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들 독립운동을 한다면서 일왕은 왜 못 죽입니까?" 1931년 1월 중순, 조선의 한 청년이 독립운동의 중심지였던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 요인들에게 던진 말이다. 이 말은 당시 임시정부와 독립운동계의 침체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고심하던 한인애국단의 김구 단장을 고무시키기에 충분하였다. 그 청년의 이름은 이봉창으로 훗날 일왕에게 폭탄을 던진다.

이봉창의사기념사업회(회장 정수용) 주관으로 열린 이봉창(1901∼1932) 의사(義士) 순국 제86주기 추모제가 10월 10일(수) 오전 11시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 이봉창 의사 묘전에서 1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되었다.

이봉창(1901∼1932) 의사(義士) 순국 제86주기 추모제가 10월 10일(수) 오전 11시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에서 열렸다. [사진=문현진 기자]
이봉창(1901∼1932) 의사(義士) 순국 제86주기 추모제가 10월 10일(수) 오전 11시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에서 거행되었다. [사진=문현진 기자]

이날 추모식에는 오진영 서울지방보훈청장을 비롯한 독립운동 관련 단체 대표와 회원, 시민 등이 참석했다. 추모제는 개회사, 약사 보고, 추모사, 추념사, 헌화·분향, 폐회사 등의 순서로 진행됐다. 

정수용 기념사업회장은 추모사에서 “오늘은 이봉창 의사께서 바다 건너 이역 땅에서 순국하신 지 86주기를 맞이한 날이다.”며, “비록 육신의 생명은 짧았지만 숭고한 애국정신만은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불멸할 것이다.”고 말했다. 정 회장은 또한 ‘거사는 실패했지만 적중했는가, 그렇지 못 했는가 하는 것만으로 어떻게 우열을 논할 수 있겠는가?’라는 애국지사 송상도 선생의 말을 언급하며 “의거의 성공 여부가 애국선열을 기리는 유일한 잣대가 될 수 없다.”고 추모했다. 

정수용 이봉창의사기념사업회 회장이 추모사를 낭독하고 있다. [사진=문현진 기자]
정수용 이봉창의사기념사업회 회장이 추모사를 낭독하고 있다. [사진=문현진 기자]

오진영 서울지방보훈청장은 추모사에서 “32살의 초라한 행색의 조선의 한 청년 품 안에는 ‘이 한 몸 불살라 독립운동에 이바지 하겠다’는 웅대한 포부가 깃들어 있었다.”며, “이 의사의 진면목은 백범 김구 선생과의 만남으로 대한민국 독립운동역사의 한 페이지를 차지할 일대 쾌거로 이어져 침체된 독립 운동에 활로를 열었다.”고 추모했다.   

이봉창 의사 순국 제86주기 추모제에서 오진영 서울지방보훈청장이 추념사를 낭독하고 있다. [사진=문현진 기자]
이봉창 의사 순국 제86주기 추모제에서 오진영 서울지방보훈청장이 추모사를 낭독하고 있다. [사진=문현진 기자]

이어서 광복회 박유철 회장은 나종화 부회장이 대독한 추모사에서 "일제의 심장부에서, 일본제국주의의 상징의 중심에서 목숨을 던지신 이 열사의 소식은 수많은 독립 운동가들에게 뜨거운 영감을 전했다.”며, “이봉창 의사의 불꽃같은 희생정신은 조국의 역사와 현재, 미래에 살아 숨 쉬고 있다"며 의사의 애국정신을 이어가야 한다고 밝혔다. 

이날 추모식에 참가한 장광성(인천, 70세)씨는 “애국지사들을 기리기 위해 이런 추모제나 독립운동 관련 행사는 꼭 참가하려고 한다.  그런데 올 때마다 새로운 사람은 없고 똑같은 사람들만 있다. 우리 세대가 가고 나면 누가 독립운동 의사·열사들을 추모하고 기념할 것인지 걱정된다.”며, “우리 젊은 세대들이 바쁘겠지만 그래도 무엇이 중요한 것인가를 알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봉창 의사 추모제에서 오진영 서울지방보훈청장이  헌화와 분향을 하고 있다. [사진=문현진 기자]
이봉창 의사 추모제에서 오진영 서울지방보훈청장이 헌화와 분향을 하고 있다. [사진=문현진 기자]

서울에서 태어난 이봉창 의사는 10살에 용산의 사립 문창학교(文昌學校)에 입학하였으며 4년 후 졸업하여 일본인이 경영하는 제과점 종업원으로 일했다. 19세 때 남만철도회사(南滿鐵道會社) 용산정거장에 운전견습생으로 일하기도 하였다. 1925년 철도국을 사직하고 그해 말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에서 노동으로 생활했다. 1928년 11월 히로히토 일왕 즉위식을 참관하려고 교토에 갔다가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체포되어 9일간 구금되었다. 이봉창 의사는 일제의 치하에서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체포되어 구금당하는 등의 차별과 무시, 억압을 경험하자, 1931년 1월 중순 독립운동의 기회를 잡기 위해서 독립운동의 중심지였던 상해로 건너가 김구 선생을 만났다. 김구 선생에게 이 의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제 나이가 이제 서른 한 살입니다. 앞으로 서른한 살을 더 산다고 해도 지금까지 보다 더 나은 재미는 없을 것입니다.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지난 30년 동안에 인생의 쾌락이란 것을 대강 맛보았습니다. 이제부터는 영원한 쾌락을 위해서 독립사업에 몸을 바칠 목적으로 상해에 왔습니다."

이봉창 의사가 한인애국단에 입단하며 찍은 기념사진이다. [사진=국가보훈처]
이봉창 의사가 한인애국단에 입단하며 찍은 기념사진이다. [사진=국가보훈처]

이후 두 사람은 뜨거운 동지애로 의기투합하여 일왕폭살계획을 추진하게 되었다. 1931년 12월 13일 김구가 이끄는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에 가입하며, 다음과 같은 선서를 함으로써 결의를 다졌다. “나는 적성(赤誠)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적국의 수괴를 도륙(屠戮)하기로 맹세하나이다.”

1932년 1월 8일 이 의사는 도쿄 앵전문(櫻田門) 앞에서 일왕 히로히토의 행렬이 나타나자 때를 놓치지 않고 군중 속에서 몸을 일으켜 일왕을 향하여 수류탄을 투척하였다. 안타깝게도 수류탄은 일왕을 맞추지 못하고 말았다. 그는 현장에서 피체되었고 같은 해 9월 30일 동경 대심원(大審院)에서 사형을 언도받아 1932년 10월 10일 오전 9시 2분 시곡형무소(市谷刑務所)에서 순국하였다. 비록 그가 일왕 유인을 폭살하는 데 실패하였지만, 그의 장거는 1930년대 독립운동사를 장식하는 의열투쟁의 선봉이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이봉창 의사의 선언문에는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적국의 수괴를 도륙하기로 맹세했다.'는 결의가 담겨 있다. [사진=국립중앙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이봉창 의사의 선언문에는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적국의 수괴를 도륙하기로 맹세했다.'는 결의가 담겨 있다. [사진=국립중앙박물관]

1946년 김구 선생은 일본에 있던 이봉창 의사의 유해를 국내로 봉환하여 효창공원(삼의사 묘역)에 안장했다. 정부는 이 의사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효창 공원 북쪽 높은 동산 위에는 백범(白凡) 김구(金九)의 묘소가 자리 잡고 있다. 그 동쪽 다른 동산에는 이봉창(李奉昌)·윤봉길(尹奉吉)·백정기(白貞基) 3의사(義士)의 묘가 있다. 3의사 묘 바로 옆에는 유해를 찾지 못해 비석도 세우지 못한 안중근 의사의 가묘가 있다. 

효창공원은 백범 김구 선생을 비롯한 여덟 분의 독립유공자가 안장되어 있으나, 독립유공자의 정신이 깃든 공간이 아닌 한낱 공원으로 방치되고 있다는 논란이 있다. 이에 국가보훈처는 3.1운동과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계기로 효창공원의 독립운동기념공원화를 추진하기로 결정하였다. 

효창공원은 서울시 용산구 효창동 255번지 일대에 51,800평의 규모로 사적 제330호(1989)로 지정되어 있다. 2007년과 2013년 국회에서 두 차례 효창공원 국립묘지 승격을 추진하였으나 무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