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 “내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 독립”
김구, “내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 독립”
  • 정유철 기자
  • npns@naver.com
  • 승인 2019.08.01 11: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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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훈처, 2019년 8월의 독립운동가로 김구 선생 선정

국가보훈처(처장 피우진)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김구(1876. 8. 29.~1949. 6. 26.) 선생을 2019년 8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고 밝혔다.

2019년 8월의 독립운동가 김구 선생. 국가보훈처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김구 선생을 2019년 8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사진=독립기념관]
2019년 8월의 독립운동가 김구 선생. 국가보훈처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김구 선생을 2019년 8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사진=독립기념관]

김구 선생은 1876년 7월 11일(양력 8월 29일) 황해도 해주(海州) 백운방(白雲坊) 텃골(基洞)에서 부친 김순영(金淳永)과 모친 현풍 곽씨(玄風郭氏) 낙원(樂園) 사이에 외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다른 이름으로 창암(昌巖), 창수(昌洙), 두래(斗來), 구(龜), 구(九)를 쓰고, 자는 연상(蓮上), 연하(蓮下), 호는 백범(白凡)이다.

선생은 1896년 국모를 살해한 원수를 갚기 위해 일본인 스치다를 살해하고 옥고를 치렀다. 1904년 신지식인을 길러내는 애국계몽운동을 펼치기 시작하였으며, 황해도 문화군 초리면(신천군 초리면)의 서명의숙(西明義塾)과 안악의 양산학교(楊山學校) 교사, 재령의 보강학교(保强學校) 교장 등을 지내며 교육 구국운동에 힘을 쏟았다. 또한 최광옥과 함께 해서교육총회(海西敎育總會)를 조직하여 학무총감(學務總監)에 추대되어 각 군을 돌며 계몽운동을 펼쳤다.

김구 선생 가족 사진(1921).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시절 촬영한 가족사진으로 왼쪽부터 김구, 큰아들 김인, 아내 최준례의 모습이 보인다. [사진=독립기념관]
김구 선생 가족 사진(1921).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시절 촬영한 가족사진으로 왼쪽부터 김구, 큰아들 김인, 아내 최준례의 모습이 보인다. [사진=독립기념관]

 

선생은 1910년 신민회에 가입하여 구국운동을 전개하다 1911년 일제에 붙잡혀 징역 2년 형을 언도받았고 안명근 사건에 연루되어 15년 형이 추가되어 옥고를 치르다 1915년 가출옥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선생은 중국 상하이로 망명, 대한민국임시정부 경무국장에 임명되어 일제가 보내는 첩자들을 가려내 처단하고 정부요인들과 동포들의 안정을 지켜내는 일을 수행하였다. 1931년에는 임시정부가 조직한 한인애국단을 맡아 일왕 처단(이봉창), 조선총독 처단(이덕주·유진식), 관동군사령관 처단(유상근·최흥식) 등을 지휘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일선전성명서對日宣戰聲明書(1941. 12. 10.).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태평양전쟁 발발 소식을 듣고, 연합군의 일원이 되어 전쟁에 참가할 것으로 결의했다. 이때 주석 김구는 외무부장 조소앙과 함께 대일선전성명서를 발표했다. [사진=독립기념관]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일선전성명서對日宣戰聲明書(1941. 12. 10.).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태평양전쟁 발발 소식을 듣고, 연합군의 일원이 되어 전쟁에 참가할 것으로 결의했다. 이때 주석 김구는 외무부장 조소앙과 함께 대일선전성명서를 발표했다. [사진=독립기념관]

1933년 장제스 총통을 만나 한인청년을 장교로 길러내는 길을 열었다. 뤄양(洛陽)에 있던 군관학교에 한인청년들을 장교로 길러낼 특별반을 만들었으며, 만주에서 독립전쟁을 벌이던 이청천, 이범석, 오광선 등을 초빙하여 장교 양성에 주력하였다.

1940년 선생은 한국독립당의 집행위원장, 광복군 통수권자, 임시정부 국무위원회 주석이 되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굳건히 지키고 조국의 광복을 위해 활약하였다.

김구 서명문 태극기(등록문화재 제388호). 충칭에서 활동하던 김구가 미국으로 건너가는 벨기에 신부에게 전한 태극기로, 우리 동포들에게 광복군에 지원을 당부하는 내용을 친필 묵서로 적었다. [사진=독립기념관]
김구 서명문 태극기(등록문화재 제388호). 충칭에서 활동하던 김구가 미국으로 건너가는 벨기에 신부에게 전한 태극기로, 우리 동포들에게 광복군에 지원을 당부하는 내용을 친필 묵서로 적었다. [사진=독립기념관]

1944년 4월 개헌으로 주석·부주석제가 채택되었다. 좌우합작 체제를 갖추어 선생이 주석, 민족혁명당 대표 몫으로 김규식이 부주석을 맡았다. 또한 쿤밍(昆明)에 있던 미군 전략첩보국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 CIA 전신) 중국전구사령부와 한미군사합작을 이끌어 내어, 광복군을 국내로 진입시키는 국내정진작전(國內挺進作戰)을 추진하였다. 이에 따라 1945년 5월부터 산시성(陝西省) 시안(西安)과 안후이성(安徽省) 푸양(阜陽)에서 OSS훈련이 시작되었다. 여기에서 길러진 광복군 국내정진대가 투입되기 바로 전날 일제의 항복 소식을 듣게 된 것이다.

이때 선생은 “아 왜적 항복! 이것은 내게는 기쁜 소식이었다기 보다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일이었다.”라고 백범일지에서 술회하였다. 이는 스스로의 힘으로 나라를 찾지 못하였다는 비통한 심정을 잘 표현한 내용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 환국기념 사진(1945. 11.).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이 광복 직후 충칭의 임시정부 연화지 청사 앞에서 촬영한 사진이다. [사진=독립기념관}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 환국기념 사진(1945. 11.).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이 광복 직후 충칭의 임시정부 연화지 청사 앞에서 촬영한 사진이다. [사진=독립기념관}

한반도 남쪽을 점령한 미군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끝내 승인하지 않고 개인자격으로 환국하라고 요구하였다. 그러는 바람에 귀국날짜는 많이 늦어져 광복이 되고도 석 달이 더 지난

임시정부 요인 환국 환영. 1945년 11월 23일 김구 선생은 임시정부 요인 1진과 함께 환국하였다. 국민은 독립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왔다는 뜻을 담아 ‘개선환영회’를 열었다. [사진=국가보훈처]
임시정부 요인 환국 환영. 1945년 11월 23일 김구 선생은 임시정부 요인 1진과 함께 환국하였다. 국민은 독립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왔다는 뜻을 담아 ‘개선환영회’를 열었다. [사진=국가보훈처]

환국한 뒤 선생은 세 가지에 초점을 맞춰 활동하였다. 하나는 열강의 신탁통치를 거부하는 운동으로 이미 충칭시절부터 추진했던 정책이 그대로 이어진 것이다. 다음은 임시정부가 실제로 주권을 행사하는 길을 추진하였다. 1946년 2월 비상국무회의 부총재가 되고, 이것이 국민의회로 개편될 때 부주석에 취임하였다. 그러면서 임시정부가 직접 행정을 장악하려 했지만 미군정에 저지당하고 말았다. 셋째로 선생은 분단을 반대하면서 통일국가를 추진하였다. 남북한이 각각의 국가와 정부를 만드는 단계에 이르자, 마지막으로 남북협상을 선택하여 1948년 4월 19일 평양으로 가서 대표자회의를 가졌다. 하지만 끝내 남북은 분단되고 말았다.

오로지 통일국가를 염원하던 선생은 1949년 6월 26일 경교장(京橋蔣)에서 반대파의 사주를 받은 하수인 안두희의 흉탄에 서거하고 말았다. 선생의 유해는 온 국민의 애도 속에 국민장으로 치러지고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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