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대일항쟁의 역사
끝나지 않은 대일항쟁의 역사
  • 민성욱 박사
  • k-spirit@naver.com
  • 승인 2019.01.24 23:06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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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민성욱 박사

2019년은 ‘황금 돼지해’ 라고 한다. 그래서 “부자 되세요.”라는 새해 덕담을 주고받기도 한다. 한 때는 연하장에 덕담을 써서 새해 인사를 주고받았던 시기가 있었다. 지금은 과거가 되어 버렸고 추억이 되고 있다. 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 감성이 그리워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세월이 주는 무게감 속에서 인간다움을 찾고자 함은 아닐까.

올해는 삼일항쟁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대한민국 정부 등 사회 각계각층에서는 삼일항쟁의 정신과 뜻을 기념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많이 있다. 지난해 8.15 광복 73주년 경축사에서 대통령은 “그동안 발굴하지 못하고 찾아내지 못한 독립운동의 역사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묻혀진 독립운동사와 독립운동가의 완전한 발굴이야말로 또 하나의 광복의 완성이라고 믿는다.”고 강조하였다.

민성욱 박사
민성욱 박사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 선생의 집안인 고성이씨의 고택, 안동에 있는 ‘임청각’은 배산임수의 전형적인 한국가옥이다. 그런 가옥도 대일항쟁으로 인해 희생이 되었다. 일본은 대일항쟁의 상징과 같은 그곳의 앞마당을 가로지르는 철로를 부설하여 그 민족정기를 말살하려 하였다. 안동과 가까운 봉화에 있는 닭실마을(유곡리)은, 풍수지리상 닭이 알을 품고 있다는 금계포란형의 지세를 갖추고 있다고 붙여진 마을 이름이다. 봉화지역에는 금강송이라고도 불리는 춘향목이라는 우리나라 소나무 군락지가 있다. 일제는 군수물자로 약탈하기 위하여 철로를 부설하기로 했는데 원래 계획과 다르게 닭실마을을 가로 지르게 하였다. 그 이유는 닭과 지네는 천적이다. 지네를 연상케 하는 철로를 부설하여 그 마을의 정기를 말살하려는 의도였다.

고성이씨의 고택 ‘임청각’은 석주 이상룡 선생 이후로 많은 독립유공자를 배출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독립유공 서훈을 받은 사람만 해도 10명이다. 그 중에서 가장 최근에 서훈을 받은 사람은 3대 종부인 허은 지사이다. 서훈을 받은 10명 중 유일하게 여성이다. 이것은 독립유공에 대한 새로운 관점이 필요하다는 문제인식이 가능하게 한다. 2018년 8월 기준으로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은 1만5,052명 중 여성은 전체의 2.1%인 325명으로 독립운동 역사 속 여성들은 거의 조명을 받지 못한 채 현재에 이르고 있다.

백범 김구 선생도 “우리가 독립운동을 할 수 있도록 뒷받침해 주는 것도 독립운동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대일항쟁의 역사인식에도 차별이 없어야 된다. 왜냐하면 나라 잃은 설움은 누구나 겪을 수밖에 없었고 그것을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도 같을 것이기 때문이다.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이 사랑했던 여성 의병장 고애신, 비록 극중 인물이긴 하지만 인식의 차이가 느껴지는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가 기억하는 여성 독립운동가는 누구인가. 유관순 열사나 여자 안중근으로 알려진 영화 ‘암살’의 실제 주인공, 남자현 지사 정도가 아닐까.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여성 독립운동가처럼 아직도 발굴되지 못하고 찾아내지 못한 대일항쟁의 역사는 존재한다.

100년은 결코 짧은 기간은 아니다. 삼일항쟁을 기억하는 세대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제 그 뒤를 잇는 지금의 한국인들이 그 기억을 이어갈 때이다. 신채호 선생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기억하지 않으면 잊게 되고 잊게 되면 역사는 다시 반복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억하는 행위 자체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기억의 내용이다. 즉 우리가 무엇을 기억해야만 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된다.

그런데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우리 곁에는 친일의 잔재가 많이 남아 있다. 평소 사용하는 언어 습관뿐만 아니라 생활 속에서 이것도 친일의 잔재인가 할 정도로 많다. 곧 있으면 설날인데, 아이들은 세뱃돈을 받을 생각에 벌써부터 가슴이 부풀어 있을 것이다. 그렇게 아이들에게 주어지는 세뱃돈 중 만원권 지폐를 보자. 우리나라 지폐에는 위인들의 표준 영정이 그려져 있다. 만원권 지폐에는 잘 알다시피 단군이래로 성군으로 알려져 있는 세종대왕의 영정이 있다. 문제는 세종대왕의 표준영정을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친일화가 운보 김기창이 그렸다는 것이다. 김기창의 친일 행적은 뚜렷하다. 국방부 청사 현관에 걸려 있다가 2018년 3월에 떼어낸 그의 작품 ‘적영(敵影)’, 그림자와 같이 눈에 보이지 않는 적을 향해 돌진하는 베트남에 파병된 맹호부대 장병들의 용맹스러움을 표현한 그림이다. 한 때는 국군의 용맹스러움을 상징하는 그림이었다. 그런데 이 그림은 김기창이 1944년 남양군도에서 적진을 향해 돌진하는 일본군을 묘사하면서 일제 군국주의를 찬양했던 작품인 ‘적진육박’과 거의 유사하다. 즉 일본군 대신에 국군으로 바꾼 것과 말고는 다르지 않다. 그 외에도 김기창이 그린 표준영정은 무열왕, 문무왕, 을지문덕, 조헌, 대동여지도의 김정호 등이 있다.

또 한 명의 친일화가 월전 장우성, 그가 그린 표준영정은 더 뼈아프다. 대한민국 위인 중 표준영정 제1호인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영정이기 때문이다. 아산 현충사에 있는 이순신 장군의 영정이 그것인데, 임진왜란 때 왜군을 무찔러 나라를 위기로부터 구한 불세출의 성웅 이순신 장군의 영정이 친일화가의 손에 그려졌다고 한다면 그리고 일본인들이 찾아와서 이순신 장군의 영정을 보면서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면 우리는 뭐라고 할 수 있을까. 친일화가들은 광복이 된 이후에 오히려 그 행적이 더 화려해진다. 그들은 공통적으로 3.1. 문화상을 수상하거나 심사위원이 되었다. 이것은 친일화가들의 역사의식의 부재에서 비롯된 것이고 자기반성이 없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뜻있는 시민들은 친일화가가 그린 이순신 장군의 표준영정을 교체촉구를 위한 대국민 서명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하지만 관계부처인 문화체육관광부는 작가의 친일 논란을 사유로 표준영정 지정해제를 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백범 김구 동상 또한 친일 조각가 김경승이 제작하였다. 백범 김구 선생이 환생이라도 하신다면 얼마나 치욕스럽게 느끼실지 가히 짐작이 된다. 도산 안창호와 안중근 장군의 동상도 그의 손에 의해 제작되었다. 삼일항쟁이 끝난 지 100년이 지난 시점에도 우리는 여전히 친일 화가가 그린 지폐를 사용하고, 친일 조각가가 만든 위인들의 동상 앞에서 위인들을 추모하고 있다.

“♬ 배를 저어가자 험한 바다물결 건너 저편 언덕에 산천 경개 좋고 바람 시원한 곳, 희망의 나라로~”

“♬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 한 줄기 해란강~” 은 천년을 두고 흐른다. 지난 날 강가에서 말 달리던 선구자~”

우리 민족의 역사적인 경험과 전승돼 오는 공통 감정을 노랫말로 지어 오랫동안 동질감의 소재로 불러 왔던 가곡으로 한국인들의 애창곡이기도하다. 문제는 이 가곡들은 친일 음악인들의 작품이라는 것이다. ‘희망의 나라로’는 서울대학교 초대 음악대학 학장을 역임한 친일 음악인 현제명의 작품이고, ‘선구자’는 친일 문학인 윤해영이 쓴 ‘용정의 노래’ 라는 시에 친일 음악인 조두남이 살짝 가사를 바꾸어서 만든 작품이다. ‘용정의 노래’는 용정의 한 여인이 말을 탄 일본군 장교를 짝사랑한다는 내용이다. 조두남은 말 달리던 일본군 장교 대신에 말 달리던 선구자로 가사를 바꾸었던 것이다. 이렇게 보면 희망의 나라는 대한민국이 아니라 일본이 대륙침략의 거점으로 삼기 위해 세운 괴뢰국인 만주국을 의미하고, 선구자는 용정에서 말을 타고 있는 일본군 장교를 의미하는 것이다. 원래 가곡 ‘선구자’에 나오는 ‘일송정’은 정자와 같다고 하여 이름 붙여진 소나무였고, 당시 독립군들의 상징과도 같았다. 선구자의 모델은 독립군 및 광복군을 조직하여 대일항쟁을 주도하였던 백포 서일 총재를 비롯한 김좌진, 이범석, 홍범도 등 만주에서 대일항쟁을 주도하였던 인물들이었다. 현제명에게는 두 가지 이름이 있다. 대구에서 출생한 음악 천재로서 대한민국 음악계의 거장인 현제명과 사상 전향 이후 친일 음악인의 삶을 살았던 구로야마가 그것이다. 진정한 그의 이름은 무엇인가? 현제명도 구로야마도 그가 선택한 삶이었다. 음악적으로 기여한 바도 컸지만 분명 민족과 나라를 배신한 친일 음악인이라는 점도 부정할 수 없다. 당시 예술계에서는 일본이 망하지 않고 영원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거의 막판에 사상 전향을 통해 친일로 돌아선 인물들이 많았다. 그 중 한명이 ‘봉선화’, ‘고향의 봄’ 등 십 여곡의 가곡과 ‘개구리’, ‘나뭇잎’ 등 111개의 동요를 작곡하면서 천재 작곡가로 불렸던 홍난파 이다.

“♬ 울 밑에 선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

“♬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홍난파가 만든 음악에는 가곡 ‘봉선화’ 와 동요 ‘고향의 봄’ 등 우리 민족의 애환과 정서가 담긴 음악들이 유달리 많았다. 모진 고문과 건강 악화로 사상 전향을 하고, 친일 음악인이 되었던 홍난파였기에 가슴 아프다. 예술혼과 민족혼 중 우리는 무엇을 선택해야 될까. 시대의 아픔이 결국 한 예술가를 예술가로서만 살 수 있도록 그냥 놔두지 않았다. 민족을 선택하면 예술을 못하고, 예술을 선택하면 민족의 반역자가 되는 시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신의 안위는 물론 가족들의 생계까지 포기한 채 대일항쟁의 사지에 뛰어 들어 순국하신 분들의 삶과는 비교할 수 없다. 잘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사는 것이 고귀한 것이 아니고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하여 자기 삶을 포기한 것이 진정으로 고귀하고 위대한 것이다.

또 한 명을 이야기 안 할 수 없다.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 그도 분명 음악적 재능이 뛰어났던 음악가이다. 그 어려운 시기에 일본, 독일, 유럽 등지에서 유학을 하였고, 음악가로서 승승장구하였다. 역설적으로 그가 친일하지 않았다면 음악가로서의 그의 삶은 평탄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안익태는 다른 친일 음악인들과는 다르게 거의 자발적으로 친일을 하였다. 안익태의 일본 이름, 애키타이 안은 만주국 건국 10주년에 일왕에게 바치는 ‘만주환상곡’을 작곡하기도 하였고, 광복 이후에 살짝 바꿔 ‘한국환상곡’으로 발표하였으며, ‘한국환상곡’ 중 일부가 현재 애국가가 되었다. ‘한국환상곡’은 불가리아 민요를 표절했다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타국에서 애국가의 한 소절만 들어도 눈시울이 붉어지는 그 애국가가 만주국을 발판으로 일본의 세계침략을 찬양하는 음악에서 비롯되었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될까?

1942년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은 조선인들을 전쟁의 도구로 사용하기 위하여 온갖 수단을 동원하였다. 징병, 징용 등을 선동하기 위하여 군국가요들을 만들어 부르게 했는데, 조명암, 박시춘, 남인수 3인방이 대표적이다. 조명암이 선동하는 가사를 쓰면 거기에 박시춘이 곡을 붙이고 남인수가 노래를 불렀다. ‘황성옛터’를 애잔하게 불렀던 남인수, 하지만 이처럼 대중가요의 친일도 예외가 없었다는 것이다.

역사의식이 부재된 예술, 그 예술은 나름의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어도 존귀한 삶으로서는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없고 그러한 삶의 가치가 작품에 투영되기 때문에 그 작품 또한 가치가 퇴색될 수밖에 없다.

교육계에도 여전히 친일 인물은 존재한다. 민족대학으로 알려진 고려대학교를 설립한 인촌 김성수, 이화여자대학교 초대 총장 김활란, 서울예술대학교를 설립한 동량 유치진, 특히 유치진은 대일항쟁기에는 친일로, 광복이후에는 반공으로 갈아타면서 연극계 대부로서 교육 권력자로 부와 명예를 쌓아 올렸다. 휘문고등학교를 설립한 민영휘 등 근대화 교육이라는 미명하에 광복이후에도 친일 교육자들이 교육계를 주도하였다.

대일항쟁기 일본은 조선인들에게 ‘황국신민서사’를 강제로 외우게 하면서 황국신민화 교육을 실시하였다. 내선일체, 일선동조론 등을 내세우면서 조선인들의 뿌리가 일본이라고 강조하였다. 도리야마 기이치, 이마니시 류 등이 주도한 ‘조선사편수회’는 우리 역사를 왜곡하기 위하여 ‘조선사’를 편찬하였다. 압록강은 고대 기록에 실사(糸)변의 압록강(鴨綠江)과 삼수(氵)변의 압록강(鴨淥江)이 분명 존재한다. 실사변의 압록강은 지금의 압록강이고, 삼수변의 압록강은 지금의 요하이다. 그런데 ‘조선사편수회’에서는 의도적으로 실사변의 압록강만을 기록하여 반도 안에 갇히도록 했다. ‘조선사편수회’가 정한 고려의 국경과 지금 역사교과서의 고려 국경은 똑같다. 우리 역사교과서는 ‘조선사편수회’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조선사편수회’ 일원이었던 친일 사학자 이병도, 신석호가 광복이후 역사교육을 책임졌기 때문이다.

분명 공도 있지만 과도 있었기에 공과 과를 모두 기록해야 한다. 그리고 기록이 되어야 집단의 기억이 형성될 수 있다. 삶의 저울이 있다면 균형을 맞추어야 되고, 영점을 회복하여야 정확하게 목표를 설정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동안 가려져 있거나 알려져 있지 않았던 독립유공 인물들에 대하여 새로운 통찰과 지속적인 관심도 필요하다. 대일항쟁의 역사가 흩어져 있거나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것에 대한 우리의 고민이 그 동안 부족했었고, 잊고 있었다는 인식조차 없었다. 여성독립운동가들은 누군가의 어머니이었고 할머니임에 틀림이 없다. 건국훈장 1등급 대한민국장 30명 중 여성은 단 1명, 그것도 외국인이다. 대만 총통 장제스의 부인, 쑹 메이링 여사이다. 2등급은 남자현 지사, 3등급은 유관순 열사 외 10명, 나머지는 4~5등급이거나 기타 표창을 받은 정도이다. 가부장제적 사회에서 빚어진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 대일항쟁에는 가정형편도, 성별도, 학력도, 지역도 장애가 되지 않았다. 그러기에 독립유공자들에 대한 대우에도 어떠한 장애도 없어야 될 것이다.

1909년 10월 26일 만주 하얼빈역에서 안중근 장군이 쏘아 올린 대일항쟁의 신호탄을 시작으로 10년간의 준비기간을 거쳐 1919년 삼일항쟁으로 본격화 되었다. 삼일항쟁으로부터 100년이 지난 현재에도 식민의 잔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상황에서 친일 청산의 지연으로 역사 속에 묻혀버린 삼일항쟁의 정신, 이제 지나간 100년을 뒤 돌아보고 앞으로의 100년은 동일한 역사적 과오를 반복해서 범하지 말아야 한다. 100년을 이어왔고, 또 다른 100년을 이어갈 삼일항쟁의 정신과 대일항쟁의 역사를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 본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관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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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블티 2019-02-19 14:00:12
영화 '암살'에서 이정재가 말했죠.
해방될 줄 몰랐다고.
심정적으로는 얼마나 막막했을지 가늠이 되지만
용서 받을 수는 없었어요.
허구라도 속이 다 시원했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