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 봉오동·청산리 대첩의 영웅
1920년 봉오동·청산리 대첩의 영웅
  • 정유철 기자
  • npns@naver.com
  • 승인 2019.05.03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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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안스피릿 선정]독립운동가 홍범도

코리안스피릿은 올해 삼일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대일항쟁기 독립운동에 헌신한 독립운동가 10명을 선정했다. 코리안스피릿이 선정한 독립운동가는 석주 이상룡(1858-1932), 홍암 나철(1863-1916), 우당 이회영(1867-1932), 홍범도 장군(1868-1943), 남자현 여사(1872-1933), 주시경(1876-1914), 단재 신채호(1880-1936), 서일(1881-1921), 김좌진 장군(1889-1930), 이봉창 의사(1901-1932)이다.

4월에 소개한 우당 이회영 선생에 이어 홍범도(洪範圖, 1868~1943) 장군을 소개한다.

여천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에 따르면 여천 홍범도 장군은 평양에서 출생하였다.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를 잃고 아홉 살 때 아버지마저 별세하여 고아가 되었다. 그 후 15세까지 머슴을 살았으며 1883년 나이 두 살을 올려 1883년부터 1887년까지 평양 보병 부대에서 나팔수로 복무하였다. 그러나 군교들의 부정부패와 사병들에 대한 학대를 보다 못해 한 사람을 구타하고 탈영하였다.

봉오동전적비.  중국 길림성 왕청현 봉오동에는 1920년 6월 항일무장독립군이 일본군과 싸워 크게 이긴 봉오동전투를 기념하는 봉오동전적비가 있다. [사진=코리안스피릿자료사진]
봉오동전적비. 중국 길림성 왕청현 봉오동에는 1920년 6월 항일무장독립군이 일본군과 싸워 크게 이긴 봉오동전투를 기념하는 봉오동전적비가 있다. [사진=코리안스피릿자료사진]

홍범도장군은 얼마 동안 전전하다 함남 단천으로 가서 금광의 노동자로 2년간 일하고 그곳에서 삼수 출신의 부인과 결혼하여, 이것이 인연이 되어 1893년경에 삼수로 이거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출중한 사격술이 인정되어 산포수대(山砲手隊)에 들어가 직업적인 산포수 생활을 하였고 얼마 뒤 다시 북청으로 이거하였다. 북청의 산포수조직인 안산사포계(安山社砲契)에 가입, 동료들의 인정을 받아 포연대장(捕捐 大將)에 뽑혔다. 이는 관리들과 교섭하여 포획물의 일정량을 세금으로 정하고 이를 납부하는 일을 담당하는 직책이었다.

1895년 일제가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시해하자, 후창(厚昌)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1907년말에는 다시 함경남도 갑산(甲山)등지에서 차도선(車道善)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그 부장(部長)이 되어 갑산(甲山)·산수(山水)·북청(北靑) 등지에서 친일단체인 일진회(一進會)의 회원을 주살하고, 우편물을 탈취하며, 전선을 절단하는 등 활동을 하였으며 여러 차례 일군과 전투를 벌였다.

1908년 5월 차도선이 일군의 포로가 된 뒤에는 5백여 명의 부하를 지휘하여, 귀순을 권유하는 일경 10여 명을 사살하는 등 계속 활동하다가 북청수비대(北靑守備隊)의 병력이 점차 증강됨에 부득이 1910년 노령(露領)으로 망명하였다.

망명후에는 이진룡(李鎭龍)·조맹선(趙孟善)·윤세복(尹世復)을 비롯하여 일군으로부터 탈출해 온 차도선(車道善) 등과 함께 장백(長白)·무송(撫松) 등지에서 포수단(砲手團)을 조직, 일제와의 항쟁을 계속하였으며, 1911년 3월에는 부장 박영신(朴永信)을 국내에 진입시켜 함경북도 경원(慶源)의 일본 수비대를 공격하게 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1919년 3·1독립운동 후에는 북간도에서 의병(義兵)출신과 간도 및 노령의 동포들을 중심으로 한 대한독립군을 창설하였다. 그해 8월에는 압록강을 건너 함경남도 혜산진(惠山鎭)에 진공하여 일본군수비대를 습격하였으며, 이어 9월에는 이범윤(李範允)과 함께 1,200여명의 독립군을 안도현 이도구(安圖縣二道溝) 방면에 집결시켰다가, 다시 10월에 국내로 진공하여 평북 강계(江界)와 만포진(滿浦鎭)을 습격 점령하였다. 이어서 자성군(慈城郡)으로 진출하여 일군 70여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리고 무사히 본부로 귀환하였다. 이 소식을 접한 임시정부는 당시 평북의 강변8군교통사무국의 참사(參事) 오동진(吳東振)과 김응식(金應植)에게 출장을 명하여 사실을 조사하게 하였으며, 일군은 국경지방의 병력을 더욱 증강하여 삼엄한 경계를 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대한독립군의 총사령이 되어 약 400명의 독립군으로 1개 부대를 편성, 국내에 잠입하여 감산, 혜산, 자성 등의 일본군을 급습하여 전과를 거두었다. 특히 압록강 건너 강계(江界) 만포진(滿浦鎭) 전투에서 70여 명을 사살하였다.

1920년 6월 7일 반격에 나선 일본군이 제19사단의 병력과 남양(南陽) 수비대로 부대를 편성하여 독립군 본거지인 길림성 왕청현 봉오동(鳳梧洞)을 공격해오자, 700여 명의 독립군을 지휘하여 3일 간의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일본군 157명을 사살하였다.

봉오동 전투는 그때까지 독립군이 올린 전과 중 최대의 승전이다. 홍범도 장군이 이끈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 안무(安武, 1883~1924)가 이끈 국민회군(國民會軍), 최진동(崔振東, ?~1945)이 이끈 군무도독부(軍務都督府)가 연합하여 결성된 대한북로독군부(大韓北路督軍府)와 한경세(韓景世)가 이끈 대한신민단(大韓新民團)의 독립군 연합 부대가 야스카와 지로(安川二郞) 소좌가 이끈 일본군 제19사단의 월강추격대대(越江追擊大隊)를 쳐부수고 큰 승리를 거두었다. 1919년 3.1운동 이후 만주 지역에서 독립군의 무장 항쟁이 활발해지자 일본은 1920년 5월부터 독자적인 독립군 토벌 작전을 추진하였다. 1919년 8월 이후 활발히 국내 진공 작전을 펼치던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은 북간도(北間島) 지역 독립군의 통일과 연합에 나서 1920년 5월 28일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안무의 국민회군, 최진동의 군무도독부가 연합하여 대한북로독군부를 결성하였다. 그리고 봉오동에 집결하여 좀더 강력한 국내 진공 작전을 준비하였다. 1920년 6월 4일 대한신민단의 독립군 부대가 함경북도 종성군(鐘城郡) 강양동(江陽洞)에 진입해 일본군 순찰소대를 습격해 타격을 입혔다. 다음날 일본군 1개 소대 병력이 두만강을 건너 독립군을 추격해오자, 대한북로독군부의 독립군은 삼둔자(三屯子)에서 일본군 추격대를 공격해 큰 피해를 입혔다. 일본군은 이를 핑계로 함경북도 나남(羅南)에 주둔하던 제19사단에 월강추격대대(越江追擊大隊)를 편성하여 중국 영토를 침입하여 직접 독립군의 근거지인 봉오동 공격에 나섰다.

홍범도가 이끈 독립군 연합 부대는 봉오동의 산지에 매복하였다가 야스카와 지로 소좌가 이끈 일본군 추격대대를 삼면에서 포위하여 궤멸시켰다. 일본군은 수많은 병력이 사상을 당하는 피해를 입고 퇴각하였다. 봉오동 전투는 중국 영토인 만주지역에서 한국 독립군과 일본군 사이에 본격적으로 벌어진 최초의 대규모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승리하여 독립군의 사기가 크게 높아졌으며, 이는 1920년대에 독립전쟁이 더욱 활발히 전개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같은 해 국민회가 독립군 부대들을 재연합하여 동도독군부(東道督軍府)를 창설하였을 때에는 그 사령관에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그해 10월에는 청산리(靑山里)독립전쟁에 제1연대장으로 참가하여 제2연대장 김좌진(金佐鎭), 제3연대장 최진동(崔振東)과 함께 일본군을 크게 격파하는데 일익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청산리독립전쟁에서 패배한 일본군은 소위 '독립군 대토벌계획'을 세우고 계속적인 추격을 해옴에 따라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을 조직하게 되었으며, 그는 김좌진·조성환(曺成煥) 등과 함께 부총재에 선임되어 총재인 서 일(徐一)을 보필하였다.

1921년 러시아령(領) 자유시(自由市, 스보보드니)로 이동하여 수랍스카 부근에 주둔하여 레닌 정부의 협조로 고려혁명군관학교를 설립하는 등 독립군의 실력 양성에 힘썼다. 그러나 1921년 6월 소련 공산당의 배반으로 독립군은 무장이 해제되고 포로가 되는 등 소위 '자유시참변'을 겪고 이르쿠츠크로 이동하였다. 1922년 6월 한국혁명군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고려공산당과 한족공산당이 통합하여 브라고에스첸스크에 고려중앙정청(高麗中央政廳)이 조직되자, 홍범도 장군은 최진동·허 근(許根)·안 무(安武) 등과 함께 고등군인징모위원에 임명되어 활약하였다.

이후 연해주에서 콜호스(집단농장)를 차려 농사를 지으며 한인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켰으나, 1937년 스탈린의 한인 강제이주 정책에 의하여 카자흐스탄의 크즐 오르다로 강제 이주되어 극장 야간수위, 정미소 노동자로 일하다가 1943년 76세로 사망하여 그곳의 공동묘지에 묻혔다.

정부는 장군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국내에서는 여천홍범도기념사업회(이사장 이종찬)가 장군의 애국애족 정신을 기리고 있다. 2013년 홍범도 장군 서거 70주년 추모식이 카자흐스탄 현지에서 관민합동으로 개최되었다. 대한민국 해군에서는 2016년 최신예 잠수함 ‘홍범도함’을 진수하고, 육군사관학교에서는 2018년 독립전쟁의 영웅으로 홍범도 장군 흉상을 제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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