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안스피릿은 올해 삼일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대일항쟁기 독립운동에 헌신한 독립운동가 10명을 선정했다. 코리안스피릿이 선정한 독립운동가는 석주 이상룡(1858-1932), 홍암 나철(1863-1916), 우당 이회영(1867-1932), 홍범도 장군(1868-1943), 남자현 여사(1872-1933), 주시경(1876-1914), 단재 신채호(1880-1936), 서일(1881-1921), 김좌진 장군(1889-1930), 이봉창 의사(1901-1932)이다.

8월에 소개한 신채호 선생에 이어 서일 선생을 국가보훈처의 공훈록 등 자료를 기초로 소개한다.

서일(徐一, 1881. 2. 26 ~ 1921. 8. 27(음), 9. 28(양)) 선생은 1881년(고종 18년) 2월 26일 함경북도 경원군 안농면 금희동 농가에서 태어났다. 호는 백포(白圃)이며, 처음 이름은 기학(蘷學)이라 하였고, 나중에 일(一)로 바꿨다.

향리의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다가 신학문에 뜻을 두고 경성에 있는 성일(成一)사범학교를 졸업했다.

서일총재항일투쟁유적지. 재중동포 3명의 헌금으로 2015년 중국 밀산시정부가 비를 세웠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
서일총재항일투쟁유적지. 재중동포 3명의 헌금으로 2015년 중국 밀산시정부가 비를 세웠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

 

이로부터 후학을 기르는데 전념한 것으로 보이나 자세한 기록이 발견되지 않고 있다.

일제가 국권을 침탈하자 서른한 살 때인 1911년 선생은 동만(東滿) 왕청현(汪淸縣)에 망명하여, 청일학교(靑一學校)·명동중학교(明東中學校)를 설립하는 등 청소년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고자 육영사업에 전념하였다.

1912년 10월 선생은 대종교에 귀의하였다. 홍익인간의 이념을 추구·실행하는 대종교 정신은 벌판을 누비던 독립군들에게 막강한 정신력을 주게 된다. 선생이 단순한 무장 독립운동가가 아닌 교육자·종교인·언론인으로도 평가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또한 일제와 무력항쟁을 하다가 두만강을 넘어오는 의병들을 규합하여 중광단(重光團)을 조직하고 청년동지들에게 정신교육을 통하여 자주독립의식을 심어주었다. 단장에 취임한 그는 무력항쟁의 기틀을 잡기 위한 체제구축에 심혈을 기울이는 한편 대종교의 이념계승에도 몰두했다.

선생은 대종교 입교 후 포교에 나서 3년 동안 동만주 북만주 연해주 함경도 일대에서 10여 만 명의 교우(敎友)를 얻어 도력(道力)이 큰 도사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서일 선생은 교우들 중 젊은 청년들은 독립군으로 편입하고 일반 교우들에게는 군량조달 등 다른 직무를 부여했다. 독립군에 편성된 청년들의 강고한 정신무장을 위해 그는 한배검에 귀의하게 했다. 한배검은 대종교에서 단군을 높여 부르는 말이다. 후일 선생이 총재로 지휘한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의 장병은 거의가 대종교인이었다. 선생은 또 ‘오대종지강연(五大宗旨講演)’ ‘신화강의(神話講義)’ ‘진리도설(眞理圖說)’ ‘삼문일답(三問一答)’ ‘회삼경(會三經)’ 등 경전도 저술했다.

또 자유공단(自由公團)이라는 비밀단체를 조직하고 1만 5천여명의 단원을 거느린 단장으로 선출되어 항일의식을 고취하는 데 이바지하였다.

선생은 당시 중광단(重光團) 등을 통해 대일무장투쟁을 추구했으나 재정 문제 등 조직적 체제가 구축되지 않아 실질적 군사투쟁은 전개하지 못했다. 이에 선생은 수많은 독립군 및 운동단체 결집을 위해 1918년 김좌진(金佐鎭), 김동삼(金東三), 신팔균(申八均), 손일민(孫一民), 신채호(申采浩) 등 39인 연서로 ‘무오대한독립선언서(戊午大韓獨立宣言書)’를 발표하면서 독립운동에 활기를 불어 넣었다. 여 준(呂準)·정 신(鄭信)·김좌진(金佐鎭)·김동삼(金東三)·손일민(孫一民)·서상용(徐相庸) 등 38인과 함께 기미독립선언에 앞선 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하여 3·1독립운동에 앞선 조국의 독립선언이 되었다.

삼종사 묘. 중국 화룡시에 있는 대종교 나철, 서일, 김교헌 삼종사 묘. [사진=코리안스피릿 자료사진]
삼종사 묘. 중국 화룡시에 있는 대종교 나철, 서일, 김교헌 삼종사 묘. [사진=코리안스피릿 자료사진]

1919년 국내에 3·1운동이 일어나자 계 화(桂和) 등과 함께 중광단(重光團)을 토대로 군사행동을 적극적으로 취하기 위하여 동북만에 산재한 대종교도(大倧敎徒)를 중심으로 정의단(正義團)을 조직하여 단원을 모집하고 신문을 간행하여 독립사상을 격려하는 등 독립운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강도 높은 전투훈련을 실시하고 ≪일민보(一民報)≫ ≪신국보(新國報)≫ 등 신문을 발간, “일제와의 항쟁은 혈전을 벌이는 피의 전투밖에 없다”는 논조를 내세웠다.

1920년에는 임시정부 직할의 간북북부총판부(墾北北部總辦部) 총판으로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1919년 7월부터 청산리전투가 전개된 1920년 10월까지 선생은 중광단을 확대, 개편한 대한정의단(大韓正義團)→대한군정부(大韓軍政府)→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등 독립군단을 이끌었다.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는 본영을 왕청현(汪淸縣) 서대파구(西大坡溝)에 두었다. 선생은 군정서의 총재로서 김좌진을 총사령겸 사관연성소 소장으로 임명하여 십리평(十里坪) 산림속에서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정규병력 1500명을 청산리전투 주역인 사관(士官)으로 양성하고 러시아·체코군으로부터 3만여 정의 무기도 확보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일원으로 참전했던 체코군은 체코가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식민지이기때문에 한국 독립군에게 동정적이었다. 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해상편으로 귀국하기로 결정되어 팔게 된 무기를 북로군정서가 구입한 것이다. 1920년 8월 북로군정서의 병력과 무장은 대원 약 1,200명, 소총 1,200정, 탄약 240,000발, 권총 150정, 기관총 7문, 수류탄 780발을 갖고 있었다. 이처럼 군정서가 힘을 갖추기 시작하자 일제는 상당히 겁을 먹고 주목했다.

이 무렵 북간도에서 활동하던 독립군단은 일제의 압력을 받던 중국 관리들의 강요로 본래의 근거지인 북간도를 떠나 허룽현 이도구 삼도구 등지의 삼림 지대로 근거지를 옮겼다. 일제는 이 같은 이동 정보를 파악하고 마침내 1920년 10월 20일 독립군에 대대적인 토벌 작전을 개시했다.

선생이 이끌던 북로군정서군은 김좌진 장군의 지휘 하에, 대한독립군은 홍범도 장군의 지휘 하에 만주 허룽현 청산리 백운평 천수평 등지에서 매복과 기습, 작전상 퇴각과 연합 공격 등 치밀한 작전을 벌이며 10월 26일까지 일본군을 상대로 연전연승을 거뒀다. 청산리대첩으로 일컬어지는 이 전투는 한국 무장독립운동사에 가장 큰 획을 그은 일대의 사건이었다. 청산리독립전쟁은 김좌진의 북로군정서군과 홍범도의 연합부대가 1920년 10월 21일부터 6일간 청산리 일대에서 일본 정예군대와 10여 차례 벌인 전투였다. 1,300명의 독립군 연합부대는 연대장 1명, 대대장 2명을 포함한 일본군 1,200여 명을 사살하는 등 대승을 거뒀다.

삼종사 묘 안내문. [사진=코리안스피릿 자료사진]
삼종사 묘 안내문. [사진=코리안스피릿 자료사진]

청산리독립전쟁후 일본군의 추격이 계속되자 북로군정서의 전병력이 북만 밀산(密山)으로 옮겨갔다. 국민회 독립군의 안무군(安武軍)·홍범도군(洪範圖軍)·광복단(光復團)·도독부(都督府)·의군부(義軍府)·혈성단(血誠團)·야단(野團)·대한정의군정사(大韓正義軍政司) 등 모두 3,500명의 병력을 이곳에 집결하여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이란 대군단을 조직하였는데 선생은 총재로 추대되어 전 독립군을 지휘하였다.

그 후 대한독립군단은 노령(露領) 자유시(自由市)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소련영토 안에서 일본에 대적하는 독립군을 육성하면 양국간 우호관계에 큰 지장을 초래할 것이라는 일(日)공사 요시자와의 위협에 소련이 독립군의 무장해제를 강요하는 소위 ‘흑하사변(黑河事變, 자유시사변)’이라는 참변이 발발해 독립군은 힘을 잃었다. 선생은 밀산현 당벽진(當壁鎭)으로 옮겨가서 다시 기회를 기다리며 근무의 여가를 타서 교서(敎書)의 저술에 전념하던 중 1921년 8월 26일 토비들의 불의의 습격을 받아 청년동지들이 다수 희생되었다. 비분강개한 선생은 1921년 음력 8월 27일(양력 9월 28일) 마을 뒷산 산림 속에서 자진(自盡), 순국했다. 향년 41세.

“조국광복을 위해 생사를 함께 하기로 맹세한 동지들을 모두 잃었으니 무슨 면목으로 살아서 조국과 동포를 대하리오. 차라리 이 목숨을 버려 사죄하는 것이 마땅하리라.”

당시 신한민보는 1922년 1월 29일자 신문에서 ‘독립군 총재 서일 씨의 자결’이라는 제목으로 보도했다. 기사는 독립군 총재 서일씨는 홍개호 부근에서 군무를 정리하다가 9월 28일 홍의적에게 습격당하여 부하 42인명과 한인동포가 학살당하자 홀로 맨손으로 천지를 부르짖다가 스스로 결단을 하였다는 내용이다.

선생의 묘는 중국 왕청현 화룡시에 나철, 김교헌 선생 묘와 함께 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