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주 이상룡(1858-1932) 선생은 코안스피릿이 올해 삼일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대일항쟁기 독립운동에 헌신한 독립운동가 10명 가운데 한 분이다. 3.1절을 앞두고 이상룡 선생의 일생과 독립투쟁을 소개한다.

석주 이상룡 선생은 1858년 경상북도 안동시 법흥동 임청각에서 이승목(李承穆)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명은 상희(象羲), 호는 석주(石洲)이며, 1911년 중국 망명 이후 상룡(相龍)으로 고쳤다.

이상룡 선생은 어려서 유학을 익혀 개화정책이 추진되자 유교의 예교질서가 무너질까 염려하여, 1890년 자신의 집 임청각에서 향음주례를 하였고, 1898년에는 향약을 시행하였다.

독립운동가 석주 이상룡 선생. [사진=경북도청]
독립운동가 석주 이상룡 선생. [사진=경북도청]

 1894년 동학농민운동과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병학을 연구하여 재래식 무기인 연노(連弩)를 제작하여 실험하기도 했다. 1895년부터 이상룡 선생은 독립운동에 발을 들여 놓았다.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항거하여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나자 부친을 여읜 상황에서 선생은 조부상을 당해 직접 의병에 뛰어들지는 못하고, 안동의병장을 맡은 외숙부 권세연(權世淵)을 도왔다.

1905년에 외교권을 빼앗기자 이상룡 선생은 직접 의병 조직에 나섰다. 선생은 가야산 남쪽 기슭에 의병기지를 건설하고 의병을 길러내는 계획을 세우고, 의병장을 맡은 차성충(車晟忠)에게 거금을 만들어 보내 군사를 모으고 무기를 장만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거병을 앞두고 일본군의 기습을 받는 바람에 의병들이 흩어지고 말았다. 그 뒤로 선생은 신돌석, 김상태 의병진과 협력을 모색했으나 그들마저 무너지자, 그의 의병 거사는 열매를 맺지 못하고 말았다.

이상룡 선생은 의병의 실패를 시국에 어두웠기 때문이라고 보고 동서 열강의 서적을 구해 읽어 세계의 변화를 깨닫고 서양 근대사상을 수용하는 결단을 내렸다. 근대적 민중계몽과 민족교육을 통한 구국운동의 길을 밟아 유인식(柳寅植)·김동삼(金東三) 등과 대한협회(大韓協會) 안동지부를 조직하고 그 회장이 되어 계몽강연, 협동학교(協東學校) 설립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09년 선생은 대한협회 안동지회 취지서와 행동강령을 작성하여, 교육과 실업의 진흥을 통해 자강력을 양성하자고 주장하였다.

선생의 주장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끄는 점은 대한협회 안동지회를 국민이 모인 ‘정당’으로 해석한 점이고, 민이 주인이라는 사실을 천명했다. 향촌을 단위로 삼아 근대 민주주의를 실천하려는 의지를 가진 것으로 풀이된다. 흔히 계몽운동이라면 그 특징을 신교육과 민족자본 육성으로 정리하면서, 의병이 펼치던 무력항쟁과는 반대의 성격으로 규정한다. 하지만 이상룡 선생이 추진했던 대한협회 안동지회라는 계몽운동 조직은 무력항쟁도 포함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만주 망명과 독립운동 기지 건설, 독립군 양성과 무장투쟁이 가능했던 것이다. 대한협회 본부가 일제의 침략 행위에 대해 침묵하거나 일진회와 연합하려는 등의 친일적 성향으로 기울어지자, 이상룡 선생은 이를 격렬하게 비판하면서 대한협회가 국권회복운동의 중심체가 될 것을 요구했다.

1909년 봄에 서울 양기탁(梁起鐸)의 집에서 열린 신민회(新民會) 간부의 비밀회의에 참석하여 국가의 멸망을 결정적 사실로 보고, 이렇게 되면 국내에서 광복운동을 기대할 수 없으므로 한국과 인접한 만주(滿洲)에 독립운동 기지를 확보하여 민주정부와 군관학교를 설치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결정에 따라 양기탁·안태국(安泰國)·김구(金九)·이승훈(李昇薰) 등은 국내에서 자금을 조달하기로 하고 이회영(李會榮)·이동녕(李東寧)·주진수(朱鎭洙)·장유순(張裕淳) 등은 독립운동에 적당한 지점을 매수하기 위하여 만주(滿洲)로 떠났다.

만주로 간 이들은 남만주(南滿洲)의 여러 곳을 물색하다가 요녕성(遼寧省)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 추가가(鄒家街)를 독립운동을 하는데 알맞은 기지로 선정하였다. 이 지방은 인가가 무척 드문 황량한 미개지였으나 땅이 기름지고 장래 발전성이 많겠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이리하여 제1차로 이시영(李始榮)·이철영(李哲榮)·이석영(李石榮)·이동녕(李東寧)·이광(李光)·김형식(金衡植)·황만영(黃萬英)·이명세(李明世) 등이 만주의 개척지로 떠났다. 이상룡 선생은 처남 김대락과 논의한 뒤, 1911년 1월 대가족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서간도로 망명하였다. 그의 나이 55세였다.

이들은 황무지 개척을 위해 자연과 싸우는 한편, 동년 4월에는 자치기관인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고 그 부속기관으로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설치하여 국내에서 모여드는 애국청년들을 훈련하였다. 경학사는 농업, 상업, 공업 등의 실업 활동을 통해 경제력을 향상하고 교육을 통해 인재를 키워 미래 한민족 독립의 기초를 다지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같은 해 신흥강습소를 설치하여 동포 자제들에게 민족 교육과 군사 교육을 하여 독립군을 양성하였으니, 이것이 신흥무관학교로 발전하게 되었다.

망명한 뒤 선생이 풀어야 할 과제는 생각보다 엄청나게 많았다. 만주족의 배타성은 그 가운데 하나였다. 이상룡 선생은 한인 동포의 토지 임차, 중국 국적 취득, 중국인과의 문화 충돌 해소 등의 문제를 앞장서서 해결하고, 한국고대사 연구를 통해 만주가 한민족의 옛 영토임을 고증함으로써 동포들이 자신감을 갖고 뿌리를 내리도록 격려하였다.

1912년이 되자 이상룡 선생은 경학사를 발전시켜 동포의 자치기관으로 부민단(扶民團)을 조직하고 허혁(許赫)에 이어 단장(團長)으로 추대되었다. 이들은 부민단의 기구를 정비 강화하기 위하여 경학사(耕學社)를 해체하고, 소재지를 유하현(柳河縣) 추가가(鄒家街)에서 90여리 떨어진 통화현(通化縣)의 합니하(哈泥河)로 옮기고 신흥강습소도 함께 이전하여 제2의 새 기지를 정하였다.

부민단의 2대 단장에 추대된 이상룡 선생은 자치, 교육 등 사업을 꾸준히 수행하여 나갔다. 그 중에도 부서 조직은 중앙부에 서무·법무·검무(檢務)·학무·재무 등을 두었으며, 단장과 각 부서 주임 관할 하에 지방(地方)·구(區)·패(牌)로 나누어 주민을 관할하였다. 따라서 부민단은 이러한 4단계의 조직을 통하여 통화현(通化縣), 임강현(臨江縣), 유하현(柳河縣), 해룡현(海龍縣), 몽구현(蒙口縣) 등 각 현에 산재해 있는 동포들을 결속하고 계몽하였다. 특히 일본인을 귀자(鬼子)로 호칭하고 이 귀자와 교통 연락하는 자는 엄벌에 처했으며, 모든 민사(民事) 관계의 일도 이를 심리 판결하여 처리하는 등, 이주 동포들의 자치기관의 임무를 수행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1918년 11월에는 길림(吉林)에서 김교헌 등 38인과 함께 대한독립선언서에 서명(署名) 발표하였다.

1919년 3월에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이 크게 일어나자 이상룡 선생은 부민단(扶民團)은 발전적으로 해체하고 대동 단합의 자치단체로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에 한족회(韓族會)를 조직하였다. 이 한족회는 곧 부민단의 모체 위에서 이루어졌던 것으로서, 조직은 중앙부서의 단장, 주임을 총장(總長), 부장(部長)으로 명칭의 일부를 고치는 데에 그쳤다. 그리고 한족회의 재정부담으로 임시군정부(軍政府)를 수립하였는데, 이 군정부는 뒷날 대한민국 임시정부 소속으로 대일항전을 담당하게 되었던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의 전신이었다.

서로군정서의 최고책임자인 독판(督辦)에 취임한 이상룡 선생은 부독판(副督辦) 여준(呂準)을 비롯하여 이청천(李靑天)·신팔균(申八均)·양규열(梁圭烈)·김동삼(金東三) 등과 함께 농촌 청년들을 훈련시켜 독립군 양성에 주력하였다.

1920년 초에 북경(北京)에서 군사통일회(軍事統一會)가 개최되자 이상룡 선생은 군정서 대표로 성준용(成駿用)·배달무(裵達武)·송호(宋虎) 등을 파견하여 박용만(朴容萬)·신숙(申肅) 등과 군사단체의 통합을 시도하였으나 임시정부의 불신임안 등이 나오자 그 대표들을 철수시켰다.

1920년이래 일제의 만주 출병(出兵)과 경신참변(庚申慘變) 그리고 1923년 독립군의 자유시참변 등이 계속되었으나, 이상룡 선생은 서로군정서를 이끌고 액목현(額穆縣)에 이전하여 민병제(民兵制)에 의한 주경야병(晝耕夜兵)의 훈련을 계속하였다. 한편 이상룡 선생은 남북만주와 연해주(沿海州)에 산재한 여러 독립운동 단체들의 통합을 시도하여, 1922년 8월에는 서로군정서, 한족회, 대한독립단을 합하여 통군부(統軍府)를 조직하였으며, 이를 다시 대한독립군단 등 8단9회(八團九會)의 단체를 통합하여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로 발전시켰다. 같은 해 가을에 이상룡 선생은 서로군정서 제1중대장 채찬(蔡燦), 소대장 김유권(金有權)을 삼원보에 파견하여 일제의 앞잡이 기관을 숙청하도록 하는 등 무장항일 투쟁을 계속하였다.

이상룡 선생은 1920년 북경의 군사통일회의가 실패한 뒤에도 광복단체의 통합과 단결을 위하여 노심초사하였다. 1923년 1월 상해에서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자 이진산(李震山)·김동삼(金東三)·김형식(金衡植)·배천택(裵天澤) 등을 대표로 파견하였고, 김동삼은 이 회의의 의장으로 선출되어 독립운동 방략과 통합운동을 위해서 노력하였다. 그러나 이 회의가 소위 창조파(創造派)와 개조파(改造派)로 나뉘어 분규를 거듭하게 되자 민족의 분열을 막기 위하여 중립을 선언하고 대표들을 중도에서 소환하여 통일과 단합의 의지를 보였다.

국민대표회의가 결렬된 이후에도 임시정부는 분규가 계속되어 1925년 3월에는 마침내 이승만대통령의 탄핵면직안이 임시의정원에서 의결되어 국무총리 대리 박은식(朴殷植)이 임시대통령으로 추대되어 사태 수습에 임하였다. 이상룡 선생은 임정의 헌법을 개정하여 대통령중심제를 국무령체제(國務領體制)로 고쳐 신망있는 인사를 임시의정원에서 국무령으로 뽑도록 하였다. 그 결과 서간도의 반석현(磐石縣)에서 활동하던 이상룡 선생이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임시정부 국무령에 선출되었다. 이에 선생은 임시정부의 내분을 막고 독립운동을 활성화하기 위해서 1925년 9월 24일 국무령취임식을 거행하고 조각(組閣)에 임하였다.

이상룡 선생은 만주지역에서 독립군을 이끌고 항일투쟁에 앞장섰던 김동삼(金東三)·오동진(吳東振)·김좌진(金佐鎭) 등을 중심으로 국무원(國務員)에 임명하였으나 그중 대부분이 임시정부에 참여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민족주의와 공산주의의 대립으로 그 내분이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의 끈질긴 노력도 수포로 돌아가 그는 국무령을 사임하고 다시 반석현으로 돌아왔으며, 임정에서는 1926년 1월에 그의 해임을 의결하였다.

서간도에 돌아 온 이상룡 선생은 만주지역의 독립운동 단체만이라도 통합을 이룩하기 위하여 정의부(正義府)의 김동삼·현정경(玄正卿)·지청천(池靑天) 등을 대표로 하여 참의부(參議府)와 신민부(新民府)의 3부통합운동을 전개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1932년 3월 일제가 만주국(滿洲國)을 세우고 이에 따라 만주에서의 독립운동이 어려워졌다. 이상룡 선생은 병을 얻어 그렇게 바라던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한 채 이역에서 영면하였다. 그는 아들에게 “외세 때문에 자조(自阻)하지 말고 더욱 면려(勉勵)하여 목적을 관철하라”하는 유언을 남겼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코리안스피릿이 선정한 독립운동가는 석주 이상룡(1858-1932), 홍암 나철(1863-1916), 우당 이회영(1867-1932), 홍범도 장군(1868-1943), 남자현 여사(1872-1933), 주시경(1876-1914), 단재 신채호(1880-1936), 서일(1881-1921), 김좌진 장군(1889-1930), 이봉창 의사(1901-1932)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