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군의 전통, 광복군을 거쳐 대한민국 국군이 계승”
“독립군의 전통, 광복군을 거쳐 대한민국 국군이 계승”
  • 정유철 기자
  • npns@naver.com
  • 승인 2018.06.07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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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오동 전승 제98주년 기념 국민대회서 육군사관학교, 홍범도 장군에 명예졸업증서 추서

봉오동전투 전승 제98주년 기념 국민대회가 6월 7일 오후 서울역사박물관 강당에서 (사)여천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후원회원, 육군사관학교 군악대, 해군 홍범도함 승조원 등 3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됐다.

이날 행사는 (사)여천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와 남양홍씨남양군파대종중회가 주최하고 국가보훈처·광복회·재향군인회가 후원했다. 봉오동(鳳梧洞) 전승은 1920년 6월 7일 중국 지린성 왕칭현 봉오동에서 홍범도, 최진동, 안무 등이 이끈 대한북로독군부의 한국 독립군 연합 부대가 일본군 제19사단의 월강추격대대를 크게 무찌르고 대승을 거둔 것을 말한다.

봉오동전투 전승 제98주년 기념 국민대회가 6월 7일 오후 서울역사박물관 강당에서 (사)여천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후원회원, 육군사관학교 군악대, 해군홍범도함 승조원 등 3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됐다. [사진=김경아 기자]
봉오동전투 전승 제98주년 기념 국민대회가 6월 7일 오후 서울역사박물관 강당에서 (사)여천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후원회원, 육군사관학교 군악대, 해군홍범도함 승조원 등 3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됐다. [사진=김경아 기자]

 이종찬 여천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이사장은 기념사에서 “봉오동 전투는 청산리 전투와 더불어 우리의 무장독립운동사에서 양대 대첩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전투를 계기로 일본군과 싸워서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고, 전 국민들에게 독립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심어주었습니다. 이와 같은 독립군의 전통은 1940년 광복군으로 이어졌고, 1948년 대한민국 국군을 창건할 때 계승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종찬 이사장은 “그 동안 애국지사들과 뜻있는 민족단체, 그리고 역사학계의 부단한 노력과 문재인 대통령께서 ‘독립군과 광복군이 우리군의 역사적 출발점’이라는 역사인식에 따라 독립전쟁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계승 작업이 진행되고 있습니다.”라고 강조했다.

이종찬 이사장은 “오늘 이 자리는 재향군인회 회원들과 육사 군악대, 해군 홍범도함 승조원들이 자리를 함께 하고 있습니다. 우리 국군은 1907년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된 뒤 의병투쟁과 독립군, 광복군의 역사를 이어받았습니다. 이것은 역사적 진실이며, 법적·제도적인 귀결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인식으로 군의 정신전력을 강화하고, 우리 국민들의 나라사랑정신을 드높이는 계기로 삼아야 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종찬 (사)여천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이사장이 7일 봉오동전투전승제98주년 기념 국민대회에서 기념사를 하고 있다. [사진=김경아 기자]
이종찬 (사)여천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이사장이 7일 봉오동전투전승제98주년 기념 국민대회에서 기념사를 하고 있다. [사진=김경아 기자]

윤종오 서울북구보훈지청장은 치사를 통해 “만주 항일무장독립운동 최초의 승전인 봉오동 전투를 이끈 중심에는 바로 홍범도 장군이 계셨습니다. 직접 의병을 일으키시고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며 국권회복을 향한 무력투쟁에 앞장섰던 장군의 모습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이 국가와 민족을 위해 어떠한 모습으로 살아야 하는 지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합니다.”라며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과 3·1독립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있는 이때, 조국 광복을 위해 온 몸을 던지신 순국선열과 애국지사의 뜻과 정신을 다시 한 번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라고 말했다.

광복회 박유철 회장은 축사에서 “오늘, 봉오동 전승 98주년을 맞이하여 우리 모두는 지난날 화합과 협력을 바탕으로 적을 무찔러 승리를 거뒀던 선열들의 지혜를 본받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를 계기로 국민정신을 일깨우는 한편, 한반도에서의 영구한 평화가 정착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루빨리 본래부터 하나였던 민족공동체를 회복하여 지난날 선열들께서 자주독립의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셨듯이, 우리 후세들도 남과 북을 중심으로 주변 국가들과 더불어 동북아 번영을 함께 누리는 평화통일의 새로운 역사를 창조해 나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라고 말했다.

홍범도 장군의 묘소가 있는 카자흐스탄에 나가 있는 김대식 주카자흐스탄대한민국 대사는 축사에서 (홍범도)“장군님께서는 생의 말년인 6년여 기간을 카자흐스탄에서 보내셨습니다. 1937년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주된 10만 명이 넘는 고려인들이 처한 암울한 시기, 장군님께서는 그들이 뭉치고 역경을 해쳐나가는 데 필수적이었던 투혼의 자양분이셨고, 지금도 그들의 자부심과 용기의 원천이 되고 있다”며 “올해는 홍범도 장군님께서 서거하신 지 75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이 땅에 사신 기간이 75년이었고, 이제 이생을 떠나신 지 다시 75년이 되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이 국제사회에 국가발전 모델로 우뚝 선 지금까지도 우리는 장군님을 조국의 품으로 모셔오지 못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김대식 주카자흐스탄대한민국 대사는 “이제 분명한 것은 ‘때가 되었다. 장군님의 고혼을 하루빨리 조국의 품에 모셔 와야 할 때가 되었다’는 점입니다. 올해가 서거 75주년이고, 내년이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이 되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고 생각합니다”라고 강조했다.

조환래 홍범도함 함장은 ‘홍범도 장군님께 드리는 편지’에서 “봉오동 전투 승전 98주년이 되는 2018년은 과거와 다른 특별한 의미가 있는 해입니다. 장군의 이름으로 명명된 홍범도함이 해군에 인도되어 전력화 훈련을 마치고 실전배치가 되는 해이기 때문입니다. 홍범도함 승조원은 만주지역에서 압도적인 무력을 앞세운 일본군을 뛰어난 전략과 전술로 격퇴하신 홍범도 장군의 불굴의 의지를 계승하고자 합니다. ‘최정예 필승 잠수함, 절대강자 홍범도함’이라는 구호 아래 실전적 교육훈련을 통해 세계 최고의 잠수함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이러한 노력은 장군의 마음이 그러했듯이 대한민국의 수호자로써 국민들을 지켜줄 것입니다.”라고 밝혔다.

육군사관학교 정진경 교장(왼쪽)은 7일 봉오동전투 전승 제98주년 기념 국민대회에서 홍범도 장군에게 명예졸업증서를 추서하고 이종찬 여천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이사장에게 전달했다. [사진=김경아 기자]
육군사관학교 정진경 교장(왼쪽)은 7일 봉오동전투 전승 제98주년 기념 국민대회에서 홍범도 장군에게 명예졸업증서를 추서하고 이종찬 여천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이사장에게 전달했다. [사진=김경아 기자]

이날 봉오동전투 전승 제98주년 기념 국민대회에 참석한 육군군사관학교 정진경 교장은 홍범도 장군에게 육군사관학교 명예졸업장을 추서했다. 졸업증서는 정진경 교장의 명의로 “귀하께서는 독립군의 일원으로써 조국의 자주 독립을 위해 고귀한 희생을 다하셨으며, 특히 독립전쟁 중 몸소 보여주신 숭고한 애국심과 투철한 군인정신은 위국헌신 군인본분의 길을 걷고자 하는 사관생도들에게 참다운 군인의 귀감이 되었으므로 이에 육군사관학교 학칙에 따라 명예졸업증서를 드립니다.”라고 적었다.

홍범도 장군에게 육군사관학교가 명예졸업장을 추서한 것은 대일항쟁기 자주 독립국가를 세우기 위하여 싸웠던 의병, 독립군, 광복군의 전통을 우리 군이 분명히 계승하고 군의 뿌리로 삼겠다는 의미이며 홍범도 장군과 독립전쟁의 위업을 계승하겠다는 확고한 각오를 보인 것으로 볼 수 있다.

종로구립합창단이 육군사관학교 군악대의 반주에 맞춰 축가로 ‘날으는 홍범도가’와 ‘독립군가’를 부르고, 이어 참석자 모두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합창하여, 봉오동전투 전승이 남북통일로 이어지기를 기원했다.

서울역사박물관 강당에서 7일 열린 봉오동전투 전승 제98주년 기념 국민대회에서 종로구립합창단이 '날으는 홍범도 장군가'와 '독립군가'를 합창했다. [사진=김경아 기자]
서울역사박물관 강당에서 7일 열린 봉오동전투 전승 제98주년 기념 국민대회에서 종로구립합창단이 '날으는 홍범도 장군가'와 '독립군가'를 합창했다. [사진=김경아 기자]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끈 여천 홍범도 장군은 누구인가? 문준진 여천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사무총장이 보고한 연혁에 따르면 홍범도 장군은 1868년 8월 27일 평양에서 출생하였다. 1882년(14세)부터 대한제국군 평양진위대에 근무하던 중 1884년 부대를 이탈하고 황해도 수안에서 제지공으로 취업했다. 2년 후 친일 지주를 처단하고 묘향산 보현사로 들어갔다, 이듬해인 1887년 19세에 금강산 신계사로 피신하여 이곳에서 이순신장군의 직손 지담 대사를 상좌승으로 하고 민족혼과 단군역사의 가르침을 받았다.

23세가 된 1891년 이옥구 여사와 결혼하여 함흥 북청으로 이주하였다. 2년 후 처가인 삼수로 이거하여 출중한 사격술을 인정받아 안산사 포계에 가입, 포연대장으로 선출되어 삼수, 갑산, 풍산, 북청 일대에서 안정된 상포수 생활을 하였다. 1097년(39세) 안산사 포계의 회원들과 함께 일제의 총포화약류단속법을 거부하고, 갑산에서 무장 항일의병대를 조직하고, 함경도 후치령에서 일본군을 섬멸했다. 1년후 일제의 고문으로 부인 이옥구 여사가 순국하고, 아들 홍양순은 정평 바베기 전투에 참전하여 전사했다.

홍범도 장군은 1909년 이상설 선생과 함께 대종교 노령북도 총본사 지도사로 취임하고, 1910년에는 대종교 교우 임시정부 참회군정 계연수 장군, 광복군 총영장 오동진 장군과 배달민족의 역사서 '환단고기'를 편찬했고 이는 오늘날 우리 고대역사 연구의 중요한 자료이다.

1911년 노령 블라디보스톡 신한촌에서 항일단체 권업회를 조직하고 부회장에 취임했으며 48세인 1916년 만주 장백현에서 대종교 제3대 지도자 단애 윤세복 선생과 만주 전 항일무장단체를 연합하여 최초 만주 독립군의 모체인 포수단을 창설했다. 1918년 노령에서 대종교 교우 김좌진, 박은식, 이동녕, 신채호, 윤세복, 이시영 등과 조선독립은 오로지 무장투쟁으로만 쟁취할 수 있다는 ‘무오독립선언서’를 채택하였고, 이는 국내 3·1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 1919년 대한독립군을 창설, 총사령관으로 취임했다. 이때 나이 51세.

1920년 5월 홍범도 장군은 최진동의 도독부, 안무의 국민회군과 연합하여 ‘대한북로독군부’를 결성하고 북로 제1군사령부 부장을 맡았다. 6월 7일 대한북로독군부 사령부장으로 700여 명의 독립군을 지휘하여 봉오동에서 일본군 월강부대를 섬멸했다. 10월에는 백야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와 함께 청산리 전투에서 승리했다. 11월에는 만주 밀산으로 이동하여 대종교 지도자 백포 서일 장군과 만주 전 독립군 연합체이며 광복군의 전신인 대한독립군단을 창설, 부총재에 취임했다.

53세인 1921년 6월 러시아 자유시에서 일·러군의 공작에 의한 대한독립군의 상호 분열로 동족상쟁이 발생하여 자유시참변이 일어났다. 이후 대한독립군은 러시아 홍군으로 편입되어 일크츠크로 이동했다. 홍범도 장군은 1922년 모스크바 크레믈린 궁에서 노령 항일지도자 이동휘와 함께 레닌과 회담, 모젤 권총과 금화 100루불을 수령했다. 56세인 1924년 홍범도 장군은 러시아 이만, 수정에서 동포를 위한 협동농장을 주도하면서 농업에 종사하였고 1929년 61세에 러시아에서 이인복 여사와 재혼했다.

스탈린 강제 이주정책으로 1937년 69세의 나이로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으로 강제이주하여 그곳에서 크즐오르다 극장의 수위로 근무했다. 1943년 조국 광복을 보지 못하고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에서 서거하였다. 향년 75세.

정부는 1962년 홍범도 장군에게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2013년 홍범도 장군 서거 70주년 추모식이 카자흐스탄 현지에서 관민합동으로 개최되었다. 대한민국 해군에서는 2016년 최신예 잠수함 ‘홍범도함’을 진수하고, 육군사관학교에서는 2018년 독립전쟁의 영웅으로 홍범도 장군 흉상을 제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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