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왕에 폭탄 투척한 이봉창의사 제87주년 의거 기념식
일왕에 폭탄 투척한 이봉창의사 제87주년 의거 기념식
  • 문현진 기자
  • moon_pt@naver.com
  • 승인 2019.01.07 17: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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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일(화) 오전 11시 서울 백범김구기념관에서 개최

국가보훈처(처장 피우진)는 일제에 심장부인 동경에서 일왕 히로히토에게 폭탄을 투척하여 한민족의 자존과 독립 의지를 만천하에 알린 이봉창 의사의 의거를 기리는 ‘제87주년 이봉창의사 의거 기념식’이 8일(화) 오전 11시 백범김구기념관에서 (사)이봉창의사기념사업회(회장 정수용) 주관으로 열린다고 밝혔다.

서울 효창공원(삼의사 묘역)에 있는 이봉창의사 묘소. 일왕 히로히토에게 폭탄을 투척하여 한민족의 자존과 독립 의지를 만천하에 알린 이봉창 의사의 의거를 기리는 ‘제87주년 이봉창의사 의거 기념식’이 8일(화) 오전 11시 백범김구기념관에서 (사)이봉창의사기념사업회(회장 정수용) 주관으로 열린다. [사진=코리안스피릿 자료 사진]
서울 효창공원(삼의사 묘역)에 있는 이봉창의사 묘소. 일왕 히로히토에게 폭탄을 투척하여 한민족의 자존과 독립 의지를 만천하에 알린 이봉창 의사의 의거를 기리는 ‘제87주년 이봉창의사 의거 기념식’이 8일(화) 오전 11시 백범김구기념관에서 (사)이봉창의사기념사업회(회장 정수용) 주관으로 열린다. [사진=코리안스피릿 자료 사진]

이날 기념식은 오진영 서울지방보훈청장, 독립운동 관련 단체 대표와 광복회원, 시민, 학생 등 15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개회사 및 국민의례, 이봉창의사 약사 보고, 정수용 이봉창의사기념사업회 회장의 식사(式辭), 오진영 서울지방보훈청장의 기념사, 헌화 등의 순으로 진행된다.

일왕 히로히토에게 폭탄을 투척한 이봉창 의사(1901. 8. 10~1932. 10. 10)는 서울에서 출생하여, 10살에 용산의 사립 문창학교(文昌學校)에 입학하였다. 4년 후 졸업하여 일본인 경영의 제과점 종업원으로 있다가 19세 때 남만철도회사(南滿鐵道會社) 용산정거장에 운전견습생으로 일하기도 하였다. 1931년 1월 항일 독립운동에 투신하고자 독립운동의 중심지였던 상해로 건너갔다.

임시정부를 찾아가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의 김구 단장을 만나 일왕 폭살 계획을 세우고, 일본인이 경영하는 철공소에서 일하면서 거사를 준비하였다. 특히 이때 김구 단장을 감복시킨 것은 그의 다음과 같은 인생관이었다.

"제 나이가 이제 서른 한 살입니다. 앞으로 서른한 살을 더 산다고 해도 지금까지 보다 더 나은 재미는 없을 것입니다.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지난 30년 동안에 인생의 쾌락이란 것을 대강 맛보았습니다. 이제부터는 영원한 쾌락을 위해서 독립사업에 몸을 바칠 목적으로 상해에 왔습니다."

1년여의 준비를 마치고 마침내 실행을 결심한 의사는, 1931년 12월 13일 한인애국단에 가입한 후 출국하여 12월 말 동경에 도착하였다. 일왕 히로히토(裕仁)가 1932년 1월 8일 동경 요요기(代代木) 연병장에서 신년 관병식(觀兵式)에 참석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이날을 거사일로 결정해 상해 김구 단장에게 전보를 보냈다.

이봉창 의사는 거사일인 1932년 1월 8일 동경 경시청 앞에서 일왕 행렬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가 일왕이 나타나자 그를 향해 폭탄을 투척하였으나, 폭탄은 일본 궁내대신(宮內大臣)이 탄 마차 옆에 폭발하여 일장기기수(日章旗旗手)와 근위병(近衛兵)이 탄 말 두 필 만을 거꾸러뜨리는데 그쳐, 일왕 폭살 계획은 안타깝게 실패로 돌아갔다.

현장에서 체포된 의사에게 같은 해 9월 30일 동경 대심원(大審院)은 사형을 선고했고 이봉창 의사는 10월 10일 오전 9시 2분 이치가야 형무소(市谷刑務所)에서 순국하였다.

일왕 폭살에는 실패하였지만, 그의 의거는 1930년대 한국 독립운동사를 장식하는 의열 투쟁의 선봉으로 임시정부를 비롯한 독립운동 전선에 새로운 활력소가 되어 같은 해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상해 홍커우공원(虹口公園) 의거가 일어나도록 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아울러 만보산(萬寶山) 사건이래 누적된 한중 간 감정 대립도 씻는 계기가 되었다. 그의 장거가 있자 1932년 1월 9일자 중국의 각 신문들은 동경발 기사로 이 장거를 즉각 보도하면서, "일왕이 불행히 맞지 않았다"라는 표현을 하며 그들도 일왕이 폭살되지 않았음을 매우 애석히 여겼다.

이봉창 의사의 장거가 갖는 더욱 중요한 의미는, 일본제국주의가 신격화해 놓은 일왕의 행차에 그것도 적의 심장부인 동경에서 폭탄을 투척함으로써 한국독립운동의 강인성과 한국민의 지속적인 저항성을 전 세계에 과시하였다는 데에 있었다.

이봉창 의사의 유해는 1946년 김구 선생에 의해 국내로 봉환되어 서울 효창공원(삼의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정부에서는 의사의 공훈을 기려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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