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8월의 독립운동가에 김교헌 선생 선정
2018년 8월의 독립운동가에 김교헌 선생 선정
  • 정유철 기자
  • npns@naver.com
  • 승인 2018.08.01 10: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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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단실기’ ‘신단민사’ 등 저술 민족사의 정통성 정립 노력

국가보훈처(처장 피우진)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김교헌(金敎獻, 1867. 7. 5.~1923. 11. 18.) 선생을 2018년 8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고 밝혔다.

대종교 입교 이후의 김교헌. 1910년 대종교에 입교한 김교헌은 김헌(金獻)으로 개명하여 활동하였다. [사진=국가보훈처]
대종교 입교 이후의 김교헌. 1910년 대종교에 입교한 김교헌은 김헌(金獻)으로 개명하여 활동하였다. [사진=국가보훈처]

김교헌은 1867년 경기도 수원군 구포리에서 부친 김창희와 모친 풍양조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18세가 되던 해인 1885년 정시문과(庭試文科) 병과(丙科)에 급제하여 예조참의(禮曹參議),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 등을 지냈다.

1922년 대종교 만주 영고탑에서 제14회 중광절 기념. 중광절은 대종교의 사대경절 중 하나로, 나철의 대종교 조직을 기리는 날이다. 둘째 줄 왼쪽에서 다섯 번째 김교헌 모습이 보인다. [사진=독립기념관]
1922년 대종교 만주 영고탑에서 제14회 중광절 기념. 중광절은 대종교의 사대경절 중 하나로, 나철의 대종교 조직을 기리는 날이다. 둘째 줄 왼쪽에서 다섯 번째 김교헌 모습이 보인다. [사진=독립기념관]

 

1898년부터 독립협회에서 몸담기 시작했다. 독립협회 간부진이 개혁내각 수립과 의회개설을 요구하다가 구속되자, 독립협회의 대표위원으로 만민공동회 운동을 전개하는 등 민중계몽에 앞장섰다.

1906년 동래부사에 임명되어 부산으로 내려갔다. 여기서 통감부의 비호 아래 일본인이 한인을 대상으로 경제 침탈과 만행을 자행하는 것을 목격했다. 민족의식을 자각한 선생은 일본인의 횡포를 제지하다가 통감부의 압력과 친일파 송병준의 모함을 받고 해직되었다. 이는 김교헌의 항일의식이 고취되는 계기가 되었다.

1910년 대한제국이 일본에 강제병합 되자 대종교에 입교한 김교헌은 총본사의 요직을 맡으며, 민족종교로서 대종교 이론을 체계화하였다. 1914년에는 『신단실기(神檀實記)』와 『신단민사(神檀民史)』를 저술하여 단군과 대종교의 근본을 역사적으로 규명하고, 민족사의 정통성을 체계적으로 정립하고자 노력하였다. 이 책은 단군을 중심으로 한 민족서사로서 망국이후 한국 국민들의 애국혼을 고취하였다.

대한독립선언서. 만주 길림에서 발표된 대한독립선언서(‘무오독립선언서’라고 불림)는 무장혈전을 통한 독립을 주장한 유일한 독립선언서이다. 대종교 교주인 김교헌이 첫 번째로 서명하였다. [사진=독립기념관]
대한독립선언서. 만주 길림에서 발표된 대한독립선언서(‘무오독립선언서’라고 불림)는 무장혈전을 통한 독립을 주장한 유일한 독립선언서이다. 대종교 교주인 김교헌이 첫 번째로 서명하였다. [사진=독립기념관]

 

1916년 9월 나철(羅喆)의 뒤를 이어 대종교 2대 교주로 취임했다. 조선총독부는 1915년 10월 포교규칙을 발표하고 대종교를 항일독립운동단체로 규정하여 탄압을 가하였다. 이에 선생은 대종교 본사를 만주 화룡현(和龍縣)으로 옮겼다. 이후 항일무장투쟁 역량을 강화하고자 46개의 시교당을 각 지역에 설치하여 민족교육을 전개하여 교세를 크게 확장하였다.

1919년 2월 대종교 교주로서 대종교 주요 인사 및 해외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가와 함께 뜻을 모아 ‘대한독립선언서(무오독립선언서)를 작성하였다.

‘대한독립선언서’를 통해서 세계 각국에 ‘한일합방’은 무효임을 선언하고, 향후 수립될 국가는 자주·독립적인 민주공화제에 기반을 둘 것임을 분명히 밝혔다.

김교헌 사망 기사( 1924. 1. 19).독립신문에 실린 김교헌 사망 기사로, 김교헌의 생애를 간략히 기술하였다. [사진=독립기념관]
김교헌 사망 기사( 1924. 1. 19).독립신문에 실린 김교헌 사망 기사로, 김교헌의 생애를 간략히 기술하였다. [사진=독립기념관]

 

1919년 3월 24일 만주 안도현(安圖縣)에서 대종교인, 학생들과 함께 만세운동을 전개하며 조국독립을 위해 헌신했다.

1919년 10월 서일, 현천묵 등 대종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에 참여하여, 1920년 10월 홍범도, 김좌진이 청산리대첩을 승리로 이끄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중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화룡시에 있는 대종교 삼종사 묘. 왼쪽부터 백포 서일 종사, 홍암 나철 대종사, 무원 김교헌 종사 묘. [사진=코리안스피릿 자료사진]
중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화룡시에 있는 대종교 삼종사 묘. 왼쪽부터 백포 서일 종사, 홍암 나철 대종사, 무원 김교헌 종사 묘. [사진=코리안스피릿 자료사진]

청산리대첩에서 패배한 일본은 만주거주 한인들을 대상으로 학살을 자행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종교의 지도자 중 한명이었던 서일이 순국했다. 이에 선생은 한인들을 보호하고 대종교를 지키고자 본사를 영안현(寧安縣)으로 옮겼다. 서일의 죽음과 일본의 한인 학살에 충격을 받은 선생은 1923년 11월 18일 본사 수도실에서 순국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김교헌 선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독립기념관은 2018년 8월의 독립운동가 김교헌 관련 전시회를 8월 1일부터 31일까지 한 달 간 독립기념관 야외 특별기획전시장(제5․6관 통로)에서 개최한다. 이 전시회에는 김교헌 사진 등 7점이 전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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