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3주년을 앞두고 중국을 비롯한 러시아·미국·일본 등 국외 한인사회에서 전개된 3‧1운동의 양상과 다양한 동향을 종합적으로 검토하는 학술회의가 열렸다.

독립기념관(관장 이준식)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는 광복 73주년을 맞이하고 다가오는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준비하면서 8월 9일 한국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에서 ‘국외한인사회와 3·1운동’을 주제로 국제학술회의를 개최했다.

이날 ‘중국 관내 신한청년당과 3‧1운동’을 발표한 정병준 이화여자대학교 교수는 신한청년당의 기관지 '신한청년'을 분석하고, 기존에 알려지지 않았던 송헌주에게 발급된 신한청년당 당원통보문서 등의 자료를 활용하여 신한청년당 관련자들이 3·1운동 이후 한국독립운동의 주역으로 발전되어 갔다고 주장하였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가 9일 한국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에서 ‘국외한인사회와 3·1운동’을 주제로 개최한 국제학술회의에서 정병준 이화여자대학교 교수가  ‘중국 관내 신한청년당과 3‧1운동’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사진=정유철 기자]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가 9일 한국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에서 ‘국외한인사회와 3·1운동’을 주제로 개최한 국제학술회의에서 정병준 이화여자대학교 교수가 ‘중국 관내 신한청년당과 3‧1운동’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사진=정유철 기자]

정병준 교수는 “신한청년당은 1918년 여름 여운형을 중심으로 한 중국유학생 그룹으로 태동되기 시작했으며, 1918년 11월 28일 여운형과 크레인특사와의 면담을 기점으로 창당되었다. 신한청년당에는 모두 4그룹이 결집했는데, 동제사의 활동관성과 역량을 계승하고 여운형 중심 그룹의 새로운 기풍과 돌파력, 기획력, 실행력을 결합하였다.”며 “3·1운동 이전 신한국당의 가장 중요한 활동은 첫째 크레인 특사를 통해 미국 윌슨 대통령에게 한국 독립청원서를 제출한 일, 둘째 김규식을 신한청년당 대표로 파리에 파견한 일, 셋째 국내·일본·만주·노령에 주요 당원을 파견해 선전·모금활동을 펼친 일 등이다”고 말했다.

정 교수는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여운형과 김규식 등 신한청년당의 주역들은 3·1운동이 발발하리라는 것을 예상하기 전에 독립운동의 최전선에 뛰어들었다는 사실이다”며 “이들은 20여명 안팎의 소수 정당을 조직하고 윌슨대통령과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하는 한편 대표를 파리에 파견했고, 스스로 필사가 되어 국내외에 들어가 선전활동과 모금활동을 함께 펼쳤다. 이들은 3·1운동 이전에는 독립운동 선상에서 이름을 떨친 애국자들이 아니었지만, 3·1운동이 발발하자 독립운동의 최전선의 운동가로 이름을 얻었다”고 강조했다.

정 교수는 “3·1운동기 이후 신한청년당은 임시정부의 조직과 유지에 필요한 인적·물적·정신적 자원을 제공하고, 신한청년당 자체의 조직·활동을 통해 독립운동을 전개하였고 외교독립노선에 입각해 1917년 러시아혁명과 신흥 러시아에 새로운 가능성을 타진해 대표를 파견하였다”고 설명했다.

“‘요시찰’ 재일조선인유학생의 2‧8독립운동”을 발표한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윤소영 연구위원은 2‧8독립운동을 운동을 일으키게 된 시대적 배경과 2‧8독립운동의 직접적 동기, 국내외 독립운동과 2‧8독립운동은 연계, 2.8독립운동의 운동방법론 등을 검토하였다.

윤 연구위원은 “당시 조선인 유학생들은 관할 경찰서 순사의 감시와 밀정의 감시망 속에서 유학생활을 보내야 했지만, 유학생들의 정보망은 국내와 미국, 블라디보스토크, 상하이 등지의 독립운동가들과 연결되어 있었으며 세계정세의 변화도 능동적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도쿄의 유학생들은 각 지역 특사의 활동을 뒷받침하기 위해 전위적인 역할을 하기로 결심하고, 귀국한 유학생 선배들과의 네트워크까지 활용하였다.”며 “1919년 2‧8 독립운동은 도쿄라는 시공간 속에서 국한되어 일어난 것이 아니라 당시 한국독립운동의 세계적인 네트워크 속에서 유기적인 관계를 맺으며 일어났다.”고 설명했다.

2월 8일에 독립운동을 결행한 이유로 윤 연구위원은 학우회 규칙에 임원 임기는 2월부터 10월, 10월부터 2월까지이며 이에 따라 임원 총선거는 매년 2월과 9월에 개최되었는데 끊임없이 사찰하는 일제 경찰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총회일에 맞춰 거사를 거행한 것으로 파악했다.

윤 연구위원은 “2‧8독립운동의 조직적 기반은 1916년 초 장덕수, 최팔용, 김도연, 정노식, 전영택 등에 의해 조직되었던 비밀결사 신아동맹당에서 찾을 수 있고, 2‧8독립운동의 사상적 기반은 유학생들이 깊이 신뢰하고 있던 민족자결주의와 민주주의였다”며 “특히 도쿄제국대학 교수 요시노 사쿠조 등 당시 일본의 진보적 지식인과의 교류활동과 그들의 언론 투고 과정에서 깊어진 사상적 성숙이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고 말했다.

도쿄유학생들의 활동 속에 내재화된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이 조선의 독립을 위해 일본제국의회에 ‘민족대회소집청원서’를 제출하고, 도쿄 주재 외국 영사관 등 외교기관과 일본 및 해외 언론에 자신들의 운동을 홍보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윤 연구위원은 말했다. 다시 말해 도쿄 유학생들은 언론 활동을 통해 피압박 약소민족인 한국인들이 민주주의를 실천할 준비가 되었다는 것을 국제사회에 피력하고자 했다.

윤 연구위원은 “2‧8독립운동의 마침표는 1919년 12월 여운형이 2‧8 독립운동의 주요인물을 대동하고 일본의 정치가와 국회의원, 언론인 앞에서 위풍당당하게 한국독립의 정당성을 피력했던 장면이다. 이 장면에서 재일조선인유학생들은 ‘천황제’ 이데올로기에 갇혀있던 일본 정치가들에게 민주적 방식으로 조선의 독립을 쟁취하겠다는 의지를 다시 한 번 천명한 역사적인 순간이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윤 연구위원은 “이러한 점에서 2‧8 독립운동은 ‘대한제국’에서 ‘대한민국’으로의 역사적 이정표를 세운 의거(義擧)로 평가되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윤 연구위원에 따르면 2·8독립운동 참가자들은 그 후에도 2·8정신을 계승해 나가는 작업을 계속했다. 1920년 출옥한 주동자들은 동아일보사의 후원으로 국내에서 전국강연회를 전개했으며, 상해의 김상덕, 정광호, 주요한, 신익희, 나용균 등은 1921년 유일학생회(留日學生會)를 도쿄 2·8독립운동에 빗대어 이팔구락부라고 개명했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가 9일 한국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에서 ‘국외한인사회와 3·1운동’을 주제로 개최한 국제학술회의에서 윤소영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위언이  “‘요시찰’ 재일조선인유학생의 2‧8독립운동”을 발표했다. [사진=정유철 기자]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가 9일 한국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에서 ‘국외한인사회와 3·1운동’을 주제로 개최한 국제학술회의에서 윤소영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위언이 “‘요시찰’ 재일조선인유학생의 2‧8독립운동”을 발표했다. [사진=정유철 기자]

'중국동북지역의 3‧1운동’을 발표한 김춘선 중국 연변대학 교수는 "1919년 3월부터 4월까지에 걸쳐 중국 동북지역에서 전개된 한인들의 반일집회와 반일시위운동은 규모와 시간상에서 전례 없는 이 운동은 러시아 10월 혁명과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고조된 민족자결주의 그리고 조선을 비롯한 식민지, 반식민지 국가들의 독립과 민족해방을 위한 기대가 한층 성숙되어 있던 국제 환경에서 이루어진 것이다”며 “한인들이 보여준 드높은 반일의지와 불굴의 투쟁정신은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고, 나아가 통치정책의 일대전환을 일으키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중국 동북지역에서의 3‧1운동은 민족독립사상, 민주주의, 자유평등정신, 자산계급인도주의 등 자산계급민주주의사상이 널리 전파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를 통해 한인동포들도 자신이 바로 반일 민족해방운동의 주력군임을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고 총칼을 앞세운 일본침략자를 타도하려면 반드시 자신도 무장하여야 한다는 무장투쟁의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고 결론지었다.

'러시아혁명 이후 연해주의 정세와 3‧17 만세운동’을 발표한 윤상원 전북대 교수는 “국내의 3·1운동에 호응하여 러시아 연해주에서도 3월 17일 블라디보스토크를 비롯하여 각지에서 대규모 시위운동이 전개되었고, 연해주 3·1운동은 운동 직전인 2월 25일 조직된 대한국민의회가 주도하였다.”라며 “대한국민의회는 3월 8일 국내의 3·1운동 소식을 접한 이후 시위운동을 준비하였다. 그 결과 3월 17일 이후 연해주 각지에서 벌어진 연해주 3·1운동의 특징은 단지 독립선언과 만세시위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조직된 지도부가 무장투쟁과 외교활동의 전망을 갖고 운동을 전개하였다는 데 있다.”고 주장했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는 광복 73주년을 맞이하고 다가오는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준비하면서 8월 9일 한국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에서 ‘국외한인사회와 3·1운동’을 주제로 국제학술회의를 개최했다. [사진=정유철 기자]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는 광복 73주년을 맞이하고 다가오는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준비하면서 8월 9일 한국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에서 ‘국외한인사회와 3·1운동’을 주제로 국제학술회의를 개최했다. [사진=정유철 기자]

 

‘미국에서의 3‧1운동’을 발표한 브랜던 팔머(Brandon Palmer) 코스탈캐롤리나 대학 교수는 “3‧1운동 기간 동안 미국 내의 한인들은 두 가지 목적을 위해 노력했다. 첫째는 한국 독립에 대한 미국의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해 한국이 처한 어려운 상황을 널리 알리는 것이었다. 둘째는 한국인 공동체 내부에서 민족주의를 공고히 다지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한인들은 평화주의적인 방법을 이용하였고, 그 결과 미국에서 한국 민족주의 운동이 오래 지속될 수 있었다.”고 말했다.

팔머 교수는 “언론을 통한 한인사회의 대일 공세는 일본이 영토 정복에 혈안이 되어 있는 침략국가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이루어졌다. 때마침 일본이 중국에서 취한 공세적 움직임 탓에 미국에서도 반일 정서가 거세지고 있었고, 이 시기를 틈타 한국인들은 일본에 대한 미국의 불신을 이용하여 일본의 잔혹함을 미국 내에 환기시킬 수 있고, 서양선교사에 대한 한국 내에서의 박해 역시 이러한 분위기를 고조시켰다.”며 “이러한 배경아래 한인들의 애국심은 더욱 높아졌고, 독립을 위해 다양한 형태의 조직이 만들어졌을 뿐 아니라 한인사회의 통일전선이 결성되기도 하였다.”고 주장했다.

브랜던 교수는 한계는 있었지만, “당시 3‧1운동에 참여한 미국의 한인사회와 지도자들은 부족한 인원과 한정된 자원을 가지고도 훌륭한 활동을 수행한 영웅들이었고, 그 결과 한인들은 자신들이 독립할 자격과 가치가 있는 민족임을 세계에 보여주었다.”고 강조했다.

이번 학술회의에서 발표된 5개의 주제발표 논문에서는 국외 한인사회에서 전개된 3‧1운동의 양상을 통한 세계사적인 특성들을 드러내고 있다. 일제의 침략이 진행되고 있던 중국과 러시아 연해주에서는 무장투쟁에 기초한 독립운동이 주요한 흐름이었다면, 일본과 미국에서는 인류 보편의 가치라 할 수 있는 ‘민주주의’에 대한 지향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 점이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국외에서 펼쳐진 3‧1운동의 전개양상을 통해 볼 때, 한국독립운동은 정의와 인도, 민주주의라는 인류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