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11일 날씨가 화창했다. 낙산 답사를 위해 (사)우리역사바로알기 회원들과 혜화문(惠化門)서 만났다. 혜화문은 서울 성곽의 4소문 중 하나이다. 처음엔 이름이 홍화문(弘化門)이었는데, 이후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과 이름이 같아 혼동을 피하기 위해 혜화문이라고 고쳤다고 한다. 

▲ 혜화문은 서울 성곽의 4소문 중 하나이다. 처음엔 이름이 홍화문이었는데, 이후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과 이름이 같아 혼동을 피하기 위해 혜화문이라고 고쳤다고 한다.


서울 성곽의 4소문을 직접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혜화문을 보니 많은 게  느껴졌다. 북대문인 숙정문이 대부분 닫혀 있어 실제로 도성의 북쪽을 드나들던 관문은 북소문인 창의문(자하문)과 동서문인 혜화문이었다고 한다. 특히 함경도와 강원도에 살던 백성들이 주로 이 문을 통과했다. 멀고 험한 여정 끝에, 혜화문을 통과하는 옛 사람들의 기분은 어떠했을까? 백성의 어버이인 임금님이 계신 한양은 당시 조선에서 최고의 문물이 드나들고 무수한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이는 장소였을 것이다. 혜화문을 지나던 사람들의 가슴이 얼마나 뛰놀았을지 반추해 보니 덩달아 설렜다.

▲ 혜화문 천장에는 봉황을 그려넣었다. 인근에 새로 인한 피해가 많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혜화문의 천장에는 봉황이 난다. 당시 혜화문 부근은 새로 인한 피해가 상당해서 예방하는 마음으로 봉황을 그려 넣었다 한다. 우리 선조들의 백성을 사랑하는 애민정신을 엿볼 수 있는 그림이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생각보다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는 깔끔한 단청과 돌의 모습이 의외였다. 대일항쟁기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것을 1992년 비슷한 모습과 위치에 복원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역사 곳곳에 남아있는 일제강점기의 아픈 흔적들. 이제 그 잃어버린 역사와 정신을 찾아 소중히 지켜야겠다.

▲ 서울 성곽길.

혜화문에서 조금 이동하니 서울성곽길이 보였다. 성곽 앞에서 해설을 들었다. 서울 성곽은 딱 짚어 말할 수 없는 문화재다. 민중과 군인들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이 함께 건설했고 수 세기동안 계속 복원되거나 축성되었기 때문이다. 태조, 세종, 숙종, 순조, 그리고 현대의 박정희 대통령까지. 각자 다른 특징이 있어 성곽의 돌마다 시간의 흐름을 느낄 수 있다.  이제까지 성곽에 관해서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직접 눈여겨보니 새로웠다. 돌 틈을 비집고 자라난 개나리. 올망졸망한 게 비죽 나와 있으니 귀엽기도 하고, 식물의 강인한 생명력에 마음이 숙연해졌다.

▲ 낙산의 가장 높은 고지에 올라 서울 시가지를 내려다 보며 해설을 들었다.

낙산은 산이라고 부르기 민망할 만큼(?) 경사가 낮다. 그러나 언덕은 제법 꾸준히 있는 편이다. 올라오니 인왕산, 백악산, 남산 등 한양의 주산들과 내산들이 한꺼번에 눈에 들어왔다. 정도전과 무학대사가 한창  '조선의 도읍지를 어디로 삼을까' 하며 열띤 논쟁을 하고 있었는데 태조 이성계가 산이 감싸고 강이 흐르니 이곳이 좋겠다며 직접 도읍을 정했다고 한다. 신라의 수도 경주가 한쪽에 치우쳐 불편함이 많았는데, 한양은 팔도에서 거리가 거의 균등하여 보다 편리했다는 기록도 있었다니 우리가 생각보다도 더 좋은 곳에 살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 이화 마을에는 벚꽃이 활짝 피어 봄을 알렸다.

 고지에서 내려오면 이화마을이 있다. 활짝 만개한 벚꽃나무 아래 평상에서 점심 식사를 했다. 눈이 부실 정도로 하얀 꽃과 새파란 하늘 아래서 다 같이 점심을 나눠먹으니 더 맛있게 느껴졌다. 이런 것도 답사의 즐거움 중 하나가 아닐까. 내려오는 길에 피어있던 라일락. 보랏빛이 날 듯한 꽃내음이 향긋하다. 복숭아꽃, 명자나무, 산수유….  4월의 답사는 색색의 봄꽃과 함께하여 더 즐겁다.

서울 한복판에 서있는 흥인지문을 마지막으로 헤어졌다. 시간상 들러보지는 못했지만 한양도성박물관도 바로 근처에 있다. 다음에는 가봐야지.

▲ 흥인지문에서 혜화문, 낙산 답사를 마무리했다.

오늘의 낙산 현장학습은 한양의 산이나, 성벽, 도성의 문처럼 평소 생소하게만 느껴지던 것들을 접하는 계기가 되었다. 직접적인 지식보다는 성곽의 무겁고 두터운 돌을 직접 하나 하나 쌓아 올렸을 숱한 민초들의 마음을 헤아려보고, ‘삶과 죽음의 경계’와 같이 문이 주는 양면적인 의미에 고심해보기도 했다.

서울은 건물을 짓기 전에 땅을 파보면 대부분 유물이나 유적이 있다는 해설사의 말처럼, 수 백년 동안 수도였던 서울이 더 특별한 공간으로 와 닿았다. 예전에도 광화문에서 빌딩거리 한복판에 투명한 바닥으로 보존해둔 옛 집터를 본 적이 있었는데, 만감이 교차했다. 개발도 좋지만 보존 역시도 크나큰 가치가 있다. 성곽이나 혜화문처럼, 앞으로도 서울의 더 많은 유물이 우리 곁에 남아 옛 이야기를 들려주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