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강령으로 대한민국의 미래상을 제시한 임시정부 최고의 이론가이자 삼균주의의 독립 국가를 꿈꾸었던 독립운동가 조소앙 선생을 기리고자 ‘조소앙선생 일가 독립운동가 14위 합동추모제’가 오는 26일, 경기 양주 조소앙기념관에서 열린다.

임시정부 활동 등의 공로로 대한민국장을 서훈 받은 조소앙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해 임시헌장과 임시의정원법을 기초하고 외무부장, 임시 의정원의장 등을 역임했다. 조소앙 선생은 개인과 개인,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 간에 완전한 균등(均等)을 실현하기 위해 정치적, 경제적, 교육적 균등을 실현하겠다는 삼균주의를 창안해 독립운동의 대동단결 이념과 임시정부의 지도이념으로 정립시켰다. 외무부장으로서 선생은 카이로선언과 포츠담선언을 통해 세계로부터 독립을 보장 받는데 큰 역할을 했다.
 

1940년 5월 한국독립당 창당 직후 개최된 중앙집행위원회 기념사진. 앞줄 우측에서 두 번째가 조소앙 선생. [사진=국가보훈처]
1940년 5월 한국독립당 창당 직후 개최된 중앙집행위원회 기념사진. 앞줄 우측에서 두 번째가 조소앙 선생. [사진=국가보훈처]

선생은 1930년에는 상해 한국독립당을 비롯해 1935년 재건 한국독립당, 1940년 중경 한국독립당의 창당위원장 및 부위원장을 맡아 임시정부를 지지 후원했다. 1941년에는 대한민국건국강령을 기초하여 광복 이후 국가건설의 대강을 세웠으며, 해방 이후에는 자주통일 민족국가건설에 애쓰다 6‧25전쟁 중 납북되었다. 전시 하에서 가혹한 생활을 견뎌야 했던 그는 정치적인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회자되며 자유롭지 못했다.

그럼에도 김일성의 요구를 거부하고 납북인사들과 함께 독자적인 ‘중립화통일운동’을 전개한 선생은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최고위원을 역임했으나, 국제간첩으로 몰려 투옥되었다. 1958년 9월 10일 “삼균주의 노선의 계승자도 보지 못하고 갈 것 같아 못내 아쉽구나”, “독립과 통일의 제단에 나를 바쳤다고 후세에 전해다오” 라는 말을 남기며 순국한 그는 평양 남쪽 애국지사 묘역에 고이 잠들어 있다.

한편, 조소앙 선생의 가문은 그의 부인과 자녀, 6형제 등 14명이 독립운동 포상을 받아 독립운동 명문가로 알려졌다. 그의 형 조용하 선생은 미국에서 박용만 선생 등과 함께 대조선독립단·한인협회를 조직하였으며, 1918년 태평양시사를 창간 독립을 위한 외교·홍보활동을 전개하였다. 여동생 조용제 선생은 중국으로 건너가 한국독립당에 입당하여 군자금 모집에 앞장서고, 한국혁명여성동맹의 창립 요원으로 참여해 독립운동가 자녀들에게 우리말과 독립정신을 고취시켰다.

막내 동생인 조시원 선생은 한국광복군 창설 후 광복군 총사령부 부관 및 군법실장을 역임하며 항일 활동을 전개했다. 또한, 조소앙 선생의 아들 조인제는 1940년 한국광복군 창설 이후 총사령부 부관 1941년 광복군 제1지대 간부를 역임하는 등 광복 때까지 광복군으로 활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