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를 지키며 독립의 토대를 마련한 여성독립운동가, 연미당
임시정부를 지키며 독립의 토대를 마련한 여성독립운동가, 연미당
  • 정유철 기자
  • npns@naver.com
  • 승인 2018-06-29 20: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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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훈처·독립기념관 공동 선정, 2018년 7월의 독립운동가

국가보훈처(처장 피우진)와 독립기념관(관장 이준식), 광복회가 공동으로 독립운동가 연미당(延薇堂)을 2018년 7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독립운동가 연미당은 본명이 연충효로, 1908년 7월 15일 북간도 용정해관에서 근무하던 연병환(延秉煥)과 김정숙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친 연병환은 북간도 청년들이 1919년 3월 3일 만세운동을 전개하자 배후에서 이를 지원하다 체포되어 2개월간의 옥고를 치른 후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광복 후 연미당. 연미당은 남편을 대신하여 자녀들을 교육하고 양육한 실질적 가장이었고, 항일투쟁전선에 뛰어든 독립운동가였다. [사진=독립기념관]
광복 후 연미당. 연미당은 남편을 대신하여 자녀들을 교육하고 양육한 실질적 가장이었고, 항일투쟁전선에 뛰어든 독립운동가였다. [사진=독립기념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공립학교인 인성학교(人成學校)를 졸업한 연미당은 1927년 7월 청년 독립운동가 엄항섭과 결혼했다. 엄항섭은 3·1운동 이후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에 참여한 인물로, 부친 연병환과 친분관계가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결혼 이후 연미당은 남편 엄항섭을 내조하며, 자녀들의 교육 나아가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역할을 맡았다. 이와 같은 삶은 당시 독립운동가를 남편으로 둔 여성들의 일반적인 생활방식이었다.

나라를 잃은 여성들은 가장으로서의 삶과 함께 독립투사로서의 삶도 요구 받았다. 연미당·엄항섭 부부는 독립운동 세력 단결을 위해 힘썼는데, 1927년 11월 중국 관내지역 청년단체들과 함께 중국본부한인청년동맹 결성에 참여하였다. 1928년 9월에는 재중국한인청년동맹 상해지부 결성에 따라 각각 청년동맹과 청년여자동맹에서 활약하였다.

연미당·엄항섭 결혼식(1927). 연미당과 엄항섭은 많은 애국지사들의 축하를 받으며 결혼하였다. [사진=독립기념관]
연미당·엄항섭 결혼식(1927). 연미당과 엄항섭은 많은 애국지사들의 축하를 받으며 결혼하였다. [사진=독립기념관]

연미당은 1930년 8월 한인여자청년동맹 창립에 참여하여, 임시정부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상해 거주 교민들의 단합을 위해 노력하였다. 1932년에는 한인여자청년동맹 임시위원으로 선출되어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의사가 상하이 홍구공원에서 의거를 일으키자 일본 경찰은 임시정부 요인들을 비롯한 한인 독립운동가에 대한 검거와 수색을 대대적으로 진행하였다. 주도 인물이었던 남편 엄항섭이 먼저 피신하고, 연미당과 임시정부 요인들도 가흥으로 이주하였다. 상해를 떠난 엄항섭은 임시정부와 중국정부 간의 연락 임무를 맡고, 연미당은 남편을 대신해 임시정부 요인들을 모시며 피신생활에 들어갔다.

한국혁명여성동맹 창립기념(1940. 6. 17.)1940년에 창립된 한국혁명여성동맹은 전 세계 피압박민족 여성들과 연계 분투한다고 다짐하였다. 연미당은 임원을 맡지 않고 측면에서 지원하였다. 맨 뒷줄 오른쪽 세 번째 연미당 모습이 보인다. [사진=독립기념관]
한국혁명여성동맹 창립기념(1940. 6. 17.)1940년에 창립된 한국혁명여성동맹은 전 세계 피압박민족 여성들과 연계 분투한다고 다짐하였다. 연미당은 임원을 맡지 않고 측면에서 지원하였다. 맨 뒷줄 오른쪽 세 번째 연미당 모습이 보인다. [사진=독립기념관]

 

임시정부가 중국 가흥 등지로 이동할 때, 자신도 돌보기 힘든 상황에서 노(老) 독립운동가들을 병간호했다. 가흥에서 폐결핵으로 고생하던 이동휘와 장사 남목청에서 피습당한 김구 간호가 대표적이다.

독립투사로서의 삶은 이동과정에서도 이어졌다. 1936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과 재건 한국독립당 당원으로도 활동했다. 연미당은 1938년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를 결성하여 선전과 홍보활동에 주력하였다. 중국 선전공작대와 함께 활동하여, 일본군 내 한국인 병사 모집과 함께 군인을 대상으로 하는 위문공연과 선전·홍보활동에 주력하였다. 특히 연극이나 무용 등은 여성대원들에 의해 기획되었다. 연미당의 맏딸 엄기선도 어린 나이에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에 참가하였다.

1940년 9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중경에 정착하자 항일과 독립을 위해 여성들을 결집하고자 한국혁명여성창립동맹을 발족하고 애국부인회를 재건했다. 연미당은 조직부 주임을 맡아 실질적으로 조직을 운영하였다. 그는 방송을 통해 국내외 여성 동포들의 각성과 분발을 촉구하거나 광복군으로 들어올 것을 권유하였다. 특히, 연미당은 중경 방송국에서 일본군 소속 한인 사병들을 광복군으로 전향시키기 위한 반일선전 활동을 전개해 갔다.

1946년 6월 3일 한국으로 환국했다. 연미당이 광복 이후 즉시 환국하지 못한 이유는 중국에 있는 한인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광복 이후 엄항섭의 내조에 힘을 쏟던 연미당은 6·25전쟁이 발발하자 남편이 납북되어 생이별을 해야만 했다. 월북자 가족이라는 오해와 중풍으로 힘겨운 세월을 보냈던 연미당은 1981년 1월 1일 순국했다.

연미당은 남편을 대신하여 자녀들을 교육하고 양육한 실질적 가장이었고, 항일투쟁전선에 뛰어든 독립운동가였다. 정부는 독립을 위해 헌신한 연미당의 공적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한편 독립기념관은 7월 1일부터 31일까지 한달 간 독립기념관 야외 특별기획전시장(제5․6관 통로)에서  연미당 사진 등 기념 전시회를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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