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만난 독립운동가의 뜨거운 숨결
일본에서 만난 독립운동가의 뜨거운 숨결
  • 서재원(벤자민인성영재학교 4기)
  • arisoo9909@naver.com
  • 승인 2018.07.20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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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원 군의 국외 독립운동 사적지 탐방기

지난 6월, 국가보훈처에서 공모하는 ‘국외독립운동사적지탐방’에 신청을 했다. 평소 우리나라의 근현대사에 관심이 많았던 나로서는 이번 탐방이 매력적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청년들이 생생한 역사체험을 하고, 국가유공자의 숭고한 희생정신과 보훈정신을 본받을 계기를 마련하고자 운영하고 있는 국외독립운동사적지탐방은 일본, 중국, 러시아에 있는 독립운동 사적지로 떠나는 프로그램이다. 지난 9일에 일본 탐방팀의 일원으로 출발했다.
 

같이 탐방을 했던 30여 명의 청년들과 도쿄역호텔 앞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사진=서재원]
같이 탐방을 했던 30여 명의 청년들과 도쿄역호텔 앞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사진=서재원]

이른 아침 공항에 도착해 탐방을 함께할 이들과 우리를 안내해 줄 가이드를 만났다. 이번 ‘국외독립운동사적지탐방’은 일본에서 활약했던 독립운동가의 흔적을 따라서 일본 3대 도시인 도쿄, 교토, 오사카를 방문하는 4박 5일간의 여정이었다.

평소 식민지배의 혼란기 속에 독립 투쟁에 뛰어들었던 독립운동가들을 존경했던 나는 그들이 어떻게 두려움을 무릅쓰고 투신할 수 있었는지, 무엇을 위해서 싸웠는지 생각해왔다. 이러한 사색에 명쾌한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나를 이번 여정으로 이끌었다.

일본에 도착한 후 첫 일정으로, 양근환 의사가 의거를 했던 도쿄역호텔에서 시작해 ‘2.8독립선언’에 관한 자료를 보관하고 있는 재일본 한국YMCA사무실을 방문했다. 이어서 이봉창 의사가 순국한 이치가야 형무소의 옛터를 둘러보는 일정이었다.

도쿄역호텔은 옛 서울역 건물처럼 고풍스럽고 화려한 붉은 벽돌로 덥힌 건물로, 양근환 의사가 당시 친일파였던 민원식을 사살한 현장이다. 친일단체였던 국민협회 회장 민원식은 일본 제국의회 선거에 조선인들도 참여하게 해달라는 참정권운동을 주도하고 있었다. 1921년 2월 16일, 양근환 의사는 민원식이 나라를 배반하는 자라고 여기고, 그가 머물던 도쿄역호텔로 찾아가 그를 사살했다. 이후 도쿄지역에서는 서상한, 김지섭, 이봉창 의사와 같은 독립운동가들이 활약했다. 양 의사의 의거는 일본지역 의열투쟁의 시작을 알리는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광장 한 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는 도쿄역호텔은 양근환 의사가 의거를 한 곳이다. 그는 이 호텔 2층 14호에서 의거를 했다. [사진=서재원]
광장 한 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는 도쿄역호텔은 양근환 의사가 의거를 한 곳이다. 그는 이 호텔 2층 14호에서 의거를 했다. [사진=서재원]

이후 방문한 곳은 1919년에 일어난 3.1운동에 영향을 끼쳤던 ‘2.8 독립선언’이 일어난 재일본YMCA회관이다. 과거 ‘조선기독교청년회관’이라고 불렸던 재일본 YMCA회관에서 1919년 당시 조선유학생학우회와 조선청년독립단이 모여 2.8독립선언식을 진행했다.

현재는 그 기념비와 전시관이 건립되어 있다. 이곳을 관리하는 타즈케 카츠히사 씨는 “일본 학교에서는 역사시간에 제국주의 시절과 조선인들의 독립운동에 관해서 교육을 하지 않는다.”며 “일부 소양 있는 선생님들이 개인적으로만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전했다. 또한, “한국과 일본인들이 진정으로 화합하기 위해서는 역사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뒷받침돼야 한다. 일본에 방문하는 한국인들이 이곳에 꼭 들러주었으면 한다”고 당부했다.
 

1908년에 창립된 재일본 한국YMCA는 창립 100주년을 맞은 지난 2008년, 국가보훈처의 지원을 받아 2.8독립선언에 대해 사람들이 쉽게 알 수 있도록 전시관을 개관했다. [사진=서재원]
1908년에 창립된 재일본 한국YMCA는 창립 100주년을 맞은 지난 2008년, 국가보훈처의 지원을 받아 2.8독립선언에 대해 사람들이 쉽게 알 수 있도록 전시관을 개관했다. [사진=서재원]

첫째 날, 마지막 코스로 옛 이치가야 형무소 터를 들렀다. 한국을 대표하는 독립운동가 중 한 사람인 이봉창 의사가 순국한 곳과는 어울리지 않게 주택단지에 있는 어린이 공원의 한쪽 구석에 비석 하나만이 덩그러니 놓여있는 것이 전부였다. 이 지역 사는 주민들조차도 이곳이 과거 형무소였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듯했다.

‘형사자위령탑’이라고 적혀있는 비석은 1964년 일본 변호사연합회에서 세운 것으로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세상을 떠난 조선인과 일본인들을 기리기 위한 것이었다. 독립운동가 중 이봉창 의사 뿐만 아니라 김지섭, 박열 의사 등이 수형되었다고 한다.

비석 앞에는 한국 상표가 붙은 소주 한 병이 놓여 있었다. 한국에서 온 누군가가 이곳을 알고 찾아온 듯하다. 그 술잔을 보고 덩달아 가슴이 뭉클해졌던 우리는 비석 앞에서 묵념을 하는 것으로 첫날 일정을 마쳤다.
 

어린이 놀이터 구석에 자리 잡고 있는 형사자 위령탑. 이봉창 의사의 순국지라는 표지판이 따로 없어 사전 정보 없이 온 사람들은 모르고 지나갈 수 있다. [사진=서재원]
어린이 놀이터 구석에 자리 잡고 있는 형사자 위령탑. 이봉창 의사의 순국지라는 표지판이 따로 없어 사전 정보 없이 온 사람들은 모르고 지나갈 수 있다. [사진=서재원]

둘째 날 일정은 도쿄에 있는 유텐지 신사와 ‘2.8만세운동’이 벌어졌던 히비야 공원을 거쳐, 일본 내 여러 의열 투쟁이 일어난 일본의 궁성 방문이었다.

에도시대에 창건된 유텐지 신사에는 ‘우키시마호 사건’과 관련된 조선인 희생자 유골 2천구 이상이 봉안된 납골당이 있다. 태평양전쟁이 끝나고 4일이 지난 1945년 8월 18일에 일어난 ‘우키시마호 사건’은 일본에 강제 징용되었던 조선인들을 실은 일본 해군의 군함 우키시마호가 부산항을 향하던 중, 원인모를 폭발로 침몰한 사건이었다.
 

유텐지신사의 모습. 이곳 납골당에는 우키시마호 사건의 희생자 유골 등 2천구 이상의 한국인 유골이 봉안되어 있다. [사진=서재원]
유텐지신사의 모습. 이곳 납골당에는 우키시마호 사건의 희생자 유골 등 2천구 이상의 한국인 유골이 봉안되어 있다. [사진=서재원]

사고의 원인은 지금까지도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부산에 도착했을 때 그곳의 조선인들에게 보복을 당할까봐 두려웠던 일본장교들이 일부러 폭파시켰다는 설이 현재로서는 유력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조국의 해방과 귀향의 기쁨을 누리기도 전에 세상을 떠난 조선인들의 시신은 이곳 납골당에 합사되어 아직까지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누리는 자유가 있기까지 수많은 조상들의 고통과 슬픔이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의 자유는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라는 가이드의 말이 깊게 와 닿았다.

이후 방문했던 히비야 공원은 조선기독교청년회관(재일본 YMCA사무실)과 더불어 2.8독립운동과 관련된 역사적인 장소이다. 조선인 유학생들은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독립선언서와 결의문을 발표한 뒤, 일본의회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하려다 그 중 60명 정도가 체포되었다. 이때 달아난 유학생 수십 명이 바로 이곳 히비야 공원에서 만세시위를 했다.

민족의 자유와 주권을 상실했던 시대에 이를 되찾고자 노력했던 학생들은 자신이 민족의 주체이자 미래임을 알았고, ‘3.1운동’과 ‘광주학생항일운동’ 등 독립운동사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해왔다.

지금 한국학생들은 불과 2년 전 세계를 놀라게 한 ‘촛불평화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었다. 또한, 만 18세 투표권을 얻기 위한 참정권 운동에서도 활약하고 있다. 이러한 한국학생들의 저력은 역사를 거슬러 대일항쟁기의 만세운동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새삼 느꼈다.

이날 마지막으로 들린 곳은 일본 천황궁이었다. 일본인들의 정신적 지주라고 할 수 있는 천황이 사는 이곳은 놀랍게도 3명의 독립투사와 관련이 있었다. 1920년 서상한 의사가 영친왕 이은과 일본 황실의 딸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의 결혼식장에서 폭탄투척을 계획했다. 4년 뒤인 1924년 1월 5일에는 김지섭 의사가 황성 정문과 궁성 쪽에 있는 니주바시 한복판에 폭탄을 던졌지만 불발되고 체포되었다.

1932년에는 이봉창 의사의 의거가 있다. 김구 선생이 이끄는 한인애국단의 단원이었던 그는, 도쿄 교외에 있는 요요기 연병장에서 거행된 신병 관병식을 마치고 황거로 돌아가는 천황에게 폭탄을 던졌다. 비록 실패했지만 천황을 상대로 의거했다는 사실은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천황궁 주변에 있는 니주바시 다리와 경시청 앞. 예나 지금이나 일본 정부의 주요기관들이 밀집되어 있는 곳이어서 의열 투쟁에 큰 효과를 낼 수 있는 곳이었다. 김지섭 의사와 이봉창 의사가 이곳에서 투탄 의거를 하기도 했다. [사진=서재원]
황거 주변에 있는 니주바시 다리와 경시청 앞. 예나 지금이나 일본 정부의 주요기관들이 밀집되어 있는 곳이어서 의열 투쟁에 큰 효과를 낼 수 있는 곳이었다. 김지섭 의사와 이봉창 의사가 이곳에서 투탄 의거를 하기도 했다. [사진=서재원]

이렇게 일본 지역에서 일어난 의열투쟁은 양근환 의사의 의거에서 출발해 서상한, 김지엽, 이봉창 의사에 이르기까지 줄곧 이루어져왔다. 이들은 폭탄투척, 암살과 같이 대중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기 위한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했다. 하지만 응징하고자 하는 상대 외에 관련이 없는 민간인들을 전혀 대상으로 삼지 않는 것에서 무자비한 ‘테러’와는 큰 차이를 보인다.

1일차에서 2일차 동안 도쿄에 있는 사적지를 모두 둘러본 우리들은 ‘가나자와’라는 지역으로 이동하기 위해 신칸센에 몸을 실었다. 셋째 날, 우리는 가나자와에서 윤봉길 의사의 순국암장지를 보고, 일본문화의 중심지 교토로 이동하여 대일항쟁기에 활약했던 시인들의 사적지를 둘러보았다. 이번 일정에 가나자와가 포함된 이유는 역사책에서 한 번 정도는 보았을 윤봉길 의사와 가장 관련이 깊기 때문이었다.

1932년 4월 29일, 상해 흥커우 공원에서 열린 천장절(일본 천황의 생일) 겸 상해사변 전승축하 기념식에서 일본군 고위급 간부들을 향해 폭탄을 던진 윤봉길 의사의 의거는 이봉창 의사의 의거와 더불어 우리가 가장 잘 알고 있는 독립운동이다.

현장에서 바로 체포된 윤봉길 의사는 일본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뒤에 일본으로 이송된다. 1932년 11월 20일 오사카 위수형무소에 수감된 윤봉길의사는 한 달 뒤인 12월 18일, 가나자와 위수구금소 영창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 날인 19일에 미츠코지산 육군 작업장에 설치된 형장에서 총살로 순국을 하게 된다.

이후 우리는 윤봉길 의사가 순국한 뒤 암매장 되었던 곳으로 갔다. 현재는 유해가 발굴된 곳을 표시하기 위한 암장지적비가 남아있다. 근처에 러‧일전쟁 때 전사한 러시아 군인들의 공동묘지가 있는데 윤봉길 의사를 기리는 순국기념비도 세워져 있다. 윤봉길 의사가 형을 당한 육군 작업장에도 갔지만 현재는 자위대가 관리하는 곳이어서 철장 너머로만 위치를 가늠할 수 있었다.
 

윤봉길 의사의 유해가 발굴된 이후 이곳에는 암매장을 한 일제의 만행을 지적하는 암장지적비와 윤봉길 의사를 기리는 순국기념비가 세워졌다. [사진=서재원]
윤봉길 의사의 유해가 발굴된 이후 이곳에는 암매장을 한 일제의 만행을 지적하는 암장지적비와 윤봉길 의사를 기리는 순국기념비가 세워졌다. [사진=서재원]

육군 작업장을 거쳐 가나자와 위수구금소가 있던 가나자와 성을 둘러본 뒤 교토로 가는 버스에 탑승했다. 그곳을 떠나며 윤봉길 의사의 마지막 발자취가 남아있는 현장을 다시 머릿속에 떠올렸다. 누구에게나 죽음은 두려운 것이고, 그것은 윤봉길 의사를 포함한 모든 독립운동가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누군들 눈이 내리는 추운 겨울날에 형틀에 묶여 총살을 당하고 싶었을까?

단지 시대만 달랐을 뿐, 독립운동가들도 우리와 다르지 않은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행복해지고 싶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너무도 당연한 마음을 가진 ‘평범한 사람’이었을 것이었다. 그들은 과연 무엇을 위해, 이러한 당연한 마음을 넘어 스스로 투쟁의 길을 가게 되었을까? 탐방을 가기 전 고민했던 것들이 다시 한 번 떠올랐다.

교토에 도착한 우리들은 윤동주 시인과 관련된 사적지를 가게 되었다. 윤동주 시인이 도시샤대학에 재학하던 시절 거주했던 하숙집이 있었는데, 지금은 옛 흔적을 찾아볼 수 없고 교토조형예술대학 다카하라 학사가 자리 잡고 있었다. 비석 하나가 그곳에 세워져 있는데, 윤동주 시인의 대표 시인 ‘서시’가 새겨진 작은 시비였다.
 

현재는 길 한가운데에 자리잡은 작은 시비를 제외하고는 윤동주 시인의 흔적은 찾아보기 힘들다. [사진=서재원]
현재는 길 한가운데에 자리잡은 작은 시비를 제외하고는 윤동주 시인의 흔적은 찾아보기 힘들다. [사진=서재원]

윤동주 시인의 시비는 그가 재학했던 도시샤대학 내에서도 찾아 볼 수 있었다. 도시샤대학 역사자료관 분관 옆에 위치하고 있는데, 같은 40년대에 활약했던 정지용 시인의 시비와 함께 나란히 세워져 있었다. 우리를 이끌어 준 김용달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은 “정지용 시인이 참신하고 세련된 시어로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면, 윤동주 시인은 누구에게나 다가가기 쉬운 부드러운 문체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고 설명했다.

독립운동이 침체되고 태평양전쟁의 그림자로 암울했던 1940년대, 윤동주 시인은 민족의 앞날에 대한 걱정과 개인적인 고뇌, 희망에 대한 믿음을 시에 녹여냈다. 그는 조선어 수업이 폐지되고 민족문화가 사라지려는 위기 상황 속에서, 송몽규, 백인중, 강처중 등 동급생들과 함께 ‘민족적 작품합평회’를 개최하여 민족의 정신과 문화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또한, 송몽규, 고희구 등과 함께 민족의식 일깨우기 위한 구체적인 운동방침에 대해 논의하기도 했다. 민족의 정체성을 잃지 않기 위해 조선민중을 문화적으로 계몽하려 했던 그들의 활동은, 형태만 달리했을 뿐, 본질적으로 의열투쟁이나 만세운동과 같은 독립운동이었다.

다음날, 우리는 오사카로 이동해 윤봉길 의사가 한 달 동안 수감되었던 위수형무소가 있던 ‘오사카성’을 방문했다. 그 외에도 독립운동을 포함한 사회운동과 관련된 역사를 간직한 건물과 장소들을 찾았다. 대표적으로 ‘오사카 사회운동 현창탑’과 ‘텐노지 공원’, ‘오사카 중앙공회당’이 있었는데 특히 텐노지 공원은 1927년 6월 1일 조선총독부의 폭압정치에 반대하는 시위가 일어난 곳이었다.

이번 여정의 마지막 사적지는 ‘오사카 중앙공회당’이었다. 중앙공회당은 1924년 3월 10일 재일한인들이 조선인학살 규탄대회를 열었던 곳으로 독립운동 외에도 여러 사회운동과 노동운동이 일어난 곳이다. 특히, 일본 공산당이 창당초기에 본거지로써 사용한 곳으로 일본 전국의 사회주의 운동가들이 모여든 곳이었다. 노동운동은 민족주의운동에 비해 보편적이어서 파급력이 크고 다양한 집단과 교류할 수 있었기에, 당시 많은 조선인들이 노동운동에 참여하며 독립운동에 대한 실마리를 얻었다. 현재는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어 제국주의 시절 공산당의 활동에 관한 자료를 찾아볼 수 있다.

오사카 중앙공회당은 재일 한인들의 조선인 학살 규탄대회, 노동운동 관련 행사 등을 열었던 곳으로 지난 1924년 3월 10일, 조선인 학살 규탄대회 때 조선인 7000명이 참가했다. [사진=서재원]
오사카 중앙공회당은 재일 한인들의 조선인 학살 규탄대회, 노동운동 관련 행사 등을 열었던 곳으로 지난 1924년 3월 10일, 조선인 학살 규탄대회 때 조선인 7000명이 참가했다. [사진=서재원]

이곳을 마지막으로, 우리는 국외독립운동사적지탐방의 모든 일정을 마쳤다. 일본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내며 이번 사적지탐방이 나에게 어떤 의미를 전해주었는지에 대해 생각을 정리했다.

탐방 일정을 마치고 공항으로 이동하는 버스 안에서 이번 여정을 같이 한 장진규 씨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학과를 전공한 그는 이번 탐방 사적지를 참가자들 중 가장 유심히 살펴보고, 가이드의 말에 가장 귀를 기울인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일본에 있는 독립운동사적지가 대체적으로 흔적만 남아있고, 두드러지게 보존된 것이 많지 않은 것에 안타깝다”며 “우리가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져야만 사적지가 보존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이번 탐방을 통해 내가 얻은 교훈은 그리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 평범한 사람들이 혼란의 시대에서 태어나 투쟁의 길로 뛰어들었다. 민족의 문화와 정신,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서 말이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이라는 윤동주 시인의 ‘서시’에 나오는 구절이 떠올랐다. 암울했던 시대에 그들이 두려움을 무릅쓰고 홀연히 일어나 의로운 일을 하려했던 것은 어쩌면 스스로에게 떳떳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하고자 하는 일이 나 자신뿐만 아니라 민족전체를, 그리고 미래를 살아갈 후손들을 위한 것이라고 믿었기에 그들은 ‘평범함’에서 더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어찌 보면 그들은 누구보다 미래지향적인 사람들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들이 이루어 놓은 평화의 시대를 살아가는 후손으로서, 또 그들의 정신을 이어받은 후손으로서, 나는 과연 무엇을 위해,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까? 무엇이 되었든 그것이 나뿐만 아니라 주변사회와 세상을 위한 일이어야 한다고 조심스레 결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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