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2월, 일본 동경에 울려퍼진 대한독립 만세
1919년 2월, 일본 동경에 울려퍼진 대한독립 만세
  • 한승용 기자
  • k-spirit@naver.com
  • 승인 2018.02.07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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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학이야기1

 일본 동경이 30년만에 폭설에 뒤덮인 1919년 2월 8일 오후 2시 대한독립 만세 소리가 우렁차게 울려퍼졌다. 이날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 모인 한인 유학생 600여명 앞에서 최팔용이 ‘조선청년독립단’ 발족을 선언하고 백관수가 2·8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이 독립선언서는 이광수가 기초했다. 상해에서 파견된 조소앙과 연결된 현상윤, 송계백, 백관수 등 동경조선유학생회가 주축이 되었다. 독립선언문과 결의문을 낭독한 후 시가행진을 시도하면서 대회장을 둘러싼 일본 경찰과 일대 격투가 벌어졌고 최팔용 등 유학생 60여 명이 일경에 체포, 투옥됐다.

▲ 동경유학생으로 구성된 조선청년독립단이 1919년 2월8일 일본 동경에서 선언한 2·8 대한독립선언서. <사진=독립기념관>

 재일본동경조선청년독립단 대표 최팔용, 이종근, 김도연, 송계백, 이광수, 최근우, 김철수, 김상덕, 백관수, 서춘, 윤창석의 명의로 작성한 독립선언서와 민족대표 소집청원서는 거사 전날에 우편으로 동경 주재 각국 대사관, 일본 정부의 대신들, 귀족원과 중의원, 조선총독 및 각 신문사로 발송하였다.  

독립선언을 주도한 최팔용은 일본 경찰의 강제 해산에 맞서 맨주먹으로 대항하다가 체포되었다. 모진 고문을 받고 스가모 형무소에서 갖혀지내던 후 조국에 돌아와 요양하였으나, 그는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짧은 생을 마감하였다. 향년 32세. 2·8독립선언 거사에 참가한 학생들은 2월 한 달 내내 독립운동과 함께 동맹 휴학을 벌이다가 359명이 조국으로 돌아와 3·1운동에 가담하였다.

 2·8 독립선언의 뿌리가 된 무오년 대한독립선언 (大韓獨立宣言)

우리 민족이 나라를 빼앗기고 나서 맨 처음으로 일본에게 나라를 되찾고 말겠다는 각오를 들어 내놓고 보여준 최초의 독립선언서는 중국에서 나왔다. 중국 왕청현의 중광단을 중심으로 발표한 무오년의 대한독립선언서이다.

조소앙이 기초한 이 대한독립선언서에는 사기과 강박으로 이루어진 일본과의 병합(한일병합조약)은 무효이며, 육탄혈전으로라도 독립을 쟁취할 것이라는 내용을 담았다. 기록에는 이 선언서는 1919년 2월에 발표된 것이라 하였으나, 기초하여 완성한 것은 3·1운동의 110일 전인 1918년 11월 13일이다. 이는 만주와 러시아 땅으로 이주한 우리 동포들에게 독립심을 불어넣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이 선언에 참여한 이는 모두 39명으로 1910년대 국외 민족 운동을 주도하던 저명한 운동가들이다.

 "우리 대한은 완전한 자주독립과 신성한 평등복리로 우리 자손 여민(黎民: 백성)에 대대로 전하게 하기 위하여, 여기 이민족 전제의 학대와 억압을 해탈하고 대한 민주의 자립을 선포하노라.(중략)
아 우리 마음이 같고 도덕이 같은[同心同德] 2천만 형제자매여! 우리 단군대황조께서 상제(上帝)에 좌우하시어 우리의 기운(機運)을 명하시며, 세계와 시대가 우리의 복리를 돕는다.
정의는 무적의 칼이니 이로써 하늘에 거스르는 악마와 나라를 도적질하는 적을 한 손으로 무찌르라. 이로써 5천년 조정의 광휘(光輝)를 현양(顯揚)할 것이며, 이로써 2천만 백성[赤子]의 운명을 개척할 것이니, 궐기[起]하라 독립군! 제[齊]하라 독립군!


천지로 망(網)한 한번 죽음은 사람의 면할 수 없는 바인즉, 개·돼지와도 같은 일생을 누가 원하는 바이리오. 살신성인하면 2천만 동포와 동체(同體)로 부활할 것이니 일신을 어찌 아낄 것이며, 집안이 기울어도 나라를 회복되면 3천리 옥토가 자가의 소유이니 일가(一家)를 희생하라!
아 우리 마음이 같고 도덕이 같은 2천만 형제자매여! 국민본령(國民本領)을 자각한 독립임을 기억할 것이며, 동양평화를 보장하고 인류평등을 실시하기 위한 자립인 것을 명심할 것이며, 황천의 명령을 크게 받들어(祇奉) 일절(一切) 사망(邪網)에서 해탈하는 건국인 것을 확신하여, 육탄혈전(肉彈血戰)으로 독립을 완성할지어다.


단군기원 4252년 2월 일


김교헌(金敎獻) 김규식(金奎植) 김동삼(金東三) 김약연(金躍淵) 김좌진(金佐鎭) 김학만(金學滿) 여 준(呂 準) 유동열(柳東說) 이 광(李광(李 光) 이대위(李大爲) 이동녕(李東寧) 이동휘(李東輝) 이범윤(李範允) 이봉우(李奉雨) 이상룡(李相龍) 이세영(李世永) 이승만(李承晩) 이시영(李始榮) 이종탁(李鍾倬)이종탁(李鍾倬) 이 탁(李沰) 문창범(文昌範) 박성태(朴性泰) 박용만(朴容萬) 박은식(朴殷植) 박찬익(朴贊翼) 손일민(孫一民) 신 정(申정(申 檉) 신채호(申采浩) 안정근(安定根) 안창호(安昌浩) 임 방(任□) 윤세복(尹世復) 조용은(趙鏞殷) 조 욱(曺욱(曺 煜) 정재관(鄭在寬) 최병학(崔炳學) 한 흥(韓 興) 허 혁(許 爀) 황상규(黃尙奎) "

▲ 중국 왕청현의 중광단을 중심으로 1918년 발표한 무오 대한독립선언서. <사진=독립기념관>

  1918년 1월 18일 발표한 이 독립 선언서는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국제 질서 재편 과정에서 각 민족이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서 그 귀속과 정치 조직, 운명을 결정하고 타민족이나 타국가의 간섭을 받지 않을 것을 천명하였다. 이 선언서는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고무되어 육탄혈전으로라도 조선의 독립 기회를 얻고자 발표한 것이다.

 1910년 나라가 망한 이후 국외의 민족 운동가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이전의 왕을 복위한다는 복벽주의(復辟主義)적 전망이 남아 있던 시절에 독립 국가의 지향으로 ‘민주’와 ‘평등’을 표방하였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있다. 1917년 국외 민족운동가들 사이에서 국민 주권 사상을 표방한 후 그 같은 사상이 지속 강화되어 1918년 '대한독립선언서'에도 명백히 표명되었음을 알 수 있다.

2·8 독립선언을 돌아보면서 그 뿌리가 되는 무오년 대한독립선언을 다시 새겨보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몇 가지 있다. 

  첫째로 발표 시기를 ‘단군기원 4252년’이라 하였다. 그들이 지닌 역사 인식이 어디에 출발점을 두고 있는지 잘 나타내 주고 있다.

둘째,  선언서의 연서자들이 대부분 독립운동사에 지대한 업적을 남긴 핵심 독립운동가들이고 이들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주도하였다.

셋째, 이탁을 제외한 변절자가 없고, 망명정부 수립 등 실제로 구체적인 행동으로 연결한 점, 그리고 치열하게 독립운동에 생을 바쳐 살아 돌아온 분들이 얼마 안 된다는 것도 특별히 기릴 만한 부분이다.


무오  대한독립선언서가 2·8독립선언 및 민족의 거대한 횃불인 3·1 만세운동의 시발이 된다는 점에서 그 중요성을 다시 한 번 돌아보아야 한다.

▲ 한승용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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