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군 창설을 주도한 미군정은 물론 건군과정에 참여한 일본군 출신 장성들도 대한민국 건군의 주체는 한국광복군이어야 한다고 했다. 이것이 민족의 일반적 정서였기 때문이다.”

지난 17일 백범김구기념관에서 한국광복군 창군 제78주년 기념식과 함께 열린 학술강연회에서 단국대학교 한시준 교수는 ‘대한민국 국군의 뿌리, 어디서 찾아야 하나’를 주제로 한 강연에서 이와 같이 밝혔다.

피우진 국가보훈처장, 박유철 광복회장, 이영수 한국광복군동지회장을 비롯해 시민 12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한시준 교수는 대한민국 국군의 창설과정과 뿌리 인식, 그리고 국군 창설의 정신적‧인적‧역사적 근거를 차례로 설명했다.

지난 17일  서울 백범김구기념관에서 열린 '한국광복군 창군 제 78주년 기념식 및 학술강연회'에서 대한민국 국군의 뿌리가 한국광복군임을 피력하는 한시준 단국대학교 교수. [사진=강나리 기자]
지난 17일 서울 백범김구기념관에서 열린 '한국광복군 창군 제 78주년 기념식 및 학술강연회'에서 대한민국 국군의 뿌리가 한국광복군임을 피력하는 한시준 단국대학교 교수. [사진=강나리 기자]

한 교수는 국군의 뿌리에 관한 잘못된 인식에 관해 조명했다. 그는 “1956년 국군의 날 제정이전, 육‧해‧공군이 각기 창군기념일을 지정했다. 그런데 육군은 조선국방경비대 창설일로, 해군은 해방병단 창설일로, 공군은 육군에서 분리 독립된 날로 했다. 모두 해방 이후로 보았다. 국군 창군 50주년 책자조차 국군의 뿌리를 국방경비대로 기재했다.”며 “1956년 제정한 국군의 날도 6‧25전쟁 때인 1950년 10월 1일 육군 제3사단 23연대 3대대가 38선을 돌파해 북진한 것을 기념하고 있다.”며 국군의 정통성과 멀어진 점을 지적했다.

한 교수는 국군창설과정과 관련하여 “미군정은 ‘뱀부(Bamboo) 계획’이란 이름으로 건군계획을 세웠고, 미소공동위원회에서 소련 측 항의를 받자, 국방사령부를 통위부라고 명칭을 바꾸어 건군과정을 진행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함께 미군정은 행정권을 이양하고, 이어 군사권도 이양했다. 1948년 12월 15일 통위부는 국방부로, 조선경비대는 육군, 조선해안경비대는 해군으로 정식 편입되었다.”고 설명했다.

한시준 교수는 국군의 정통성이자 뿌리를 한국광복군에 두는 근거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첫째, 해방 후 가장 먼저 군대 창설을 준비한 것은 일본군 출신이었으나, 이들조차 일본군 출신이 나설 수 없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광복군의 명령에 따라 군대를 창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을 대변한 일본군 육사 출신 이응준 장군은 “어제까지도 일본군 고급장교 신분이었던 사람으로 조국이 해방되었다 해서 세상 표면에 나서서 날뛴다는 것은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 일”이라 했고, 김석원과 신태영도 “임시정부가 입국하고 광복군사령관의 명령이 있을 때까지 조용하게 근신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당시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광복군은 귀국 전이었으며, 1946년 5월 광복군이 정식 해체되고 6월 입국했다.

둘째, 건군작업을 주도하던 미군정 당국자들도 광복군 출신을 전면에 내세우고자 했다. 미군정 버나드 대령은 초대 통위부장 선임을 위해 광복군 총사령관 이청천 장군을 만났다. 그러나 해방 후 중국 내 교포의 보호와 귀국, 그리고 일본군에 끌려나왔던 한인청년들을 광복군으로 편입시켜 광복군의 조직과 병력을 확대하는 확군 활동을 책임진 이청천 장군의 임명이 어려웠다. 대신 미군정은 임시정부 참모총장을 지내고, 독립군과 광복군의 대표적 인물인 유동열 장군을 통위부장으로 선임했다.

한국광복군 창군 기념식 및 학술회의에 참석한 주요인사들.  피우진 국가보훈처장(앞줄 중앙)과 왼쪽 광복회 박유철 회장, 오른쪽 한국광복군동지회 이영수 회장 등. [사진=강나리 기자]
한국광복군 창군 기념식 및 학술회의에 참석한 주요인사들. 피우진 국가보훈처장(앞줄 중앙)과 왼쪽 광복회 박유철 회장, 오른쪽 한국광복군동지회 이영수 회장 등. [사진=강나리 기자]

“국군의 날을 국군의 뿌리와 관련된 ‘광복군 창설일(9월17일)’로 해야”

셋째, 1948년 정부수립 후 초대 국방부장관은 이범석 장군으로, 결국 대한민국 군사권이 광복군 출신에 의해 광복군 출신으로 넘겨진 셈이다. 일본군, 만주군과 함께 건군작업에 참여하는 것을 꺼리던 광복군 대원들도 정부 수립 후 적극 참여했으며, 육군사관학교 교장도 초기 일본군 출신에서 광복군 출신으로 바뀌었다.

한시준 교수는 “대한민국이 1948년 8월 15일 정부수립으로부터 시작되었다며 광복절을 건국절로 바꾸려는 시도가 있다.”고 지적하며 “그러나 헌법을 통해 대한민국 정부는 1919년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했다고 천명했다. 국군도 한국광복군 계승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피력했다.

한 교수는 결론으로 “국군의 사기와 정체성을 위해 국군의 뿌리에 대한 인식을 명확하게 정립할 필요가 있다. 건군의 주체와 정신적 연원은 광복군에서 찾아야 한다. 이제 국군의 날을 국군의 뿌리와 관련된 날로 제정해야 한다.”며 국군의 날을 광복군 창설일인 9월 17일로 바꿀 것을 제안했다.

강연 후 참석자와의 질의응답에서 한 교수는 “광복군 창설 당시 조소앙 선생은 경과보고에서 ‘광복군을 새로 만들었다’고 하지 않았다. 1907년 해체된 대한제국군과 의병, 곳곳에서 일제에 저항해 무장 투쟁한 독립군들을 포함한 것이 바로 한국광복군”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