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이 예쁜 4월 18일 토요일 아침 우리역사바로알기 강사들이 북한산에 모였다. 이날 답사는 북한산 국립공원 둘레길 2코스인 북한산 순례길이다. 아름다운 자연 속에 있는 대일항쟁기 독립유공자들의 묘역을 둘러보며 나의 자리를 다시 확인해 보는 소중한 시간이다.

▲ 북한산 둘레길에 있는 봉황각.

먼저 향한 곳은 봉황각. 의창수도원이라고도 하는 이곳은 천도교 제3대 교주인 의암 손병희 선생이 1910년 세운 곳이다. 선생은 이곳이 천도교의 신앙생활을 심어주는 한편, 일본의 식민지하에서 지도자들에게 역사의식을 심어주는 수련장으로 활용하고,  이곳에서 3.1운동을 구상했으며 이곳을 거쳐 간 이들이 3.1운동의 주체가 되도록 애쓰셨다.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니 그 당시의 유물이 남아있고, 얼마 전 행사가 있었던 흔적과 손병희선생의 초상화가 있었다. 왠지 가슴이 뭉클하고 의연해 지는 곳이었다. 봉황각의 지붕과 북한산의 봉우리가 멋들어지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봉황각 바로 옆에 있는 손병희 선생의 묘는 평소에는 꼭 닫혀 있는 곳인데, 우리는 운이 좋게 참배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묘의 규모나 묘지석의 크기만으로도 그 분의 위대함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먼저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여러 학교를 설립하신 분으로서, 민족대표 33인의 대표라는 설명을 들으니 얼마나 크게 노력하셨는지 알 수 있었다.

▲ 의암 손병희 묘소.

솔밭길을 거쳐서 작은 언덕들을 오르고 내리며 예쁜 봄하늘 아래에서 봄을 맡고 꽃을 즐기며 강재 신숙 선생님 묘소로 갔다. 어려서 신동이었던 신숙 선생은 일찍이 정치사상에도 관심을 갖고 동학에 입교하고, 단발도 하였다. 국민일보 기자로 일하다가 친일매국 행각에 반년 만에 사표를 내고 인쇄국 교정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하지만 신숙선생은 1910년 인쇄국에 강제 구류되어 조약문과 융희황제의 칙유문을 교정하여야만 하였다. 나라를 위하는 맘이 누구보다 컸던 그가 그 일을 해야만 했던 것은 정말 괴로웠을 것이다. 하지만 선생은 3.1운동이 추진될 때 독립선언서의 교정과 인쇄 작업을 맡으며 그 아픔을 조금을 씻으려 더욱 애썼을 것이다. 나라를 위하는 일은 마음만으로는 힘든 상황이 있었던 것을 배운 좋은 계기인 것 같다.

▲ 강재 신숙 선생의 묘소에 참배하고 선생의 독립운동을 들었다. 선생은 3.1 독립선언서의 교정과 인쇄 작업을 맡았다.

우리는 점점 무거워지는 발걸음에 힘을 내어 심산 김창숙 선생님 묘소로 향한다. 조선의 마지막 선비였던 김창숙 선생은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대궐 앞에 나아가 을사오적의 목을 베라고 상소하여 옥고를 치렀고, 독립운동을 하다 일제에 심한 고문과 옥살이를 당하여 앉은뱅이가 되었다. 재판을 받을 때 일본 법률을 부인한다는 대쪽 같은 뜻으로 변호를 거절하였고 옥살이를 택한다. 광복 후 유교이념에 입각한 교육의 중요성을 토대로 성균관대학을 설립하고 초대총장에 취임하였다. 김창숙 선생의 묘는 순례길 입구에서 구불구불 길을 따라가야 묘역에 다다를 수 있다. 소중하고 귀한 곳을 꼭꼭 숨겨놓고 쉬이 내어 보이지 않는 마음이 읽혀지는 묘역이었다.

▲ 단주 유림 선생 묘소 앞 섶다리.

다시 또 순례길을 걷다보며 졸졸 흐르는 시내가 나오고, 흐드러지게 핀 꽃나무들이 잔치를 열고 있다. 그곳을 떡 하니 버티고 있는 섶다리가 보이면 단주 유림 선생의 묘에 다다른 것이다. 이름이 그리 익숙하지 않은 유림 선생은 13세 때 경술국치를 맞아 손가락을 잘라 ‘충군애국’이라는 혈서를 쓰고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어쩌면 시대를 너무 앞선 생각을 하신 탓에 힘드셨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유림 선생의 이상은 강제 권력을 배격하고 전 인류가 최대한의 민주주의 하에서 다 같이 노동하고 다 같이 사상하는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었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역사바로알기 강사들이 외치는 홍익인간이 아니겠는가! 유림 선생은 사상을 달리한다고 여긴 딸도, 아들도, 그리고 아내도 보지 않고 사셨지만 죽음 앞에서 모든 사람은 똑같다는 말씀에서는 진한 아쉬움을 읽게 된다. 유림 선생이 떠나고 나니 이 나라가 비었다고 여긴 김창숙 선생의 추도사에서 유림 선생의 존재의 무게를 조금이나마 알게 된다.

섶다리를 건너 꽃비를 맞으며 가다보면 엄청난 높이의 계단 위에 성재 이시영 선생의 묘소가 있다. 그 계단의 왼쪽에는 중국 각 지역에서 일본군과 싸우다가 전사한 광복군 17위의 합동묘소가 있다. 이시영 선생의 묘에 비하면 초라하지만 절대 이분들을 지나칠 수가 없다. 광복군은 얼어 죽을 각오, 굶어죽을 각오, 일본군의 잔혹한 고문을 이겨낼 각오를 굳게 하며 노력하셨으니 그 희생과 마음을 우리가 더욱 나서서 알리고 기억해야 할 것이다.

▲ 순례길에 벚꽃이 활짝 피어 봄기운이 완연하다.

계단을 올라 이시영 선생의 묘소에 인사를 드리고 선생의 일생을 되짚어본다. 이회영 선생의 동생으로 경술국치 후 모든 재산을 정리하고 만주로 망명했다. 어느 하나 남부러울 것이 없던 선생이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고 생사를 알 수 없는 만주로 망명한 것이 1910년이니, 선생의 나이 40대였다. 그곳에서 선생은 만주에서 독립전쟁을 위한 기지를 건설하고 인력을 양성하였다. 조상 대대로 누려온 권리와 명예를 고스란히 포기하고 떠난 것이다. 돌아온다는 기약도 없으므로 사실상 대가족이 모두 망명길에 오른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해방 후 6형제 중 이시영 선생만 살아서 돌아오셨고, 대한민국 정부의 첫 부통령을 지내셨다. 선생은 항상 목소리를 낮추고 자신을 내세우지 않으면서 자신의 자리를 지켜낸 분이었다. 그분의 업적도 중요하지만 그분의 인성을 더욱 닮고 싶다고 생각했다. 높은 계단 끝에 올라서 뒤돌아보면 놀랄 풍경이 펼쳐진다. 좋은 땅에 잠들어계신 이시영 선생이 하늘에서나마 편하시길 빈다.

순례길의 마지막 코스 일성 이준 열사의 묘역에 들어섰다. 툭 트인 공간에 이준 열사의 모습이 새겨진 묘역은 순례길 묘역 중 제일 멋진 곳이다. 후손들에 의해 관리도 제일 잘 되는 곳인 듯 하고 여러 행사가 열렸던 흔적들을 볼 수 있다.

▲ 헤이그특사 이준 열사의 묘역.


우리나라 제 1호 검사라 할 수 있는 이준 열사의 뜻을 기리기 위해 2011년 서울대 법대 앞에 이준 열사의 동상이 세워졌다고 한다. 단지 법률관에 머무르지 않고 특사로서 국가의 지도자 역할까지 했다는 점에서 법대 학생들에게 귀감이 되리라는 의미이리라. 그 젊은 피에 헤이그특사의 임무를 수행하지 못한 후 얼마나 비통하였을까. 그가 남긴 많은 어록들은 지금 우리들에게도 큰 울림이 된다. “땅이 크고 사람이 많은 나라가 큰 나라가 아니고, 땅이 작고 사람이 적어도 위대한 인물이 많은 나라가 위대한 나라가 되며, 위대한 인물은 반드시 조국을 위하여 조국의 생명의 피가 되어야 한다.” 비록 나는 이 땅에서 우리조국의 어떤 피가 되고 있는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힘든 발걸음, 긴 코스, 더운 날씨에 강사들이 힘들었지만 순례길을 돌면서, 독립유공자들을 느끼면서, 또 봄에 힐링하며 한층 더 성장했을 답사임에 나를 움직이게 해준 무거운 다리에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