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재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회장 유인태)는 '단재 신채호(1880~1936) 선생 순국 83주기 추모식'을 21일 오전 11시 서울 효창동 백범기념관 대회의실에서 개최했다. 추모식에는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오진영 서울지방보훈청장을 비롯해 독립운동 관련 단체 대표 및 회원, 유족, 시민 등 300여 명이 참석했다. 

행사는 단재선생 약력보고, 헌사 및 추모사, 단재의 노래 제창, 헌화 및 분향, 폐회사 등의 순으로 진행됐다.

단재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는 '단재 신채호(1880~1936) 선생 순국 83주기 추모식'을 2월 21일 서울 효창동 백범기념관 대회의실에서 개최했다. [사진=단재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
단재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는 '단재 신채호(1880~1936) 선생 순국 83주기 추모식'을 2월 21일 서울 효창동 백범기념관 대회의실에서 개최했다. [사진=단재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

단재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 유인태 회장은 "나라를 빼앗기고 이국 땅을 떠돌며 26년 간 조국의 광복을 위해 헌신한 신채호 선생을 기리기 위해 오늘 우리는 이 자리에 모였다."며, "우리는 단재 선생이 그토록 열망하던 하나의 민족, 하나의 나라를 만들어나가야 한다. 이제서야 남북으로 갈라졌던 나라가 서로를 향해 달려오고 있다."고 추모했다.  

문화체육관광부 도종환 장관은 "민족의 자주와 해방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위대한 민족의 스승 단재 신채호 선생님의 순국 83주기 추모식에 참석해 주셔서 감사하다"며, "단재 선생은 역사를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라고 했다. 이것을 민족적 자아로 확대를 하면 민족적 자아와 반민족적 자아의 투쟁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난 해까지도, 어제까지도 그 투쟁은 계속 되어왔다. 3·1운동 100년을 맞는 오늘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그래서 단재 선생의 올바른 정체성을 갖춘 민족주의 사학이 주류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문화체육관광부 도종환 장관이 추모사를 낭독하고 있다. [사진=단재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
문화체육관광부 도종환 장관이 추모사를 낭독하고 있다. [사진=단재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1880.11.7~1936.2.21)선생은 충청남도 대덕군 산내면에서 출생하여 6세 때부터 한학 공부를 시작했다. 12~13세 때 사서삼경을 독파하여 신동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18세 때 학부대신이었던 양원 신기선의 사저에서 신·구 서적을 섭렵하며 새로운 학문을 접하게 되었다. 이 때, 유교학문의 한계를 깨닫고 점차 민족주의적 세계관을 갖게 된다. 

당시 서울에서는 독립협회의 자주, 민권, 자강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고 있었고, 선생은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간부로 활약했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이 지속되자 22세 때인 1901년 문동학원에 부임하여 신교육을 통한 민족계몽운동에 전력했다. 

선생은 1905년 26세에 성균관 박사가 되었으나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위암 장지연의 초빙으로 황성신문에 논설기자로 입사해 언론인이 되었다. 그러나 이해 11월 을사조약이 늑결됨에 따라 황성신문의 사장 장지연이 ‘시일야방성대곡’의 논설로 조약을 규탄하자 일제는 황성신문을 폐쇄 처분하였다.

1906년 대한매일신보의 공식적인 사주(社主)는 영국인 베델(E. T. Bethell)이었다. 선생은 대한매일신보로 옮겨 일제 통감부의 보안규칙이나 신문지법에 저촉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필력을 발휘했다. 일제의 침략과 친일파의 매국행위를 통렬하게 비판하고 국권회복에 온 국민이 진력할 것을 천명하였다. 이 때부터 1910년 중국으로 망명하기 전까지 ‘일본의 삼대충노(三大忠奴)’, ‘서호문답’, ‘영웅과 세계’, ‘한일합병론자에게 고함’ 등 애국적 계몽논설과 사론을 집필하고 ‘독사신론’, ‘이순신전’, ‘최도통전’ 등 역사물을 연재하였다.

1907년 도산 안창호에 의한 비밀결사 신민회 창립위원으로 활동했고, 민족경제수호운동인 국채보상운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또한 주시경과 함께 국문전용의 여성잡지인 '가영잡지'의 편집인이 되어 부인층의 계몽에도 노력하였다.

1910년 4월 신민회 간부들과 선생은 국내에서 국권회복운동이 불가능할 것으로 판단하여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다음해 1911년 연해주 블라디보스톡에서 동지들과 광복회를 조직하여 부회장으로 활동하였다. 

한말 사학자이자 언론가이며 민족운동가였던 단재 신채호(1880~1936) 선생 영정. [사진=단재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
한말 사학자이자 언론가이며 민족운동가였던 단재 신채호(1880~1936) 선생 영정. [사진=단재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

1913년에는 박은식, 문일평, 정인보, 조소앙 등과 함께 박달학원(博達學院)을 세워 중국에 있는 한국청년들의 민족교육에 매진했다. 아울러 선생은 역사 연구가 곧 민족독립운동의 중추라고 인지하고 ‘국사는 곧 국혼(國魂)’이라는 역사인식을 전파했다.

1920년대에 들어 선생은 칩거의 기간 속에서 국사연구에 종사하였다. 이 시기에 ‘조선상고문화사(朝鮮上古文化史)’,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 ‘조선사연구초(朝鮮史硏究艸)’를 집필하여 근대민족사학을 확립하는 데 박차를 가하였다. 

1928년 4월에는 그 스스로 무정부주의동방연맹 북경회의를 개최했다. 이 회의 결의에 따라 대만에서 일종의 위조수표를 확보하는 등 독립운동자금을 염출하는 직접 행동에 나섰다가 1928년 5월 8일 그 연루자로 일경에 피체되었다. 10년 형을 받고 여순 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36년 옥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