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사 김규식 박사 순국 68주기 추모제 거행
우사 김규식 박사 순국 68주기 추모제 거행
  • 문현진 기자
  • moon_pt@naver.com
  • 승인 2018.12.11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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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0일 서울현충원 현충관에서 김규식 박사 기려

(사)우사김규식박사기념사업회(회장 이기후)와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위원장  한완상)는 우사 김규식(1881~1950) 박사 순국 68주기 추모제 및 학술회의를 지난 12월 10일(월) 서울현충원 현충관에서 15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하였다. 

행사는 국민의례, 애국가제창, 개회사, 김규식 박사 연보, 추모사, 헌화 및 분향, 추모가, 유족대표 인사말씀, 학술회의, 폐회 순으로 진행되었다. 

12월 10일 서울 현충원 현충관에서 우사 김규식박사 68주기 추모제 및 학술강연이 개최되었다. [사진=문현진 기자]
12월 10일 서울 현충원 현충관에서 우사 김규식박사 68주기 추모제 및 학술강연이 개최되었다. [사진=문현진 기자]

이날 추모식에는 윤종오 서울북부보훈지청장, 박해종 항일독립운동가단체연합회 사무총장, 김시명 대한민국순국선열유족회장, 임종선 민족대표33인 유족회장, 김광을 국가유공자녀회 공동의장을 비롯한 시민 150여 명이 참석했다.    

(사)우사김규식박사기념사업회 이기후 회장은 추모사에서 "나라를 위해 많은 위업을 이룬 김규식 박사였다. 박사가 펼친 뜻 중 현 시점에서 새겨야 할 것이 있다."며, "그는 정통민족세력으로 좌우합작과 남북협상을 주도하며 통일 자주 국가를 지향했고 중도 노선을 추구한 정치가였다. 남북협상의 실패로 꿈을 접어야 했지만, 그는 남북 모두에서 존경받은 민족지도자였다."고 밝혔다. 또한 이 회장은 "김규식 박사가 염원하던 통일의 과업은 이제 우리 후손들에게 맡기고 부디 편안히 영위하시길 빈다.”라고 고인을 기렸다.

이기후 우사김규식박사 기념사업회 회장이 추모사를 하고 있다. [사진=문현진 기자]
이기후 우사김규식박사 기념사업회 회장이 추모사를 하고 있다. [사진=문현진 기자]

김시명 대한민국순국선열유족회장은 "김규식 박사는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산발적으로 이루어지는 독립운동을 한데 모아야 한다는 신념으로 많은 독립운동 단체를 하나로 통일하는 통일전선 구축에 힘쓴 위대한 독립운동가이자 외교관이었다."며, "사람들을 잇고 단체들을 연결하여 국가를 만들어나가는 그 탁월한 능력은 오직 나라를 위해서만 쓰였으며, 이러한 박사의 위대한 일생을 통하여 얻는 그 교훈은 우리 후손들이 영원히 기억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참가자들은 고인을 기리는 뜻을 담아 김규식 박사의 영전에 헌화하였다. 

이날 학술회의에 참가한 이상면 서울대 명예교수가 우사 김규식 박사 영전에 조의를 표하고 있다. [사진=문현진 기자]
이날 학술회의에 참가한 이상면 서울대 명예교수가 우사 김규식 박사 영전에 조의를 표하고 있다. [사진=문현진 기자]

 한편, 문재인 대통령은 10일 재외공관장들을 청와대로 불러 만찬을 함께하며 김규식 박사의 말을 인용했다. 문 대통령은 "김규식 선생께서는 1948년 최초의 남북 협상에 참여한 이후 '이제는 남의 장단에 춤 출 것이 아니라 우리 장단에 춤을 추는 것이 제일'이라고 하셨다."며, "저는 이 말에 평화와 번영의 한반도로 가는 원칙과 방향이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우사(尤史) 김규식(金奎植, 1881~1950) 선생은 1881년 1월 29일 조선 문신이었던 김지성과 경주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양반 관리의 자제로 태어났지만, 선생의 성장과정은 순탄치만은 않았다. 부친이 부산 개항장에서 일제가 불평등 무역을 자행하는 것을 보고, 그 부당함을 지적하다가 귀양을 가게 되었다. 더욱이 모친은 그 충격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어 선생은 고아와 다를 바가 없었다.

선생은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인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목사 집에 입양되어, 1887년 민로아학당과 구세학당에서 서양식 근대 교육을 받고 1896년 졸업하였다. 이후 선생은 독립협회에 가입하고 독립신문사에 입사했다. 이 때 서재필의 영향을 받아 의식세계가 크게 확대되었고, 약관의 나이에 미국 유학을 떠나게 된다.

1897년 가을 버지니아주에 있는 로녹(Roanoke College)대학 예과에 입학하여 1년 만에 준우등의 성적으로 졸업했다. 본과에 입학해서는 외국어 실력이 상당히 뛰어나 7개국어를 구사할 정도였다. 1903년 6월 대학을 졸업하고 1904년 봄 귀국했다. 귀국 후 선생은 새문안교회를 중심으로 언더우드 목사를 도와 선교사업을 하며, 경신학교, YMCA 학관, 배재학당에서 민중 계몽운동에 전력하였다.  

하지만 이 시기 조국과 민족의 운명은 그야말로 풍전등화와 같이 위태한 지경이었다. 특히 일제는 식민체제의 안정을 위하여 민족운동자들을 대대적으로 탄압하였다. 이 때문에 선생은 다른 애국지사들과 함께 국외로 망명하였다. 1913년 4월 중순 상해에서 선생은 신규식이 조직한 동제사(同濟社)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동제사는 박달학원(博達學院)을 설립하여 민족교육을 실시해 독립운동의 기반 조성에 주력하였고, 선생은 이 학원의 영어 교수직을 맡았다. 1917년 7월 신규식, 조소앙, 박은식 등과 함께 ‘대동단결선언’을 발표하여 국내외 독립운동 세력의 통합과 단결을 통한 임시정부의 수립을 제의하였다.

이 시기 국제 정세는 크게 변하고 있었다. 러시아 노농정권이 약소민족 해방운동을 지원한다고 선언하고, 윌슨 미국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천명하자 상해의 독립운동자들은 이를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신한청년당은 1919년 1월 18일부터 개최되는 파리강화회의에 한국 민족대표를 파견하였다. 이때 영어와 불어에 능통한 김규식 선생이 한국 대표로 선발되었다. 

우사 김규식 박사 순국 68주기 추모제에 참석한 참가자들이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사진=문현진 기자]
우사 김규식 박사 순국 68주기 추모제에 참석한 참가자들이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사진=문현진 기자]

프랑스 파리에서 선생은 본격적인 독립외교활동에 착수했다. 3.1운동 등 한국 독립운동에 관한 소식을 세계 만방에 알렸고, 강화회의에 '일본으로부터 해방 및 독립국가로서 한국의 재편성을 위한 한국 국민과 민족의 주장'이라는 공고서와 비망록을 제출하였다. 곧 이어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어 선생은 외무 총장 겸 강화회의 파리 대표위원으로 임명되었다.

1919년 8월 8일 선생은 이승만의 초청으로 미국으로 향했다. 미주에서 독립 외교업무를 수행하고 미국무성 당국자들과 접촉하여 외교 선전활동을 펼쳤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제국 열강에 호소하여 한국 독립을 성취하는 것은 어렵다고 판단한 선생은 1922년 1월 레닌 정부가 개최한 극동 피압박 민족대회에 한국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가했다. 선생은 레닌을 만나 한국 독립운동에 적극적인 지원을 호소하였다. 하지만 1924년 1월 레닌이 사망하면서 기대를 접을 수밖에 없었다.

이후 선생은 중국 상해에서 교육운동에 매진하였다. 국제 관계의 냉혹함을 깨달은 선생에게 교육은 독립운동의 모색 기간이었다. 상해 복단대학과 동방대학에서 영문학을 강의하고, 한인 학생들의 민족교육을 위해 중등 과정의 고등보습학원을 세워 운영했다. 1927년 북양대학 교수로 활동하면서 한중 연대와 대일 항전을 위해 모든 역량을 쏟았다. 특히, 1932년 선생은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에서 상무집행위원과 외교위원장을 맡아 중국측 항일운동세력과 연합해 한중민중통일동맹을 결성했다.    

1933년 8월 미국에서 수천 달러의 투쟁자금을 모금하여 귀환한 선생은 민족대당을 결성하고자 했다. 그 결과, 1935년 7월 민족통일전선의 원칙 아래 대한독립당과 의열단, 조선혁명당, 한국독립당, 신한독립당의 통합으로 민족혁명당을 창당했다. 민족혁명당은 삼균주의와 사회주의를 수용한 진보적 민족주의를 주창했다. 이러한 진보적 민족주의 이념은 당시 조소앙, 김원봉과 함께 규칙 제정위원으로 활동하였던 선생의 신념과 이상이 반영된 것이다.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이 발생했다. 이 같은 상황 변화에 따라 한국독립운동 세력은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와 조선민족전선연맹으로 나눠져 대일 항전을 준비했다. 1942년 10월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이 된 선생은 중국 관내에서 좌우익 세력을 대표하는 한국독립당과 광복군, 민족혁명당과 조선의용대가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한 연대와 통합을 추진했다. 임시정부는 양대 정당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했고 1945년 8월 15일 그토록 기다리던 광복을 맞았다.   

선생은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1945년 11월 23일 1차로 귀국하였다. 선생은 과도입법의원의 의장으로 신국가 건설의 기초를 마련하는 데 힘썼다. 특히 남북 양쪽에서 단독정부의 수립 움직임이 가시화되자 이를 막기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김구 선생과 더불어 민족분단으로 치닫고 있는 역사의 물줄기를 바로 잡기 위해 1948년 4월 북행하여 남북협상에 참석했다. 그런데도 남북한 모두에서 단독정부가 수립되어 민족분단 상황을 맞이하자, 선생은 동족상잔의 비극을 우려하였다. 1950년 6월 25일, 선생이 그토록 우려하던 일이 결국 벌어지고, 선생은 납북되어 같은 해 12월 10일 평북 만포진 부근에서 70세를 일기로 서거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9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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