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재이동휘선생기념사업회(회장 류준형) 주최로 1월 31일 오후 2시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관에서 성재 이동휘 선생 서거 84주기 추모식이 거행되었다. 이날 추모식에는 이용기 서울남부보훈지청장, 독립운동 관련 단체 대표 및 회원, 유족, 학생, 시민 등 100여 명이 참석했다.

추모식은 개회사, 약전봉독, 추모사, 결의문낭독, 헌화 및 분향, 폐회사 순으로 진행되었다. 

1월 31일,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관에서 성재 이동휘 선생 서거 84주기 추모식이 거행되었다. [사진=성재이동휘선생기념사업회]
1월 31일,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관에서 성재 이동휘 선생 서거 84주기 추모식이 거행되었다. [사진=성재이동휘선생기념사업회]

 성재(誠齋) 이동휘(李東輝) 선생은(1873~1935)은 함경남도 단천에서 출생하였다. 1895년 한성무관학교(漢城武官學校)에 입학한 뒤, 1902년부터 강화도 진위대장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1904년 러일전쟁 발발 이후 일본의 침략이 가속화되자, 선생은 1905년 3월 군직을 사임하고 보창학교(普昌學校)를 설립하여 민족교육운동에 헌신하였다. 아울러,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 결성에 참여하는 등 민족주의 교육과 구국계몽운동에 적극적이었다. 

1908년 선생은 서북·관서·해서지방 출신자들 중심으로 구성된 서북학회를 창립했다. 서북학회의 목표는 국권회복·인권신장을 통하여 근대문명국가를 달성하고자 했다. 한편, 안창호 등과 비밀결사인 신민회를 조직하여 계몽운동과 항일투쟁을 전개하던 중 1911년 3월 “105인 사건”으로 일경에 피체되어 인천 무의도에 유배되는 고초를 겪었다. 1913년 2월경 북간도로 망명해 김립, 계봉우 등과 광성학교(光成學校)를 설립하여 꾸준히 민족주의 교육 활동을 전개하였다.

1913년 10월, 러시아 연해주로 거점을 옮겨 블라디보스톡의 신한촌(新韓村)을 중심으로 조직된 권업회(勸業會)에 가담하여 이상설, 이갑, 신채호 등과 함께 “독립전쟁론”에 입각한 민족해방 투쟁활동에 적극 투신하였다. 1914년에는 중국 왕청현(汪淸縣) 라자거우의 한인촌으로 거점으로 옮겨 대전무관학교(大甸武官學校)를 설립하고 독립군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이자 군무총장 직을 맡았던 성재 이동휘 선생. [사진=독립기념관]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이자 군무총장 직을 맡았던 성재 이동휘 선생. [사진=독립기념관]

1914년 항일광복전쟁계획을 수립하였다. 이를 위해 만주와 러시아의 민족운동세력을 규합한 대한광복군정부를 조직하였으며, 북간도 왕청현 나자구에 사관학교를 설립하였다. 선생은 이상설에 이어 2대 정도령(正都領)에 취임하여 광복전쟁계획을 총지휘하였다. 

1917년 3월 러시아 2월혁명 소식을 접한 선생은 새로운 일을 도모하고자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을 찾았지만, 러시아헌병대에 독일간첩 혐의로 피체되어 10월혁명 후인 1917년 11월에야 석방되었다. 1918년 5월 13일, 하바로브스크에서 김알렉산드라, 유동열, 김립, 오성묵, 오와실리, 이인섭 등 동지들과 최초의 한인사회주의정당인 한인사회당을 창당하였다. 한인사회당은 기관지 발행, 군사학교 설립, 일본군병사들을 상대로 한 반제반전(反帝反戰) 선전, 한인적위대 조직 등을 추진하였다.

1919년 3ㆍ1운동 직후에는 블라디보스톡에서 문창범 등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고, 대한임시정부 군무총장으로 동녕현에 임시군집부(臨時軍執部)를 설치하여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그해 8월말, 상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총장 및 초대 국무총리에 취임하여 임시정부 내외의 동조세력을 규합, 사회주의 운동 확산을 위해 전력을 기울였다.

1921년 3월 임시정부 국무총리직을 사임한 후에는 국민대표회(國民代表會) 집행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독립운동과 공산주의 운동에 전력하였으나, 1935년 1월 31일, 블라디보스톡 신한촌(新韓村)에서 62세를 일기로 서거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95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