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보에 싸인 두 아들을 병정이라 부른 25살의 윤봉길
강보에 싸인 두 아들을 병정이라 부른 25살의 윤봉길
  • 강나리 기자
  • heonjukk@naver.com
  • 승인 2018.05.02 2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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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황길수 회장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 “사나이가 뜻을 세워 집을 나가면 뜻을 이루지 않고서는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 매헌 윤봉길 의사가 23살 때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떠나는 길 남긴 편지의 글귀이다.

상해 의거를 앞두고 기념촬영을 한 윤봉길 의사(당시 25세)와 그가 23세 때 망명길에 쓴 출사표 '장부출가생불환' [사진=매헌기념관 홈페이지]
상해 의거를 앞두고 기념촬영을 한 윤봉길 의사(당시 25세)와 그가 23세 때 망명길에 쓴 출사표 '장부출가생불환' [사진=매헌기념관 홈페이지]

지난 4월 29일은 매헌 윤봉길 의사의 상해 의거 86주년이었다. 1932년 그날, 윤 의사는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이자 상해사변을 일으켜 중국 점령의 교두보를 마련한 일본의 전승기념식이 열리는 중국 상해 루쉰(홍커우)공원에서 폭탄을 투척했다. 이날 일본 상해파견군 사령관 시라카와(白川義則)와 일본 거류민단장 가와바타(河端) 등을 즉사시키고, 일본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野村吉三郞), 제9사단장 우에다(植田謙吉), 주중일본공사 시게미쓰(重光葵) 등에게 중상을 입혔다.

사람들은 대개 윤봉길 의사는 ‘도시락 폭탄’으로 기억하고 있다. 실제 수통 폭탄을 던졌고, 의거 후 자살용이던 도시락 폭탄이 터지지 않아 윤 의사가 현장에서 체포되었는데도 말이다. 윤 의사를 한 순간 의기에 넘쳐 폭탄을 던진 젊은이로만 기억해도 될까?

지난 4월 29일 윤봉길 의사 상해의거 86주년을 맞아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내 삼의사 묘역에 안장된 윤봉길 의사 묘에 참배를 마친 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황길수 회장. [사진=강나리 기자]
지난 4월 29일 윤봉길 의사 상해의거 86주년을 맞아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내 삼의사 묘역에 안장된 윤봉길 의사 묘에 참배를 마친 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황길수 회장. [사진=강나리 기자]

지난 29일 상해의거 86주년 기념식을 마치고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 삼의사 묘역에서 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황길수 회장을 만났다. 황 회장은 하루 전날인 28일 오전 10시(현지시간) 의거현장인 상해 루쉰공원 매헌기념관 광장에서 한‧중 공동 기념식을 거행했다는 사실을 먼저 이야기했다. 이날 한국 측 행사단장인 기념사업회 김달수 부회장을 비롯한 회원들과 상하이 박선원 총영사와 교민들이 참석했고, 중국 측에서는 오근명 정협 상하이 홍커우구(虹口區) 부주석을 비롯한 홍커우구 국제교류센터 직원을 포함해 200여 명이 참석했다.

지난해 한국 내 사드배치 문제로 한‧중 간 냉각 기류 속에 정치, 경제, 문화 등 모든 분야의 공동행사, 공동 학술회의가 중지된 때에도 윤봉길 의사 기념식만큼은 함께했다고 한다. 황 회장은 “중국인들은 윤봉길 의사를 일본으로부터 받은 굴욕을 대신 해결해준 영웅으로 기억한다. 윤 의사 의거의 역사적 가치와 의미, 자신들이 입은 은혜를 잊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일본의 계략인 만보산사건으로 갈라선 한국과 중국을 하나로 맺어준 윤봉길 의사

 

86년 전 당시 한국과 중국은 매우 첨예한 대립관계였다. 발단은 1931년 7월 중국 길림성 만보산 지역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만보산사건’은 일제의 폭압을 견디다 못해 만주로 이주한 한국인들이 농토를 개간하면서 척박한 땅에 농수로를 내면서 현지 중국인들과 땅 침범 문제로 분쟁이 일어나면서 시작되었다.

이때, 일본은 가짜뉴스를 만들어냈다. 한국인 기자를 매수해 “만보산사건으로 중국 관군 800명과 한국독립군 200여 명이 대충돌을 해서 한국군이 큰 피해를 입었다”고 국내에 타전했다. 이 가짜뉴스는 국내 모든 신문에 실렸고 총독부의 검열 없이 전국에 퍼졌다. 국내에는 반중감정이 끓어올랐고, 화교 106명이 살해되고 6천여 명이 중국으로 귀국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러면서 중국 내 반한감정도 극에 치달았다. 이주한 한국인들이 중국인에 의해 살해당하는 일들이 빈번히 일어났다. 처음 일본에 의해 강점된 조선을 향해 동정론을 펼치던 중국은 “조선인들이 일본 앞잡이가 되어 중국을 위협한다.”고 인식했다. 깊은 오해 속에 휘말려 양국은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일본은 31년 9월 만주에 놓은 철도를 스스로 폭파하고는 중국인들 짓이라며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지역을 점령했다. 또, 32년 1월 중국인을 사주해 일본승려살해 사건을 일으키고, 이를 빌미로 상해사변을 일으켜 승리했다. 상해가 중국으로 들어가는 입구였기에 당시 중국 장개석 총통도 완강하게 저항했으나 패퇴했다. 세계 최대 인구에 수많은 군인을 거느린 대국의 자존심도 무너지고 계속 일본에 밀려 속수무책인 상황이었다.

그때 윤봉길 의사의 상해 의거가 일어나자, 중국인들은 “그게 아니었구나!”라며 인식을 전환했고, 한국의 분명한 독립의지를 확인했다. 장개석 총통은 “중국군 100만 명이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젊은이가 해냈다.”고 칭송했고, 중국군은 열패감에서 벗어나 고무되었다. 장 총통은 고립무원 상태에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여 한중 공동 항일전선을 펴게 되었다. 또한 그는 1943년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상황을 논의하던 카이로회담에서 영국 처칠 수상과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을 설득해, 피지배국 중 유일하게 한국의 독립을 명시하는 조항을 넣게 했다.

지난 4월 28일 상해 의거 현장인 루쉰공원 내 매헌기념관 광장에서 열린 한‧중 공동 윤봉길 의사 의거 기념식 모습. [사진=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제공]
지난 4월 28일 상해 의거 현장인 루쉰공원 내 매헌기념관 광장에서 열린 한‧중 공동 윤봉길 의사 의거 기념식 모습. [사진=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제공]

윤 의사의 의거로 인한 중국정부의 지원은 임시정부를 페쇄 위기에서 건졌다. 임시정부 상태는 혼란 그 자체였다. 한일 병탄이 된 지 20여년이 지나고, 별다른 성과가 없는 상태에서 여러 분파로 나뉘었다. 또한 한‧중 간 대립으로 어디에도 발붙이기 힘든 상황이었다.

기념사업회 황길수 회장은 “김구 선생이 쓴 백범일지에 ‘거지소굴’이라고 표현되었다. 이리저리 옮겨 다니던 임시정부의 간판을 김구 선생이 직접 메고 다닌다는 이야기도 나왔다.”고 전했다. 임시정부는 의거 이후에도 해방 때까지 7번을 옮겨 다녔다. 임시정부의 안살림을 맡은 김구 선생의 어머니가 길에 버려진 배추 겉껍질을 골라 끓여 임정 식구들을 먹였다는 일화는 어느 정도 피폐했는지 알려주는 일화이다.

지난 29일 서울 양재동 매헌기념관에서 열린 상해 의거 제86주년 기념식 모습. [사진= 김경아 기자]
지난 29일 서울 양재동 매헌기념관에서 열린 상해 의거 제86주년 기념식 모습. [사진= 김경아 기자]

황 회장은 “1930년대부터 한국과 중국이 유대를 맺을 수 있었던 것은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역할을 했다. 역사적으로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또한 그는 “초‧중‧고 학생과 대학생, 성인까지 윤 의사를 잘 모른다. 상해에서 도시락 폭탄을 던진 사람이라고만 안다. 역사에서 오늘 무엇을 배워 내일 무엇을 할 것인지 역사적 의미를 잘 파악하고 전하고 발전하는 측면에서 소홀하다.”며 윤 의사의 교육자이자 계몽운동가로서의 면모와 깊은 철학과 사상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윤봉길 의사의 교육자, 농촌계몽가, 사상가로서의 면모 알려져야

 

윤 의사는 어려서부터 5시간 이상 자지 않았고 학문에 정진했다고 한다. 한학을 배우다 1918년 덕산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일본인으로 만들려는 식민교육을 거부하고 3‧1운동 이후 자퇴했다. 학교는 1년밖에 다니지 않은 셈이다. 그러나 한학과 한시에 조예가 깊고, 시대가 요구하는 신사조와 신학문도 배웠다. 한학에서 배울 수 없는 민족정신, 저항정신을 신학문, 신조류를 찾아 익혔고 자신이 배운 것을 강연을 통해 전하려는 개혁가였다. 농민을 무지와 가난에서 벗어나게 하고자 야학운동, 계몽운동을 했다. <농민독본>이란 교재를 집필했고, 농촌 발전을 위해 부흥원이라는 단체를 설립했다. 그러다 부흥원 주관으로 촌극 ‘토끼와 여우’를 공연했는데, 문화 활동이 많지 않은 당시 많은 사람이 관람해 성황을 이뤘다. 이것이 원인이 되어 일본 경찰의 주목을 받고 감시를 당했다.

일제의 감시와 억압 속에 윤 의사는 계몽운동만으로 부족함을 느꼈다. 1930년대가 되니 3‧1운동 때와 같은 독립의지는 많이 꺾였다. 현실에 영합해 그 체제 내에서 출세를 해야겠다는 사람들도 나오고, 독립운동을 한다던 사람들도 투항했다. 윤 의사는 임시정부를 찾아 중국으로 떠났고, 김구 선생을 만나 의거를 일으킴으로써, 꺼져가는 독립의 불씨를 다시 일으켰다.

기념사업회 황길수 회장은 “윤 의사가 23세에 중국으로 떠날 때 쓴 ‘장부출가생불환’은 동서고금에 비춰볼 때 이토록 짧은 글에 결연한 의지를 담은 글이 드물다.”며 “우리 국민은 이 출사표를 마음에 새겨야 한다. 우리는 고난과 역경 속에 살아왔고, 앞으로도 많은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세계지도를 놓고 볼 때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이 부딪히는 접점에 있어 어려운 위치이다. 윤 의사와 같은 결의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했다.

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황길수 회장. [사진=강나리 기자]
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황길수 회장은 "우리도 윤봉길 의사의 출사표 '장부출가생불환'을 마음에 새겨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진=강나리 기자]

또 황 회장은 다섯 형제 중 맏아들이 부모와 처자식을 두고 떠난 후 돌아오지 않고 위험한 일을 할 것을 염려한 어머니의 편지에 답한 윤 의사의 답장을 사례로 들었다. 윤 의사는 답장에서 “사람은 왜 사느냐. 이상을 이루기 위하여 산다. …(중략) 우리 청년시대에는 부모의 사랑보다 형제의 사랑보다 처자의 사랑보다도 더 한층 강의(剛毅)한 사랑이 있는 것을 깨달았다. 나라와 겨레에 바치는 뜨거운 사랑”이라고 했다.

황 회장은 “사람은 왜 사느냐는 철학적 고민을 한 것이다. 중국 망명이 오랜 고민과 묵상한 결과로 나온 것이다. 나라와 겨레에 바치는 ‘강의한 사랑’이란 말 속에 그 분의 철학이 함축되어 있다. 조국을 구하겠다는 그의 강의한 사랑이 당시 지도에서 사라진 대한민국 역사를 바꾸어 놓았다. 깊은 철학과 사상을 가진 윤봉길 의사의 본질에 대해서도 교육이 되었으면 한다.”고 강조했다.

황 회장은 “그 답장은 어머니에게 아들로서 하기 어려운 말이고, 그 답장을 받은 어머니가 얼마나 마음이 아팠겠는가?”라며 “이런 개인의 아픈 역사를 다 초월해서 우리 역사가 이루어진 것”이라고 했다.

최근 기념사업회는 매헌기념관 내 상설전시관을 리모델링한다. 황 회장은 “1988년 개관한 이후 30년이 다 되어 낡았다. 30년이 지나 전시기법도 발전하고 디지털 등 첨단기기 등이 개발되어 좀 더 공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해 전시방법과 전시물 종류를 다양화하려 한다. 6월 중순 경 재개관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끝으로 그는 목숨을 바쳐 나라를 구한 선열에 관해 “영웅을 영웅답게 대접하고, 우리가 오늘 무엇을 배워 내일 무엇을 할 것인가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윤봉길 의사의 일대기와 그가 남긴 어록들, 특히 거사 이틀 전 어린 두 아들에게 쓴 ‘강보에 싸인 두 장정에게’ 등은 우리에게 깊은 감동을 남긴다. 또한 거사 당일 젊은이를 사지死地로 보내며 가슴 아파하는 김구 선생을 위로하며 맞바꾼 윤 의사의 회중시계 일화 등은 우리가 꼭 기억할 일이다.

현재 교육현장에서 이루어지는 역사교육이 딱딱한 틀에 갇혀 학생들은 흥미를 잃고 외면한다는 반성이 터져 나온 지 오래되었다. 기자는 사단법인 국학원이 2002년 설립 후 꾸준히 개최하는 민족혼 교육을 몇 차례 취재한 적이 있다.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의 편지, 윤봉길 의사의 어록을 절절하게 낭독하고, 그들의 생생한 일화를 전하는 강의가 새로웠다. 교육생들이 스스로 역사를 찾고 전하는 국학강사가 될 만큼 공감을 이끌어내는 힘도 컸다. 이제 역사교육도 ‘많이 알게 하는 지식교육’에서 ‘배움을 즐기며 공감하는 교육’으로 전환할 필요가 있겠다.

 

윤봉길 의사의 어록 中

“사람은 왜 사느냐.

이상을 이루기 위하여 산다. 보라,

풀은 꽃을 피우고 나무는 열매를 맺는다.

나도 이상의 꽃을 피우고 열매 맺기를 다짐하였다.

우리 청년시대에는 부모의 사랑보다 형제의 사랑보다

처자의 사랑보다도 더 한층 강의(剛毅)한 사랑이 있는 것을 깨달았다.

나라와 겨레에 바치는 뜨거운 사랑이다.

나의 우로와 나의 강산과 나의 부모를 버리고라도

그 강의한 사랑을 따르기로 결심하여 이 길을 택하였다.”

 

강보襁褓에 싸인 두 병정兵丁 모순(模淳) 담(淡)에게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해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 잔의 술을 부어 놓아라.

그리고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아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

어머니의 교양으로 성공한 자를 동서양 역사상 보건대

동양으로 문학가 맹자가 있고

서양으로 프랑스의 혁명가 나폴레옹이 있고

미국에 발명가 에디슨이 있다.

바라건대 너희 어머니는 그의 어머니가 되고

너희들은 그 사람이 되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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