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양 여운형 선생 서거 72주년 추모식 19일 봉행
몽양 여운형 선생 서거 72주년 추모식 19일 봉행
  • 정유철 기자
  • npns@naver.com
  • 승인 2019.07.17 13: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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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이사장 이부영)는 몽양 여운형 선생 서거 72주기 추모식을 7월 19일(금) 오전 11시~12시 서울 강북구 우미동 여운형 선생 묘소에서 개최한다.

 (사)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주관으로 열리는 추모식은 김상출 서울북부보훈지청장을 비롯한 각계 인사, 독립운동 관련 단체장, 기념사업회원 및 유족 등 5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약력소개, 추모사, 추모공연, 봉도가, 유족 인사 등의 식순으로 진행된다.

2018년 여운형 선생 추모식. 독립운동가 몽양 여운형 선생 서거 72주기 추모식이 19일 서울 강북구 소재 여운형 선생의 묘소에서 거행된다. [사진=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2018년 여운형 선생 추모식. 독립운동가 몽양 여운형 선생 서거 72주기 추모식이 19일 서울 강북구 소재 여운형 선생의 묘소에서 거행된다. [사진=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몽양 여운형(呂運亨)은 1885년 4월 24일 경기도 양평에서 명망 있는 양반가문의 종손으로 태어났다. 구한말부터 대일항쟁기에 교육자이자 종교인, 민족운동가로 활동하다가 국내외에서 항일독립운동이 이루어져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고 중국으로 건너갔다.

배재학당과 흥화학당에서 공부를 하였으며 나중에 통신원 부설 우무학당(郵務學堂)에 입학했다. 1907년 사립 기독교 학교인 광동학교를 설립하고, 양평에 국채보상운동 지회를 설립했다. 1908년 부친 탈상 후 집안의 노비 해방하였다.

1913년 신흥무관학교를 비롯한 서간도 각지를 순방하며 조국 광복의 웅지를 품었다. 1914년 중국 남경 금릉대학 영문과 입학, 이후 항일비밀단체 동제사(同濟社)에 가입했다.

1917년 금릉대학 수료 후 상해로 가서 협화서국에 취직, 동포 자제들의 구미 유학과 도항절차 알선에 주력하였다. ‘자림보’ 기자 진한명(陳漢明)의 소개로 손문을 처음 만났다.

1918년 상해 고려 교민 친목회(이후 상해 교민단)를 설립하여 초대총무를 맡았다. 이후 회장을 역임했다.

한국청년당(新韓靑年黨)을 조직, 당수(黨首)로서 그해 11월 장덕수와 함께 파리강화회의에 보낼 독립청원서를 미국 대통령 특사 찰스 크레인과 상해 영자신문 사장 밀러드에게 전달하였다.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조선 대표단을 파견하여 독립청원서(獨立請願書)를 제출하는 한편, 국내에 김철(金徹), 선우혁(鮮宇爀) 등을 파견, 3·1운동을 촉발시키고 1919년 4월 상해임정 수립 과정에서 독립운동정당(獨立運動政黨) 결성을 주장했다. 임정 수립 후 외무부 차장, 의정원 의원 등을 역임, 臨政이 독립운동의 구심체 역할을 하는데 기여했다.

여운형은 민단(民團)단장으로 상해거주 교포들의 권익향상에 노력하였고 인성학교(仁成學校)를 설립, 동포 자제의 교육에 힘쓰고 1919년 11월 일본 수상 하라 다카시(原敬)의 초청으로 동경(東京)을 방문, 고위 관료들을 상대로 한국독립을 역설하여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여운형의 일본행에 관해 상해 주재 일본 총영사는 본국의 외무대신에게 전보를 보내 “차제에 그에게 성의를 보여 우리 쪽으로 마음을 돌리게 하여 독립운동을 무너뜨리게 함이 상책으로 생각된다”고 의견을 말했다.

여운형은 동경에서 일본 수상 하라 다카시(原敬)과 육군대신 다나카(田中)과 척식국장 고하(古賀) 및 기타의 당국자와 차례로 회견하고 한국의 독립이 필요한 이유를 유감없이 피력하였다. 11월 27일에는 일본의 신문기자단과 사회의 대표와 기타 50여 명을 동경의 중심 되는 제국(帝國)호텔에 초집하고 만강(滿腔)의 소회를 다 토로하였다. 여운형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대한독립운동에 최초부터 종사하던 자이니, 구주전란이 창궐하던 당시에 나는 생각하되 우리 한국이 한 독립국으로 이 대전에 참가치 못하고 동양의 한 구석에 쭈구리고 앉아 어리석게 방관하는 태도를 취함은 심히 유감스러운 일이나, 어느 때든지 한족에게도 신세계의 역사의 한 페이지를 이룰만한 사업을 성취할 시기가 반드시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표연히 고국을 떠나 상해로 갔노라. 작년 겨울에 이르러 피보래가 처음으로 개이고 평화의 종소리가 크게 울릴 때에 하늘의 사명(使命)이 우리의 머리 위에 내렸음을 생각하고 활동을 시작하였으니, 동지 가운데 김규식(金奎植)을 파리강화회의에 보냈노라. 3월 1일에 과연 조선에도 독립운동이 발발하여 만세를 절규하게 되었으니, 대한 민족은 전부 각성하였도다. 굶은 자가 먹을 것을 구하고 목마른 자가 마실 것을 요함은 자기의 생존을 위하는 당연한 요구이다. 이를 능히 저지할 자가 절대로 없으리니, 일본인에게 생존권이 있음과 같이 한족에게도 생존권이 있는 것이다.

세계는 약소민족의 해방·부인의 해방·노동자의 해방 등 세계 개조를 절규하는 조류를 만나 평화스러운 천지를 형성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한국의 독립운동은 세계의 대세와 신의 의사와 국민의 각성에서 자발한 필연의 운동이니 단순히 한국만을 위함이라 하면 나는 결코 이와 같은 운동에 가담치 아니 하였으리라.

오늘에 우리들이 건설하는 국가는 인민이 주인 되는 국가, 인민이 다스리는 국가, 인민을 위하는 국가인 민주공화국이니 이는 대한 민족의 절대의 요구이며 세계 대세의 공동 요구이다. 평화를 위해서는 형식적인 단결이 필요한 것이 아니요, 정신적인 단결이 필요하니, 현금 동양이 특히 필요로 하는 바는 이와 같은 단결인 것이다. 이러한 경우에 처한 동양인에게 반목과 분규가 있음이 어찌 경하할 바일 것인가.

한국의 독립 문제가 해결되면 대 중국 문제도 용이하게 해결될 것이다. 일본은 일찍이 한국의 독립을 위하여 청·일, 노·일의 전쟁을 일으켰으나 당시의 성명을 무시하고 약속을 식언하니, 이것이 곧 한국과 중화의 두 민족이 원한을 품는 원인인 것이다. 한국 민족의 독립이 얼핏 보기에는 일본과 더불어 분리해 나가는 듯하나 일본을 구수(仇讐)로 대하지 아니하고 보조를 동일히 하여 나아감으로써 도리어 한가지로 된다 할 것이니 이것이 동양 평화를 확보하고, 세계 평화를 유지하는 제일의 기초인 것이다.

우리는 싸운 뒤에야 평화가 획득되는 것인가? 싸우지 아니하고는 획득하기 불가능할 것인가?

차탄하노니, 그대들 일본의 인사여! 심사하여라.”(출처,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자료관)

여운형은 1921년 중한호조사(中韓互助社) 결성에 참여, 한·중 양민족의 공동 투쟁과 이해증진을 모색하였으며, 1922년 1월 모스크바 극동피압박민족대회에 조선대표 일원으로 참석, 조선독립을 역설하였고, 독립을 실현할 목적으로 김구(金九) 등과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를 조직하였다.

1923년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에서 임정의 수호를 위해 개조론(改造論)을 개진하였다. 1928년 상해 복단대학(復旦大學)에 취직하여 체육담당으로 축구부와 함께 필리핀 등지로 원정여행을 했다. 마닐라에서 아시아민족의 단결을 주장하다 현지 경찰에 체포되기도 했다.

1929년 7월 상해 야구장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었다. 재판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대전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1932년 출감하였다. 그해 7월 조선총독부로부터 농촌진흥운동 지원을 요청받았으나 거절하였다.

1933년 조선중앙일보 사장에 취임하였다. 1934년 조선체육회 회장에 취임하였다.

1935년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묘소재건을 추진하였다. 조동하, 양하석을 해외로 탈출시키다 신의주사건에 연루되어 경찰 취조를 받았다. 김구 선생의 모친인 곽낙원 여사와 아들 김인, 김신 형제의 상해 탈출을 도와왔다.

1936년 8월 베를린올림픽대회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孫基禎) 선수의 소식을 8월 13일자에 보도하면서 가슴의 일장기를 지운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여운형은 조선중앙일보(朝鮮中央日報) 사장직에서 물러나고 신문은 자진 폐간하였다.

1940∼1942 5차례 東京 방문을 통해 일본의 패망을 확신했다. 1942년 이정구에게 식량조사와 그 대책을, 그리고 장권에게는 치안대 조직에 관한 상세한 계획을 지시하였다. 그해 2월 주변에 ‘일본이 패망한다’는 발언을 했다가 경성헌병대에 연행되어 구속되었다. 서대문형무소에서 건국에 대비한 결사체를 구상하였다. 1943년 가출옥후 경성요양원에 입원. 여기서 조동호, 이상도, 이상백, 최흥국, 구소현, 전사옥 등과 ‘조선민족해방연맹’조직을 결의하고, 중앙과 지방조직의 건설 준비작업에 돌입했다.

1944년 8월 비밀리에 건국동맹(建國同盟)을 조직, 조국광복을 준비하는 등 28년에 걸친 지속적인 독립운동으로 2차례에 걸쳐 징역 3年과 징역 1年에 집행유예 3年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1945년 광복 직후에는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했다. 정부 수립 과정에서 미국과 소련의 외세에서 벗어나 이데올로기에 의한 민족 분단을 막고 한반도의 완전한 자주독립을 이루기 위해 좌우합작 남북연합의 기치를 내걸고 진보적 민주주의자로서 주목할 만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1947년 7월 19일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괴한의 피격을 받아 62세의 일기로 사망했다. 남북연석회의가 채 1년도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2005년 3월 1일에 와서야 비로소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2008년 3월 1일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가로 서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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