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안스피릿은 올해 삼일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대일항쟁기 독립운동에 헌신한 독립운동가 10명을 선정했다. 이 가운데 4월에는 우당 이회영(1867-1932) 선생을 소개한다.

이회영 선생(1867. 4. 21.~1932. 11. 17.)은 서울 저동(苧洞)에서 태어났다. 한말 이조판서를 지낸 이유승의 4남으로, 일제의 국권침탈에 반대하여 일가가 모두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코리안스피릿 선정 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 선생. [사진=서울역사박물관]
코리안스피릿 선정 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 선생. [사진=서울역사박물관]

선생은 일제에 국권이 침탈당하자 장래가 보장된 명문대가의 자손으로 일신의 안락과 영화를 버리고 구국운동에 몸을 바친 독립운동가이다. 이회영, 이시영, 이건영, 이석영, 이철영, 이호영 6형제는 임진왜란 당시의 명재상인 백사 이항복의 10대손으로 명례방 저동(현 명동성당 앞 YWCA 자리)에 살며, 이상설, 여준 등과 함께 남산 쌍회정 등지에서 신구학문을 연구하였다. 을사늑약 체결 이후 신민회를 조직하는 데 참여하고, 헤이그특사 파견과 애국계몽운동에 앞장선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함으로써 명실상부한 한국독립운동의 명가(名家)이다.

이회영 선생은 1909년 봄 서울의 양기탁(梁起鐸) 집에서는 신민회(新民會) 간부인 그와 안태국(安泰國)·이승훈(李昇薰)·김 구(金九)·이동녕(李東寧)·김기홍(金基弘)·조성환(曺成煥) 등이 함께 모여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한 방책을 논의하였다. 그리하여 같은 해 여름 그와 이동녕·주진수(朱鎭洙) 등이 독립기지 건설의 적지를 찾기 위하여 만주에 파견되었으며, 유하현 삼원보 추가가(柳河縣三源堡鄒家街)지방을 선정하여 개척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이회영 선생은 이석영(李石榮)·이시영(李始榮) 등 6형제 50여명의 가족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1910년 중국 만주로 망명하여 일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6형제의 둘째 이석영은 당시 재상이자 부호였던 이유승에게 양자로 들어가 재산을 물려받았다. 이석영과 다른 형제들은 강제병합 후 집안의 재산을 처분하여 당시 40만 원(현재 약 600억 원) 상당의 자금을 마련하여 서간도로 떠났다.

망명 후 서간도 유하현 삼원보 추가장(柳河縣 三源堡 鄒家莊)에 정착한 선생은 1912년에 이주 동포들을 위한 자치기구인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고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 신흥무관학교의 전신)를 설립하여 독립군 양성에 이바지하였다. 신흥강습소는 이후 신흥무관학교가 되었으며 1911년부터 1920년까지 약 3,500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이들은 봉오동‧청산리전투 등에서 활약하였고, 1940년대 초 광복군의 중추도 이 학교 출신이었다.

그러나 1913년 동지들의 암살을 목적으로 일경이 파견되었다는 정보에 접하고, 다시 국내로 들어와 독립군 기지 건설을 위한 군자금을 모집하는 한편, 광무황제를 해외로 망명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은 광무황제가 붕어함으로써 실패하고 말았다.

1919년 3·1운동 직전 중국 북경으로 다시 망명길에 올라 상해에서 동지들과 임시정부 수립 문제를 논의하였다. 이후 북경으로 돌아와 1924년 4월 류자명, 이을규, 백정기 등과 함께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조직하고 ‘정의공보’를 간행하였다. 이에 그는 1919년 2월 북경(北京)으로 망명하였으며 이때부터 민족주의로부터 점차 무정부주의로 선회하기 시작했다.

남편 이회영 선생과 함께 독립운동을 함께한 부인 이은숙 여사. [사진=우당기념사업회]
남편 이회영 선생과 함께 독립운동을 함께한 부인 이은숙 여사. [사진=우당기념사업회]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상해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였으며, 임시의정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1924년 4월에는 유자명(柳子明)·이을규(李乙奎)·이정규(李丁奎)·정현섭(鄭賢燮)·백정기(白貞基) 등과 함께 재중국무정부주의자연맹을 조직하고 정의공보를 간행하였다.

1928년 7월에 남경(南京)에서 한·중·일·필리핀·대만·안남(安南) 등 각국 아나키스트들이 모여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하자 그는 이 대회에 ‘한국의 독립운동과 무정부주의운동’이라는 메시지를 보내, 한국 무정부주의운동은 약소민족의 진정한 해방운동이요, 한국민족의 진정한 해방운동은 곧 무정부주의운동인 까닭으로 각국 동지들은 한국 독립운동을 적극 지원해 줄 것을 호소하였다.

1930년 4월 국내에서 신현상(申鉉商)·최석영(崔錫榮)·차고동(車鼓東) 등이 수만원의 운동자금을 마련해 오자, 그는 이 돈을 자금으로 하여 만주에 총력을 집중하고, 상해(上海)·복건(福建)·북경(北京)에 연락부를 둘 것을 제안했다.

1931년에는 정해리(鄭海理)·김광주(金光州)·원심창(元心昌)·박기성(朴基成)·이용준(李容俊)·유산방(劉山芳) 등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과 관련을 맺고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해 9월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중국에 흩어져 있던 동지들이 상해에 모였으며 그를 의장에 추대하여 의열투쟁을 계속하기로 결의하였다.

1932년 중국의 동지들과 만주에서 한중 연합의 항일투쟁을 계획하였으며, 주만일군사령관 처단 등을 목적으로 11월 초 대련(大連)행 기선을 타고 상해 황포강을 출발하여 만주로 가던 중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다가 11월 17일, 66세를 일기로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이회영 선생의 부인 이은숙 여사도 독립의 가시밭길을 마다하지 않았다. 이은숙 여사는 1889년 충남 공주 출신으로 1908년 10월 20일 서울 상동예배당에서 우당 이회영(李會榮)과 혼례를 올렸다. 그 후 1910년 남편 일가족과 함께 중국 길림성 유하현 삼원보로 이주하여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 설립 등 독립운동기지 개척사업을 조력하였다. 이후 1919년 남편과 함께 다시 중국 북경으로 거처를 옮겨 현지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을 후원하고 1925년에 귀국하여 비밀리에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했다. 남편 이회영이 1932년 독립운동 거사를 위해 대련행 기선을 타고 만주로 가던 중 일경에 체포되어 옥중 순국한 고통이 채 가시기도 전에 아들 이규창(李圭昌)(1965, 독립장)이 1935년 3월 상해에서 친일파 처단에 성공하고 피신 중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된 뒤 이듬해 4월 2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3년을 받고 복역할 때도 자식의 옥바라지를 하며, 조국독립의 대의를 간직한 채 꿋꿋이 가시밭길을 걸었다. 이은숙 여사는 대일항쟁기 등 50여 년 동안 겪은 일을 기억하여 쓴 육필 회고록 ‘서간도 시종기’를 남겼다. 대일항쟁기의 모든 기록은 항일운동 발각의 증거가 될 수 있어서 당시 기록은 남아있는 것이 거의 없다. 따라서 모든 일을 오로지 기억에 의존하여 이를 바탕으로 저술한 독립운동수기의 명저이다.

이회영 선생과 이은숙 여사의 아들 이규창도 독립투쟁에 헌실하였다. 이규창은 부친 이회영(李會榮), 숙부 이시영(李始榮) 등이 만주로 망명한 후 통화현(通化縣)에서 출생하였다. 그 후 가족을 따라 북경(北京)으로 이주하여 살다가, 1929년에 부친 이회영(李會榮)을 따라 상해로 갔다. 이규창 선생은 상해에서 화랑청년단(花郞靑年團)과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에 가입하여 백정기(白貞基) 정화암(鄭華岩) 오면직(吳冕稙) 엄순봉(嚴舜奉) 원심창(元心昌) 이강훈(李康勳) 등과 같이 활약하였다. 1933년 3월에는 남화한인연맹의 행동단체인 흑색공포단(黑色恐怖團)을 조직하고 상해의 63정에서 당시 주중공사 유길명(駐中公使 有吉明)을 폭살하려던 계획에 관련되었으며, 군자금 모집 활동에도 앞장섰다. 1935년 3월에는 정화암(鄭華岩)과 협의하여 엄형순(嚴亨淳)과 함께 상해 조선인거류민회(居留民會) 부회장과 고문을 역임한 바 있는 친일파 이용로(李容魯)를 사살하는 데 성공하고 도피하다가 체포되었다. 본국으로 압송된 뒤 1936년 4월 2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엄순봉은 사형선고를 받았으며, 이규창은 징역 13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39년 8월, 그는 마포감옥에서 옥중 투쟁을 하여 다시 징역 10월 23일형을 가형 받아 광주형무소로 이감되어 옥고를 치르고 1945년 8·15광복으로 출옥하였다.

이회영(李會榮, 1962 독립장), 이시영(李始榮, 1949 대한민국장), 이건영(李健榮, 1999 애족장), 이석영(李石榮, 1991 애국장), 이철영(李哲榮, 1991 애국장), 막내 이호영(李頀榮, 2012, 애족장) 선생께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어 선생의 6형제가 모두 독립유공자로 서훈되었다. 서간도로 망명해 독립운동기지 개척을 조력하고 물심양면으로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을 지원한 이은숙(李恩淑) 여사에게 201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아들 이규창에게는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코리안스피릿이 선정한 독립운동가는 석주 이상룡(1858-1932), 홍암 나철(1863-1916), 우당 이회영(1867-1932), 홍범도 장군(1868-1943), 남자현 여사(1872-1933), 주시경(1876-1914), 단재 신채호(1880-1936), 서일(1881-1921), 김좌진 장군(1889-1930), 이봉창 의사(1901-1932)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