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을 주도하며 독립운동 통합을 이끈 독립운동가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을 주도하며 독립운동 통합을 이끈 독립운동가
  • 정유철 기자
  • npns@naver.com
  • 승인 2019.04.01 15: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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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훈처, 2019년 4월의 독립운동가 안창호 선생 선정

국가보훈처(처장 피우진)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도산(島山) 창호(1878.11.9.~1938.3.10.) 선생을 2019년 4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고 밝혔다.

2019년 4월의 독립운동가 안창호 선생.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총리 서리 겸 내무총장으로 활약할 당시의 안창호(1919). [사진=독립기념관]
2019년 4월의 독립운동가 안창호 선생.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총리 서리 겸 내무총장으로 활약할 당시의 안창호(1919). [사진=독립기념관]

독립기념관은 4월 1일부터 30일까지 한 달간 독립기념관 야외 특별기획전시장(제5, 6관 통로)에서 도산 안창호 선생 사진 등 9점을 특별전시한다.

안창호 선생은 1878년 11월 9일 평안남도 강서군 초리면 칠리(江西郡 草里面 七里) 봉상도(鳳翔島, 일명 도롱섬)에서 태어났다. 서울에서 1896년 18세 되던 해에 구세학당 보통부를 졸업하고 조교로 학생을 지도하였다.

이후 독립협회에 가입한 선생은 귀향하여 독립협회 관서지부를 설립해 민권운동에 뛰어들었다. 이를 통해 사회와 민족에 대한 소명의식과 국민교육의 중요성을 깊게 자각하였다. 그리하여 독립협회 해체 후에는 교육과 전교활동에 전념하며 본격적인 교육학 공부를 결심하게 되었고, 1902년 이혜련과 혼인한 다음날 부부가 함께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안창호 여권(1902). 안창호 선생이  미국 유학을 위해 받은 대한제국 발행 집조(여권)이다. [사진=독립기념관]
안창호 여권(1902). 안창호 선생이 미국 유학을 위해 받은 대한제국 발행 집조(여권)이다. [사진=독립기념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안창호는 한인들의 생활태도와 여건을 개선하고 한인친목회를 결성해 해외에 거주하는 우리 동포들이 단합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리버사이드의 오렌지농장 노동자들에게도 “오렌지 한 개를 따더라도 정성껏 따는 것이 나라를 위하는 일이다.”라고 강조하며 한인의 신용을 높이는 데 힘썼고, 점차 한인사회의 지도자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1905년 4월에는 동지들과 함께 조국 광복을 사업목표로 한 민주 한인단체인 공립협회를 창립했다. 안창호를 초대회장으로 한 공립협회는 각지에 지방회를 확대해 나갔고, 『공립신보』를 통해 국내외 소식을 알리는 등 구국사업을 전개하면서 이후 미주 한인사회를 대표하는 대한인국민회로 발전했다. 공립협회는 1909년에는 하와이 한인합성협회와, 1910년에는 대동보국회와 통합되어 1910년 5월 10일 미주 한인사회를 대표하는 대한인국민회로 발전하였다.

오렌지 수확. 미국 캘리포니아 리버사이드 오렌지 농장에서 오렌지를 수확하는 안창호 선생(1912). [사진=독립기념관]
오렌지 수확. 미국 캘리포니아 리버사이드 오렌지 농장에서 오렌지를 수확하는 안창호 선생(1912). [사진=독립기념관]

같은 시기 선생은 조국 독립을 위한 국내 비밀결사인 신민회 활동에도 참여하였다. 선생은 귀국하여 대성학교를 설립하고 청년학우회를 조직하는 등 다방면의 민족운동과 함께 항일비밀결사 신민회 활동을 통해 국권회복을 전개했다. 그러나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 후 국내에서의 독립운동 전개가 어려워지자 1911년 미국으로 돌아와 활로를 모색했다. 먼저 대한인국민회의 조직을 미주 뿐 아니라 시베리아, 연해주, 만주 등지로 확대하는 한편 흥사단을 설립해 독립운동의 조직과 기반을 마련했다.

대성학교 학생들과 교사들(1909). 안창호 선생은 국권회복운동에 필요한 인재와 국민교육을 담당할 교사를 양성하기 위해 평양에 대성학교를 설립했다. [사진=독립기념관]
대성학교 학생들과 교사들(1909). 안창호 선생은 국권회복운동에 필요한 인재와 국민교육을 담당할 교사를 양성하기 위해 평양에 대성학교를 설립했다. [사진=독립기념관]

1913년 5월 13일, 팔도 대표를 선정해 민족을 지도해 나갈 중견 인물을 배출하기 위한 동맹수련단체로서 흥사단이 출범하였다. 선생의 주도로 조직된 흥사단은 무실역행, 충의용감, 건전인격, 단결훈련, 국민개업(國民皆業) 등을 목표로 독립운동을 위한 조직적 재정후원과 일꾼양성을 통한 민족독립의 사명 완수에 매진하였다.

1919년 3·1운동 소식이 미국에 전달되자 3월 13일에 대한인국민회는 긴급위원회를 개최하였다. 이때 선생은 ‘삼일운동을 계승하자’라는 연설을 통해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민족자결주의의 공포, 그리고 파리평화회의 개최와 같은 외부 요인보다 민족의 실력을 보여준 3.1운동이 훨씬 중대한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선포하였다.

1921년 1월 1일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임시의정원 의원의 신년축하기념. [사진=독립기념관]
1921년 1월 1일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임시의정원 의원의 신년축하기념. [사진=독립기념관]

3·1운동이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으로 결실을 맺자 선생은 1919년 5월 25일에 상하이에 도착해 임시정부의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서리로 취임하였다. 이후 임시정부의 체계를 갖추고 조직적으로 사업을 전개해 나갔다.

정부에는 국민이 있어야 하므로 먼저 인구조사에 착수하였고 정부 운영에 소요되는 재정 확보를 위한 국채 발행을 비롯해 인두세 징수, 구국재정단 조직 등 여러 정책을 고민하였다.

1932년 4월 29일에 윤봉길 의사가 일본인들의 천장절 행사장인 홍구공원에 폭탄을 투척하자, 같은 날 상해 이유필의 집을 방문했던 선생은 민단장으로 오인되어 일본 경찰에 의해 연행되었다. 이후 국내로 이송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대전감옥으로 이송되는 2년 6개월간의 옥고를 치른 끝에 1935년 2월 10일 가출옥하였다. 곧이어 일제는 국내의 민족운동 일체를 말살하기 위해 1937년 6월, ‘동우회사건’을 일으켰다.

1936년 동우회 사건으로 피체되기 전의 안창호. 1932년 윤봉길 의거와 관련해 일경에 붙잡혀 2년 6개월 간의 옥고를 치른 안창호 선생은 국내 민족운동을 말살하기 위해 일제가 조작한 ‘동우회 사건’으로 1937년 다시 수감됐다. [사진=독립기념관]
1936년 동우회 사건으로 피체되기 전의 안창호. 1932년 윤봉길 의거와 관련해 일경에 붙잡혀 2년 6개월 간의 옥고를 치른 안창호 선생은 국내 민족운동을 말살하기 위해 일제가 조작한 ‘동우회 사건’으로 1937년 다시 수감됐다. [사진=독립기념관]

그로인해 선생을 비롯한 180여 명의 동우회 회원이 종로경찰서에서 135일간 집중조사를 받았다. 그해 8월 15일 예심종결을 거쳐 ‘치안유지법 위반’ 판결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선생은 지병이 악화되어 병보석으로 출소되었다. 병마를 이기지 못한 선생은 1938년 3월 10일, 0시 5분에 만 59년 4개월의 일기로 서거하였다.

광복 후 1973년에 정부는 선생 탄신 95주년을 맞이하여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 도산공원을 조성하고 망우리 공동묘지에 묻힌 선생의 유해와 부인 이혜련 여사의 유해를 이장하여 도산공원 묘지에 합장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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