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창한 4월의 봄날이었다.  25일 (사)우리역사바로알기에서 효창공원과 백범김구기념관 답사를 가는 날이다. 효창공원의 정문인 창열문 앞에서 모였다. 
 

▲ 효창공원 정문인 창열문. 25일 (사)우리역사바로알기에서는 효창공원과 백범김구기념관을 답사했다.

먼저  임시정부요인 묘역을 갔다. 임시정부요인 묘역에는 세 분이 계셨다. 왼쪽부터 군무부장을 역임한 조성환, 임시정부 주석과 의장을 지낸 이동녕, 국무원비서장이었던 차이석의 묘이다. 사실 이 세 분의 이름은 낯설고 어렵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교과서나 위인전에서 흔히 나오는 분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설을 들으며 여러 가지를 알게 되었다. 이동녕 선생이 당시 여러 노선으로 나뉜 독립운동계를 하나로 모으기 위해 마지막까지 노력하셨고, 무엇보다 가문의 연고도 지인도 학력도 두드러질게 없었던 김구 선생이 임시정부에서 일 할 수 있도록 곁에서 큰 도움을 주신 분이라는 걸 알자 가슴이 뭉클해졌다.

▲ 임시정부요인 묘역에는 군무부장을 역임한 조성환, 임시정부 주석과 의장을 지낸 이동녕, 국무원비서장이었던 차이석 독립투사가 잠들어있다.

처음엔 잘 모르고 어려워도 결코 그분들의 업적이 희미한 것은 아니었다. 모두 우리 민족을 위해 큰 뜻으로 헌신하신 분들이었다. 숙연한 마음으로 참배를 한 뒤 작은 소나무가 줄지어 자라난 계단을 내려오며 생각했다. 이 분들에 관해 더 공부해야겠다. 이렇게 잘 알려지진 않았어도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치신 분들을 소중히 기억하고 이 분들의 뜻을 널리 전하는 것이 나의 소명이라고.

임시정부요인 묘역 다음으로 삼의사 묘역에 갔다. 삼의사 묘역에는 윤봉길 의사, 백정기 의사, 이봉창 의사가 계신다. 삼의사는 한 분 한 분이 뜨거운 불꽃처럼 삶을 마무리하신 분들이다. 한 번 그 분들의 어록을 읽어보면 가슴이 뜨거워지고 눈물이 난다.

▲ 삼의사 묘역에는 윤봉길 의사, 백정기 의사, 이봉창 의사가 계신다.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하여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 잔 술을 부어 놓아라. 그리고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아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 어머니의 교육으로 성공하여라. 동서양 역사상 보건대 동양으로 문학가 맹가가 있고 서양으로 불란서혁명가 나폴레옹이 있고 미국의 발명가 에디슨이 있다. 바라건대 너의 어머니는 그의 어머니가 되고 너희들은 그 사람이 되어라.“
-윤봉길의사가 어린 두 아들에게 보낸 유언

왼쪽 끝을 보면 가묘가 있는데, 바로 안중근 의사의 빈 묘소이다. 광복 후 김구 선생님은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의사의 유해를 무사히 본국으로 안치했다. 그리고 안의사의 유언에 따라 중국 뤼순감옥에 있는 유해를 다시 본국으로 되돌리려 했으나 안타깝게도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서거하였다. 광복 후 70년. 아직 안중근 의사의 유해는 먼 타지에 있다.  어느 곳에 있는지 아직 모른다.  이것은 우리에게 남겨진 중요한 숙제이다.

삼의사 묘소의 계단에는 넉자의 한자가 새겨져 있다. 유방백세(遺芳百世). 꽃다운 이름이 후세에 길이 전한다는 뜻으로 김구선생님의 친필 휘호이다. 꽃처럼 아름다운 뜻의 향기가 백년이 지나도록 전해지기를.

▲ 백범 김구 선생 묘역.

조금 높은 돌계단을 오르면 다른 곳보다 더 큰 봉분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백범 김구 선생님의 묘이다. 일생을 우리 민족의 자주 독립과 통일에 몸담은 민족의 영원한 지도자가 저 곳에 묻혀계신 것이다. 눈 앞에서 큼지막한 봉분을 보니 눈물도 나고 가슴이 뛰놀았다. 서거 66주년, 대한의 푸른 하늘과 나비가 노니는 잔디 아래서 백범 김구 선생님은 어떤 모습으로 우리를 관조하고 있을까.
백범 김구 선생님의 묘소. 묘의 정중앙에는 넓적한 돌로 만들어 놓은 상돌이, 그 앞에는 장명등이 있다. 양 옆에는 망부석이 있고 망부석과 장명등 사이에 비석이 있다. 자세히 보면 망부석에는 도마뱀이 조각되어 있는데, 도마뱀은 꼬리를 잘라도 몇 번이고 다시 재생하여 불멸을 뜻한다.

한강의 기적. 자신의 시대만큼이나 굶주리고 배고프고 혹독한 환경은 아니지만 아직 완벽한 자유를 찾지 못한 대한민국을 바라보며, 또 민족의 미래를 노심초사하며 누워 계시지 않을까. 그럴 것이다. 틀림없이 그럴 것이다. 왜냐하면 백범 김구 선생님이 꿈꾸던 자주독립이란 단순히 우리가 누군가의 속국에서 벗어난 상황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혼, 정신이 억압받지도 지배받지도 않고 세계 속에서 우뚝 선 것 일 터이니까.

▲ 의열사에서 묵념을 하고 방명록을 작성했다.

 잠겨 있어서 안을 볼 수 없었던 의열사는 예약하여 들어갈 수 있었다.  의열사는 효창공원에 있는 일곱 분의 영정이 모셔져 있는 곳이다. 묵념 후에 방명록을 남겼다. '4월의 밝은 날에, 여러분들을 뵐 수 있어 행복합니다. 나라를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뚯을 잊지 않고 전하겠습니다.'

의열사에서 나오는 길. 연둣빛 이파리가 싱그럽고 하늘은 눈이 시리도록 푸르다. 오늘 처음으로 4월이 이토록 아름다운 달이라는 것을 알았다.

 점심을 먹고 백범김구기념관에 갔다. 백범김구기념관은 겨레의 지도자 백범의 생애를 조각, 영상, 애니메이션, 유물 등 다양한 시청각 자료로 표현한 곳이다. 백범김구기념관에 가기 전에 <백범일지>를 꼭 읽어볼 것을 추천한다. 기념관이 <백범일지>의 내용을 토대로 전시가 되어 있어서, 텍스트로 바라본 백범 김구 선생의 이미지를 통해 더 생생하게 재구성하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제 1전시관의 입구에 있는 글귀. 김구 선생님이 남긴 글 <나의 소원>의 일부분이다. <나의 소원>을 읽어보면 백범 김구 선생님이 바라던 대한민국이 얼마나 아름다운 국가인지를 알 수 있다. 김구 선생님은 우리 민족이 제각기 교육에 힘써 높은 정신과 문화의 힘으로 세계와 인류를 평화롭게 하는 민족이 되기를 원하셨다.

▲ (사)우리역사바로알기 강사들이 백범기념관을 답사했다.

혹자는 백범 김구가 이상주의자에다가 현실의 국제정세에 어두웠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나는 김구 선생님이 우리 민족의 영원한 지도자라고 생각한다. 첫째로 그 분은 ‘우리나라가 독립국만 되면 나는 나라에서 가장 미천한 자가 되어도 좋다.‘ 고 할 만큼 개인의 사욕을 버리고 오로지 독립에의 열망을 다진 분이셨다. 둘째는 <나의 소원>에 나온 대한민국이 시대가 지났음에도 가치가 변하지 않는 비전이며  누구보다 크고 아름다운 빛으로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백범김구기념관을 끝으로  답사를 마쳤다. <나의 소원>의 구절 하나하나가 집에 가는 길, 지하철에서 아른거려 가슴에 돌을 얹은 듯 무겁고 먹먹했다. 한 번 이 뜻을 잊지 말고 이어나가겠다고 다짐한 만큼, 내 수양에 더 힘써야겠다는 굳게 다짐했다. 

벤자민인성영재학교 2기 학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