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암살’에서 배우 전지현이 맡았던 암살단을 이끄는 대장이자 독립군 저격수 ‘안옥윤’ 역의 모티브가 되었던 여성독립운동가 남자현 의사. 지금으로부터 86년 전에 순국한 그를 기리기 위해 22일, 유족들이 국립서울현충원에서 모임을 가졌다.

이날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묘역에 안장된 의사의 묘역에서 유족들을 만날 수 있었다. 유족대표이자 남 의사의 손자인 김시복 씨는 “그간 많은 학자들이 연구를 해오면서 남자현 의사의 공로를 인정해주어 1962년부터 국가에서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으며, 건국훈장 대통령장에 추서되셨다. 지난 2015년에는 영화 ‘암살’이 개봉하면서 더욱 주목을 받으셨고, 경북 영양에 의사에 생가 옆에 현재 기념관이 건립 중이다. 많은 이들이 남 의사께 관심을 가지고 있어 감사할 따름이다.”고 말했다.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묘역에 안장된 순국선열 남자현 의사의 묘. [사진=김민석 기자]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묘역에 안장된 순국선열 남자현 의사의 묘. [사진=김민석 기자]

남자현 의사는 1872년 12월 7일, 경북 안동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했던 남자현 의사는 당시 영남의 석학이었던 부친 남정한(南珽漢) 선생의 가르침을 받아 소학(小學)과 대학(大學)을 통달하였다. 19세가 되던 해에 의성 김씨(義成 金氏) 김영주(金永周)와 혼인했다.

1895년 일제는 궁궐에 침입해 명성황후를 시해했고, 점차 노골적으로 침략 야욕을 드러냈다. 그 만행을 지켜볼 수만은 없었던 의사의 남편 김씨는 “나라가 망해 가는데 어찌 집에 홀로 있을 것인가. 지하에서 다시 보자”며 결사보국(決死報國)을 결심했다. 그러나 영양의병장(英陽義兵將) 김도현(金道鉉) 의진에서 일본군과 전투 중 전사했고, 소식을 들은 여사는 복수심에 밤잠을 이루지 못했지만, 3대 독자 유복자인 아들과 시부모를 봉양해야 했다. 이에 양잠(養蠶)을 하며 손수 명주를 짜 내다 팔아 가계를 이어 나갔다.

남 의사는 1919년 3·1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자, 항일 구국하는 길만이 남편의 원수를 갚는 길임을 깨달았다. 이에 아들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중국 요녕성 통화현(通化縣)으로 이주해 서로군정서에 가입하여 군사들의 뒷바라지를 했다. 또한, 여성계몽에도 힘써 10여 개의 여자교육회를 설립하여 여권신장과 자질향상에 주력하였다. 이후 1925년 사이토 마코토 총독을 암살할 계획을 세우고 국내에 잠입해 거사를 추진하였으나, 당시 삼엄한 경계 탓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본거지로 되돌아왔다. 마침 인근 의성단장(義成團長) 편강렬(片康烈)·양기탁(梁起鐸) 등이 각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추진하고 있음을 알고 독립운동단체들을 찾아다니며 통합을 독려하였고, 상당한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반면, 1931년 9월에 일제는 소위 만주사변을 일으켜 중국 요녕성 뿐만 아니라 길림성에까지 침략의 손길을 뻗쳤다. 당시 남 의사를 후원하던 일송(一松) 김동삼(金東三) 선생은 길림성을 떠나 하얼빈으로 이동하여 그곳에서 정인호(鄭寅浩)의 집에 묵고 있다가 일경에게 붙잡혀 투옥되었다. 의사는 그의 친척으로 위장하고 면회를 허가받아 연락책 역할을 수행했다. 김동삼 선생의 지시내용을 동지들에게 전달하는 동시에 그가 국내에 호송될 때 구출하기 위하여 치밀한 계획을 세웠으나 동지들의 행동 지연으로 인하여 실패하였다. 여성다움을 잃지 않았던 여사는 항일운동 중 병들고 상처받아 고생하는 애국청년들에게 항상 ‘어머니’와 같은 자애로운 손길로 간호하며 위로를 아끼지 않았다.

1932년에는 국제연맹조사단이 침략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하얼빈에 파견된다는 소식을 듣고, 일제의 만행을 호소하고자 왼손 무명지 2절을 잘라 하얀 천에다 ‘조선독립원(朝鮮獨立願)’이라는 혈서를 쓴 뒤 잘린 손가락 마디와 함께 조사단에 전달했다. 우리 민족의 강인한 독립정신을 인식시키고 일제에 속지 말도록 호소한 것이었다.

1933년 초에는 동지 이춘기(李春基) 등과 소위 만주국 건국일인 3월 1일 행사에 참석할 예정인 주만주국 일본 전권대사 무등신의(武藤信義)를 제거하기로 하고 2월 29일 거지로 변장했다. 권총 1정과 탄환, 폭탄 등을 몸에 숨기고 하얼빈에서 장춘(당시 新京)으로 가기 위해 떠났다. 그러나 하얼빈 교외 정양가(正陽街)를 지나던 중, 미행하던 일본영사관 소속 형사에게 붙잡히게 되었다.

일편단심으로 14년간 동분서주하던 의사는 끝내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일본영사관 유치장에 감금되었다. 6개월간 혹독한 고문과 옥중 생활을 견딘 남 의사는 같은 해 8월, 죽기로 결심하고 옥중에서 15일 동안의 단식투쟁을 벌였으나 사경에 이르렀다. 이후 의사는 유복자였던 독자 영달(英達)에게 중국 화폐 248원을 내놓은 뒤 우리나라가 독립되면 독립축하금으로 이 돈을 희사하라고 하였다. 이에 유족들은 1946년 3월 1일, 서울운동장에서 거행된 3‧1절 기념식전에서 김구, 이승만 선생에게 그 돈을 전달했다.

남 의사는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이 먹는 데 있는 것이 아니고 정신에 있다. 독립은 정신으로 이루어지느니라”라는 유언을 남긴 채 1933년 8월 22일, 향년 6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 하얼빈의 사회유지, 부인회, 중국인 지사들은 여사를 ‘독립군의 어머니’라고 존경하고 하얼빈 남강외인(南崗外人) 묘지에 안장하여 입비식(立碑式)을 갖고 생전의 공로를 되새겼다. 여성으로서 평생을 바쳐 독립운동의 정화(精華)가 되어 찬란한 빛을 남긴 여사의 영전에 동지들은 깊은 애도를 표하였다.

이후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에 추서되었으며, 당시 58명의 독립유공자 중 여성으로는 남자현 의사가 유일했다. 오는 2020년 12월에는 남자현 의사의 삶과 행적을 알리는 기념관 남 의사의 생가 옆에 건립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