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리역사바로알기는 서울지방보훈청이 후원하는 현충시설 활성화 사업의 일환으로 ‘청소년과 함께하는 현충시설탐방’을 매주 실시한다. 다섯 번째 탐방지는 서대문형무소역사관과 독립공원에 있는 현충시설로 6월 29일에 진행했다. 독립운동가들의 아픔을 가장 절절히 느낄 수 있는 현충시설로 평소에도 관람객들로 붐비는 곳인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 많은 학생과 학부모가 참석하였다.

(사)우리역사바로알기는  ‘청소년과 함께하는 현충시설탐방’으로 6월 29일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탐방했다. [사진=(사)우리역사바로알기]
(사)우리역사바로알기는 ‘청소년과 함께하는 현충시설탐방’으로 6월 29일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탐방했다. [사진=(사)우리역사바로알기]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은 일제가 항일의병 등 국권회복 운동에 앞장서는 우리 민족을 탄압하기 위해 1908년에 건립한 최초의 근대식 감옥이다. 덕치를 높이 평가했던 우리 조상은 감옥에 갇힌 죄수가 없는 것이 그 고을의 자랑이라 여겼다. 거대한 감옥이 필요하다는 것은 그만큼 세상이 잘못되고 있다는 반증일 것이다. 서대문형무소는 1988년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하여 의왕구치소로 옮길 때까지 80년의 세월동안 아픈 역사의 현장이었다. 나라를 찾겠다는 독립운동가들부터 시대의 아픔 속에서 민주화투쟁을 했던 사람들까지 많은 역사이야기가 있는 곳이다. 1998년 역사관으로 개관하여 교육의 현장으로 활용하며 2007년에는 국가보훈처에서 현충시설로 지정하여 국민에게 애국보훈정신을 선양하고 있다.

(사)우리역사바로알기가 6월29일 시행한 '청소년과 함께하는 현충시설탐방'으로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방문한 학생들이 냉난방이 되지않는 작은 옥사를 보고 있다. [사진=(사)우리역사바로알기]
(사)우리역사바로알기가 6월29일 시행한 '청소년과 함께하는 현충시설탐방'으로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방문한 학생들이 냉난방이 되지않는 작은 옥사를 보고 있다. [사진=(사)우리역사바로알기]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던 독립운동가들은 머리에 쓰는 용수와 손과 발을 채우는 수갑과 족쇄, 그리고 허리를 묶어두는 요 등으로 힘겨운 수형생활을 했다. 그뿐 아니라 형무소 지하에 있는 취조실과 고문실에서 끔직한 고문들을 당했다. 지하에는 고문하는 모형과 그 당시 사용했던 고문기구들이 전시되어 있어서 당시의 상황을 짐작해볼 수 있는 공간이 있다. 동영상에는 참혹한 고문을 견뎌냈던 독립운동가들의 생생한 증언이 상영되고 있었다. “일본 순사들은 한국 사람을 인간 취급도 안했고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학대했다.”라는 증언도 있다.

(사)우리역사바로알기의 '청소년과 함께하는 현충시설 탐방' 참가자들이 서대문형무소역사과 여옥사를 관람하고 있다. [사진=(사)우리역사바로알기]
(사)우리역사바로알기의 '청소년과 함께하는 현충시설 탐방' 참가자들이 서대문형무소역사과 여옥사를 관람하고 있다. [사진=(사)우리역사바로알기]

2층에는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던 5천여 명의 독립운동가들 수형표가 붙어있는 방이 있다. 특히 도산 안창호 선생의 수형표는 모두 3개가 있는데 옥중 생활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같은 인물임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몇 년 사이 초췌해진 모습을 볼 수 있어 안타까움을 더한다.

옥사와 격벽장은 가운데 한 명의 감시자가 동시에 여럿을 감시할 수 있는 부채꼴 형태인 팬옵티콘 구조로 되어있다. 3~5평 정도의 작은 감옥 안에서는 누울 수도 없어서 앉아서 잠을 잤다는 기록이 있을 만큼 많은 인원을 수감한 적도 있었다. 특히 1평 남짓한 독방도 있었는데 이곳은 협조하지 않는 독립운동가들을 고문하고 가둔 곳이었다. 빛이 들어오지 않는 방이라 ‘먹방’이라고도 불린 이곳에 수감되면 정신질환에 걸리기도 한다는 설명이 적혀 있었다.

큰 태극기가 걸려있는 옥사 벽면. [사진=(사)우리역사바로알기]
큰 태극기가 걸려있는 옥사 벽면. [사진=(사)우리역사바로알기]

청소년들이 탐방한 날에도 후텁지근한 날씨였는데 냉난방시설이 전혀 없었던 이런 감옥에서 어떻게 그 고문과 배고픔을 견딜 수 있었는지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옥사 밖에는 공작사라고 하여 전쟁물품이나 벽돌들을 만드는 공장이 있다. 백범 김구 선생의 기록에는 고문당한 몸으로 무거운 짐을 지고 하루 종일 형무소에서 노역을 하는 일이 무척 고통스러웠다고 했다. 그런데 김구 선생은 그런 상황 속에서 “저녁이 되면 일본순사의 고문이 끝나겠지 했지만, 밤을 새워 나를 고문하는 자를 보니, 남의 나라 먹겠다고 저렇게 밤을 새는데 나는 내 나라를 지키기 위해 밤새워 일했던 적이 있던가 자문하매 부끄러움에 눈물이 맺힌다.”라는 이야기를 하며 자신을 돌아보았다. 어떻게 저런 고통 속에서도 나라를 생각하고 나라를 위해 내가 어떤 일을 해야 할지를 먼저 생각할 수 있는지 큰 감동이 아닐 수 없다.

옥사 외부에는 커다란 태극기와 함께 독립운동가들의 사진이 걸려있다. 김구, 유관순, 윤봉길 등은 잘 알고 있지만 삼균주의를 주장했던 조소앙, 의열단 단장인 김원봉, 건국준비위원회를 만들었던 여운형 등은 못 알아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분들의 모습과 활동을 알고 기억해야겠다.

'청소년과함께하는 현충시설탐방' 참가자들이 3.1독립선언기념탑 앞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사진=(사)우리역사바로알기]
'청소년과함께하는 현충시설탐방' 참가자들이 3.1독립선언기념탑 앞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사진=(사)우리역사바로알기]

서대문형무소 아래에 있는 독립공원에는 3.1독립선언기념탑과 독립관이 현충시설로 지정되어 있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그날의 함성을 기억하며 다 같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쳐보았다.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이렇게 힘든 시간이 있었다는 것에 놀라는 학생들이 많았다. 학부모들도 그동안 말로만 들었던 독립운동의 현장인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처음 방문했다는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는 후기를 남겼다.

역사와 문화는 앉아서 책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직접 현장을 가보아야 가슴으로 느낄 수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현충시설탐방이었다. 형무소 밖의 세상은 너무나 평온했다. 이러한 평온한 일상을 맞게 해주신 순국선열들께 감사하는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