널과 왕이 저승에서 사용할 식량과 물건을 보관하는 창고인 딸린덧널, 그리고 순장덧널들이 있었다. 주변에는 대가야 토기의 특징을 보여주는 원통모양 그릇받침을 비롯해 고분에서 발굴한 부장품들을 전시했다.

▲ 대가야왕릉전시관 내부 모습.<사진=강나리 기자>

이 원통모양 그릇받침은 대가야가 400년대 후반 세력을 확장하던 시기에 만들어졌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사각형 삼각형의 구멍이 뚫려 있고 뱀 모양의 세로장식 띠가 붙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고분 중 44호분에서 백제계 유물로 금동합과 등잔, 은장식 쇠창이 나왔고 일본과의 교역품인 야광조개국자가 나왔다. 주변국과의 광범위한 교역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 대가야왕릉전시관에서 대가야박물관으로 가는 길에 복원한 제철로 모형이 있다.<사진=강나리 기자>

왕릉전시관에 이어 답사팀은 대가야 박물관으로 향했다. 가는 길목, 가야의 제철문화를 보여주는 제철로 복원모형이 있었다. 2005년 5월 고대의 방법으로 복원한 제철로를 이용해 철광석을 녹여내는 실험을 했다. 고령군 쌍림면의 고대 철 생산 유적 주변에서 철광석을 채취해 참나무 숯을 함께 넣어 12시간이상 풀무질로 바람을 일으켜 진행한 실험결과 철이 만들어졌고 유리와 같은 찌꺼기도 나왔다고 한다. 이 실험은 2005년 6월 KBS방송국이 제작한 ‘역사스페셜’에도 방영되었다. 제철로에서 박물관으로 가는 야외광장에서는 젊은이들이 대가야 예술의 상징인 가야금과 현대 악기인 기타 협연을 하고 시민들이 공연을 듣고 있었다.

▲ 대가야 예술의 상징 가야금과 현대 악기인 기타 협연을 하는 젊은이들.<사진=강나리 기자>


박물관 내 지산동 518호 고분전시관 잎구에 고령 장기리 바위그림 유적이 먼저 보였다. 대가야읍 회천변의 알터마을 입구에 있는 가로 6m, 세로 3m 정도 되는 바위 면에 새겨져 있는 바위그림에는 나이테처럼 둥근 동심원, 깃털이 달린 듯 네모진 가면 모양 등 다양한 문양이 여럿 있었다. 박물관 측은 청동기시대 제사 유적으로 추정했다.

답사팀을 이끈 정경희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교수는 “동심원을 그린 것을 태양으로 해석하는데, 만일 태양이라면 왜 여러 개를 그렸을지 생각해야 한다.”며 “알터마을 이라고 불렀는데, 우리 건국신화에는 동명왕, 박혁거세, 김수로왕 등 알을 깨고 나오는 신화가 많다. 이는 어리석음을 깨고 나오는 밝음, 깨달음을 추구했던 선도의 흔적으로 보아야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 대가야읍 회천변의 알터마을 입구에 있는 바위그림 복원품. <사진=강나리 기자>

전시관에는 금동관, 연꽃무늬 벽돌을 비롯해 토기, 무기, 말갖춤, 장신구 등 전시되어 있었다. 날개를 펼친 듯 화려한 금동관모장식도 보였다. 전시관 측은 대가야의 문화를 세련된 예술성과 실용성을 갖춘 ‘장인匠人 정신의 결정체’라 표현했다.

▲ 대가야의 금관(위)과 금동관(아래 왼쪽), 그리고 일본에 있는 대가야 금관. <사진=강나리 기자>

전시된 대가야의 토기는 부드러운 곡선미와 풍만한 안정감이 특징이다. 무기와 관련하여 갑옷과 투구는 신라보다 가야지역에서 많이 출토되었다. 특히 지산동 518호분 투구는 매우 섬세하게 제작되었다. 정수리 부분에는 상투 위에 얹는 관모 형태가 달렸고, 투구의 이마부분에는 햇빛을 가리는 챙이 있다. 그리고 볼 가리개는 비늘형태의 철판을 붙였다. 발굴된 고리자루큰칼은 손잡이와 고리에 용이나 봉황 등으로 장식했다.

토기 등 각종 유물에서는 하나의 근원과 천지인을 뜻하는 1기, 3기 유적 또는 신라 박제상의 선도사서 <부도지>에 나오는 기‧화‧수‧토‧천부를 나타내는 5나 # 등 선도적 표상이 보였고 제천문화와 관련성이 높은 옥 장식도 보였다. 그러나 후대에 갈수록 상징은 다양한 형태로 바뀌고 장식물도 화려한 금이 주를 이루었다.

▲ 대가야의 토기는 부드러운 곡선미와 안정감이 특징이다.<사진=강나리 기자>

정경희 교수는 전시된 유물을 따라가며 “대가야에서 대규모 고분이 나타난 시기는 4~5세기경이다. 후대에 갈수록 대규모 고분이 발굴되고 부장품도 왕의 권위와 세력을 나타내는 위세품(威勢品)으로 바뀐다. 가야산을 중심으로 하늘에 천제를 올리던 선도제천문화가 고조선 와해이후 점점 더 약화된 것을 나타낸다. 홍익인간 재세이화를 추구하고 깨달음 중심의 선도문화의 상징이 점점 사라지고 대신 권위와 강한 군사력을 나타내는 문화가 성립된 것을 볼 수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선진문물을 가지고 이주하여 토착세력과 결합했던 가야의 건국세력, 갑옷과 투구를 입고, 고리자루큰칼과 창으로 무장했던 그들은 누구인가.

▲ 가야의 뛰어난 제철기술과 군사력을 보여주는 철갑 기마무사. <사진=강나리 기자>

현재 가야의 고분과 유물로 밝혀진 바는 부여계라는 것이다. 기자가 교과서에서 배운 부여는 고조선 이후 나라이름이었다. 그러나 부여는 하나의 나라이름만은 아니었던 듯하다. 백제 왕가의 성이 부여라고도 하며, 선도 사서를 살펴보면 곳곳에서 부여라는 명칭 나온다.

행촌 이암이 지은 <단군세기>에는 1세 단군왕검의 막내 아들이 ‘부여’이며 그를 부여후(夫餘侯)로 임명했다고 한다. 44세 구물단군 때 나라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국호를 ‘대부여’로 변경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북부여기>에서는 고조선이 와해되고 공화정을 시작했을 때, 웅심산에서 일어난 해모수가 북부여를 세우고 스스로 해모수단군으로 칭했다. 북부여 후기 고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했다고 한다. 북부여에서 떨어져 나온 해부루가 가섭원부여(동부여)를 세웠다가 3세 대소가 고구려 대무신열제와의 싸움에서 전사했다. 이때 유민들이 갈사부여와 연나부부여로 나뉘었다. 대소의 동생이 세운 갈사부여는 46년 만에 고구려 태조무열제에게 나라를 바치고 동부여후로 책봉된다.

서부여로 불리는 연나부부여는 선비 모용씨와의 전투에서 패한 6세 의려왕 과 7세 의라왕은 각각 왜를 평정하고 나라를 세운 것으로 나온다. 일본 최초의 통일왕조 야마토 왜를 세운 오진왕이 의려왕 또는 의라왕이라는 설이 있다. 결국 잔존세력은 고구려 문자열제에게 나라를 바쳤다. 북부여는 고조선과 삼국시대, 그리고 일본 왕조까지 이어주는 연결고리이다.

당시 상황을 종합해보면, 서기 전 3~1세기 때 한반도 북쪽 대륙은 혼란스럽고 치열한 전쟁터였다. 강성해진 중국 한나라, 선비 모용씨 등 북방세력, 그리고 고조선 유민을 규합해 일어난 고구려 등 권력다툼의 회오리를 피해 한반도 남부로 신천지를 찾아 내려온 세력들이 고조선 부여계일 것으로 추정되는 것이다.


그들의 원류를 찾아볼 기록으로는 <삼국유사> 제1권 기이 제1 칠십이국조에는 가야의 전신을 ‘변한 12국’이라고 나온다. “마한은 서쪽에 있어 54개의 작은 고을들을 모두 나라로 일컬었으며, 진한은 동쪽에 있어 열두 개 작은 고을을 각각 나라로 일컬었으며, 변한은 남쪽에 있어 열두 개 작은 고을들을 각각 나라로 일컬었다.” 신라 대학자 최치원 선생은 마한이 고구려, 진한이 신라라고 했다.

반면 서기전 1세기~3세기 삼한(마한 변한 진한)의 역사를 기록한 중국 사서 <삼국지>(위서)와 <후한서>는 백제, 신라의 전신을 마한, 진한으로 기록한 반면, 가야의 전신을 ‘변진(弁辰)12국’으로 대부분 적고 있다.

▲ 삼국유사 제1권 제1 기이편 '칠십이국' 기록. (1512년 규장각본, 국보 306-2호) 신채호 선생의 연구에 따르면 한반도 남부에 성립한 후삼한의 기록이다. <사진=국사편찬위원회 홈페이지>

이에 대해 원로사학자 김정학, 정중환은 70년대에 “3종족이 있으니 마한 진한 변한이다”라며 “삼국지는 변한과 진한을 같이 열거하여 ‘변진한 24국’이라 하고 있는데 양자의 혼동을 막으려 변한 12국 앞에만 변진을 붙였다.”고 했다. 이병도는 “마한(백제지역)의 중심국인 목지국의 지배를 벗어나지 못한 진한 12국과의 구분을 위해 가야지역에는 변진을 붙였다.” 고 했고, 백승옥은 ‘변진은 진한과 섞여서 살았다’는 삼국지의 기록을 근거로 ‘변진’ 표기는 종족을 밝힌 것으로 가야 지역에는 단일종족의 신라와 달리 변‧진 2종족이 섞여 살았음을 말해준다.“고 해석했다.

그러나 독립운동가이자 역사학자인 신채호 선생은 1920년대 ‘전후 삼한설’로 이를 해석했다. 두 번 이상 고구려와 발해 유적을 직접 답사하고, 상해, 북경, 만주 등지를 전전하며 역사서를 수집하며 역사연구에 심혈을 기울인 신채호 선생은 한국사의 본격적인 전개시기를 삼국 이전으로, 활동무대는 북으로 북만주, 서남쪽으로는 요서, 발해만 유역, 직예성, 산동, 산서, 하이허, 양쯔강 유역까지 미쳤다고 했다.

그는 김부식의 <삼국사기>나 그 이후 대부분의 역사서들이 한국사의 본격적인 전개시기를 삼국시대 이후로, 그 무대를 한반도와 만주로 국한시키고, 일제 식민주의 사관론자들도 한국사의 전개 무대를 한반도로 축소했던 사관을 깬 것이다. 중화사관이나 식민사학으로 물들어 쪼그라든 기존 우리역사의 시간적‧공간적 영역을 직접 답사와 연구를 통해 회복한 것이다.

▲ 독립운동가이자 역사학자로 직접 옛 고구려와 발해 유적지를 답사하고, 중국 상해, 북경, 만주 등지에서 역사서를 수집 연구한 단재 신채호 선생. <사진=구글 무료이미지>

신채호 선생은 <전후삼한고前後三韓考>에서 단군이 세운 조선이 뒷날 삼조선(신조선 불조선 말조선), 즉 삼한으로 분립되어 중국 동북지역에서 만주지역에 걸쳐 존재했는데 이를 전삼한이라 칭했다. 이들 전삼한이 이동해 한반도 남쪽에 후삼한을 형성했다는 것이다. 그는 이 글에서 우리 고대사에 지명 이동설, 부족 이동설을 과감히 도입해 우리 고대사에서 풀리지 않는 난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즉 고조선의 유민이 한반도 남부로 이주하면서 그들의 원류인 삼한의 이름을 가지고 왔다는 것이다. 신채호 선생은 “우리 민족사는 상고시대 중국민족에 필적하는 강건한 힘과 영토, 문화, 종교, 사상을 가졌는데 후대에 오면서 약화되었고, 근세조선에 이르러 모두 사대주의의 노예가 되었다.”고 했다.

이 역사왜곡이 시작된 단초를 신채호 선생을 고려 인종 13년 서경천도를 주장하던 묘청이 김부식에 패한 것으로 보았다. 선도와 불교를 아우르는 낭불 양가였던 묘청이 유가인 김부식과의 전쟁에서 패함으로써 이후 유교사상에 입각한 사대주의 보수주의로 전환되었다.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편찬해 사대주의에 부합한 역사를 남기고 그와 반대되는 독립적 낭가의 역사는 없애버렸다고 주장했다.

1920년대 직접 답사와 연구를 통해 우리 상고사를 보는 명견을 제시한 신채호 선생의 연구가 해방이후 이어지지 못한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정경희 교수는 “고조선 세력에게 처음에는 한반도가 신천지였겠지만 나중에는 일본이 신천지가 된다. 전쟁과 대립, 혼란을 피해 한반도 남부로 진출해서 바다를 이용한 교역을 통해 부를 축적한 가야세력은 고구려 백제 신라의 세력이 충돌하는 한반도 남부가 아니라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인 일본으로 진출하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당시 국제관계에 관해 그는 “가야의 중심은 내륙이 아니라 바다이다. 만주와 한반도, 일본을 연결하는 큰 그림을 그려놓고 보면 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중심지가 바뀌어 나가는지 알 수 있다. 동아시아 3국을 한판에 놓고 흐름을 보면 고대사를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질 것”이라고 했다.

고조선 부여계 이주세력에 의해 한반도 남부에 위세를 떨쳤던 대가야는 562년 신라 진흥왕의 명을 받은 이사부 장군과 화랑 사다함에 의해 역사에서 사라졌다. 다음 편에서는 신라와 대립과 혼인동맹, 다시 전쟁을 치른 대가야의 후반 역사와 마지막 태자 월광태자의 발길을 찾아가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