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한국 독립군! 조국을 찾는 용사로다. 나가! 나가! 압록강 건너 백두산 넘어가자! (중략) 동포는 기다린다. 어서 가자! 고향에. 어서 가자 조국에~” 광복군들이 불렀던 압록강 행진곡으로, 작사가 박영만도 광복군이었다.

지난 29일, 한국광복군 무후선열 17위가 모셔진 서울 강북구 우이동 수유묘전에서 합동추모제가 있었다. 이 묘역에 안장된 이들은 1940년∼1945년까지 중국 각 지역에서 일본군과 싸우다 순국하신 광복군으로, 후손을 남기지 못한 무후선열 17위를 모셔 1967년 광복군동지회에서 묘소를 조성하였고 1985년 8월 15일 국가보훈처에서 단장했다.

지난 29일 개최된 한국광복군무후선열 추모제전. 후손이 없어 제사를 지내지 못하는 광복군 선열에 대한 제사를 매년 5월에 지낸다. [사진=강나리 기자]
지난 29일 개최된 한국광복군무후선열 추모제전. 후손이 없어 제사를 지내지 못하는 광복군 선열에 대한 제사를 매년 5월에 지낸다. [사진=강나리 기자]

취재차 주최단체인 사단법인 한국광복군동지회(이하 동지회)를 찾으니, 공식 홈페이지가 없고 전화번호조차 114에 등록되지 않았다. 국가보훈처에 문의하니 보훈기념사업팀에서 비로소 동지회 간사의 연락처를 받을 수 있었다. 행사장소인 수유묘전도 포털에서 쉽게 검색되지 않았고, 택시기사조차 알지 못했다.

통일원 인근 북한산둘레길 2구간 순례길의 종착지인 이준 열사 묘역 또는 근현대사기념관 인근에서 찾아들어갈 수 있었다. 숲길을 따라 100여 미터를 들어가다 보니, 90세 후반인 광복군동지회 회원들이 노구를 이끌고 갈수가 없어 추모제에 참석치 못한다는 것이 이해되었다.

17위 묘역에는 봉분과 제단, ‘광복군선열지묘’라고 새겨진 비석, 그리고 광복군 전사상이 있었다. 동지회 박소영 간사는 “그동안 묘소와 비석만 있었는데, 강북구청에서 올해 전사상을 세우고 잔디로 단장을 해서 다행”이라며, “전사상을 국가현충시설로 등재 요청하여 승인을 받았다.”고 전했다.

서울 강북구 우이동 수유묘전 광복군 무후선열 17위 묘역에 올해 강북구청이 세운 광복군 전사상. 국가현충시설로 지정되었다. [사진=강나리 기자]
서울 강북구 우이동 수유묘전 광복군 무후선열 17위 묘역에 올해 강북구청이 세운 광복군 전사상. 국가현충시설로 지정되었다. [사진=강나리 기자]

대한민국 국군의 날은 법통을 계승한 임시정부 정규군인 광복군 창군일이 되어야

박 간사는 “현재 국군의 날인 10월 1일은 동족상잔인 6‧25사변 때 북측으로 진격한 날”임을 지적하며, “광복군 창군일을 국군의 날로 해야 하지 않겠나?”고 호소했다. 그는 “우리 헌법 전문에는 대한민국이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했다고 되어 있다. 그렇다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규군이 오늘날 대한민국 국군의 전신”이라고 했다.

추모제전에 참석한 광복회 나중화 부회장은 광복군을 ‘대한제국군과 대한독립군을 정통 계승하여. 현재 국군에 이르는 가교’라고 표현했다.

한국광복군 제3지대 김학규 지대장의 아들 김일진 광복회 대의원. [사진=강나리 기자]
한국광복군 제3지대 김학규 지대장의 아들 김일진 광복회 대의원. [사진=강나리 기자]

이날 추모제전에서 제문을 봉독한 이는 광복군 제3지대장 김학규 장군의 아들 김일진 광복회 대의원이었다. 김일진 대의원은 생전 아버지께서 광복군 활동 당시 상황에 관해 “잠을 제대로 자지도 못하고 먹을 것이 없었다. 감자 1~2개로 며칠을 버틸 때도 많았는데, 장군, 대장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군복은 중국군에게서 받아서 입었다. 그나마 윤봉길 의사 의거이후, 중국 측이 임시정부를 지원을 하면서 가능했던 것이다. 그전에는 만주의 혹한 속에서 짚신에 헝겊을 둘둘 감아 눈밭을 걸으며 전투를 할 수 밖에 없었다.”고 들었다.

한국광복군은 1940년 9월 17일 중국 충칭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규군으로 조직되었다. 1941년 12월 8일 일본의 진주만공격으로 미일 양국 간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이틀 후인 10일 일본에 대일선전포고를 했다. 한국광복군은 중국 각지의 전선에서 중국국과 연합하여 치열한 전투를 벌였고, 미영연합군과 함께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멀리 인도와 미얀마 전선까지 파견되었고, 항일투쟁의 최전선에 배속되어 대일전을 수행했다.

광복군동지회가 1967년 조성한 광복군무우선열 묘역 조성에 관한 기록. [사진=강나리 기자]
광복군동지회가 1967년 조성한 광복군무우선열 묘역 조성에 관한 기록. [사진=강나리 기자]

본래 광복군은 5지대까지 있었고, 학병들이 각각 2지대와 3지대에 흡수되었다. 중국 각 전선에서 활동하며 인원이 적은 4, 5지대가 1지대 김원봉 장군, 2지대 이범석 장군, 3지대 김학규 장군 산하로 모였다. 이들은 미국OSS 특수부대와 연합하여 1945년 국내진공작전(8월29일)을 계획했으나, 8월 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김일진 대의원은 “국내진공작전을 준비하던 광복군들은 ‘우리가 최전선에서 희생을 하면 독립이 될 것’이라는 애끓는 각오였다”며 “우리 임시정부가 없고, 광복군이 없었다면 얄타회담, 카이로회담에서 독립을 보장받지 못하고 일본의 속국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을 것”고 했다.

그는 “아버지 김학규 장군은 국내에 들어와서 김구 선생을 모시고 대한독립당(한독당) 조직부장을 맡았다. 1948년 김구 선생이 저격당했을 때, ‘한독당 내분’설이 돌았고, 암살자 안두희를 한독당에 입당시킨 게 누구냐는 문제가 불거졌다. 아버지는 당시 포병이던 안두희가 군대 내에서 한독당의 입지를 넓혀줄 인재로 잘못 알고 입당허가를 했었다. 아버지는 군법재판에서 15년의 형을 받아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다. 광복군들은 귀국 후 국내에 기반 없이 생계를 잇기 위해 어려움도 겪고 있었고, 그 사건으로 인해 서로 모이지 못하고 흩어졌다. 아버지가 4‧19의거 때 사면복권이 되면서 광복군들이 모였고, 1967년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사회장을 치렀다.”고 했다.

한국광복군 무후선열 17위 묘소. 산 중턱에 있어 한국광복군동지회 회원들이 찾기가 어려워 추모제전에 참석치 못한다고 한다. [사진=강나리 기자]
한국광복군 무후선열 17위 묘소. 산 중턱에 있어 한국광복군동지회 회원들이 찾기가 어려워 추모제전에 참석치 못한다고 한다. [사진=강나리 기자]

같은 해, 광복군 동지들은 후손이 없어 제사조차 제대로 지내지 못하는 광복군 17위 (당시 19위였다가 두 분은 국립현충원으로 이장되었다)의 유골 또는 유품을 모셔 수유묘전을 조성했다.

김일진 대의원은 “광복군 동지회 21분이 다 돌아가시면 광복군의 흔적은 없어지는 것이다. 청춘도, 안락도 버리고, 부모형제도 버리고 오직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희생했지만, 끝내 조국 땅에 첫발도 딛지 못했던 이들의 역사와 피 끓는 나라사랑을 우리가 잊으면 안 된다.”며 “광복군 유족회를 만들기 위해 20~30년 전부터 노력하는 데 쉽지 않다. 연세들도 많고 모두 먹고 살기 힘드니까.”라고 답했다.

그는 “묘역 조성 당시에는 청장년이던 광복군동지회 회원들도 이제 95세에서 99세시다. 유족회 결성에 관해 말씀드리면 ‘우리가 죽으면 끝내자’는 분도 있고, ‘후손에게 광복군의 역사와 정신을 넘겨주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분도 있어 두 갈래로 나뉘어 있다.”며 안타까움을 전했다.

광복군선열지묘라고 새겨진 비석의 뒷면. 추모시와 이곳에 모신 한국광복군 17위 명단이 적혀 있다. [사진=강나리 기자]
광복군선열지묘라고 새겨진 비석의 뒷면. 추모시와 이곳에 모신 한국광복군 17위 명단이 적혀 있다. [사진=강나리 기자]

광복군 무후선열묘역 내 ‘광복군 선열지묘’라고 새긴 비석 뒤편에는 시 한수와 명단이 적혀있었다.

“비바람도 찼어라. 나라 잃은 나그네야. 바친 길 비록 광복군이었으나 가시밭길 더욱 한이었다. 순국하고도 못 잊었을 조국이여 꽃동산에 뼈나마 여기 묻히었으니 동지들아 편히 잠 드시라.”

그곳에 스무 살에서 서른세 살까지 짧은 삶을 조국의 광복을 위해 바친 이들이 묻혀 있었다. 17위 중 16위는 건국훈장 애족장 또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김찬원(1917. 1 ~ 1945. 8.17) ▶문학준(1910.7~1943. 8) ▶이해순(1919. 3.11~1945. 8.17) ▶김성률(1920. 4~1943. 9) ▶현이평(미상 ~ 1941) ▶김유신(1916 ~ 1943) ▶백정현(1920. 12.17 ~ 1944. 4) ▶김운백(1921. 8. ~ 1943. 9) ▶한휘 ▶전일목(1920. 6. ~ 1945. 8.17) ▶이도순(1907. 7. ~ 미상) ▶동방석(1921. 2. ~ 1971. 1.21) ▶정상섭(1921. 2 ~ 1943. 9) ▶이한기(미상 ~ 1943. 7) ▶안일용(1921. 10~1943. 5) ▶김순근(1925. 3. 1 ~ 1945) ▶조대균(미상~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