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볕은 화창하나 바람이 쌀쌀한 지난 11월 15일 토요일 오후 1시가 조금 지나 우리역사바로 알기의 강사들은 금동초 4~6학년 아람단 친구들을 만났다. 단복 위에 점퍼를 입은 아이들은 호기심 가득한 눈을 두리번거리며  조를 맡은 강사들과 흥례문과 광화문 사이에서 인사를 나누었다. 이번 금동초는 다른 학교 현장답사에 비해  시간 여유가 많다.  오늘의 조는 바로 2조. 남학생 3명과 여학생 6명 이렇게 우리는 광화문으로 향했다.

광화문에서 남쪽을 향해 바라본다. 조선 태조가 경복궁을 지을 당시 이 거리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때도 이 거리는 넓은 길이었다.  양쪽으로 임금님을 도와 국가가 잘 운영될 수 있게 하는 여러 관청들 중 궁궐 밖에 자리잡은  궐외 각사가 있었다. 육조와 지금의 서울시청에 해당하는 한성부, 법원과 경찰청 역할을 하는 의금부, 그리고 관리들을 감찰하는 사헌부 등이 있었다.
광화문 양쪽에 있는 저 동물석상은 뭘까? 전설 속에서 정의를 상징하는 동물로 알려져 있는 해치이다. 다투고 있는 두 사람 중 거짓을 말하는 사람을 뿔로 받아버린다고 한다. 원래의 위치는 80m정도 남쪽으로 위치하여 누구든지 말에서 내리라는 하마비의 역할도 하였다. 자 이제 경복궁의 첫 번째 문인 광화문을 통과하여 경복궁 여행을 시작해보자.

▲ 광화문은 5대 궁궐의 정문 중 유일하게 석축으로 쌓았고 그 위에 2층의 목조건물을 올렸다. 또한 무지개 모양인 홍예를 볼 수 있는 것도 광화문이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

경복궁은 우리나라의 으뜸 궁으로서 궁궐의 교과서라고 불린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에 의해 완성되어 사용되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보조 역할을 위해 창건한 창덕궁 또한 임진왜란 때 불탔으나 이 궁을 먼저 복원하면서  이 궁궐이 실제적인 으뜸 궁 역할을 하게 되어 경복궁은 270년간 사용하지 않았다. 고종 때 흥선대원군이 소실된 경복궁을 다시 지었다. 그렇기에 경복궁은 조선 전기 왕들의 이야기가 남아있으며 일제 강점기에 일본에 의해 계획적으로 훼손된 흔적들도 남아있다.

두 번째 문인 흥례문이 우리를 반긴다. 왕이 있는 공간까지 가려면 문을 몇 개 통과해야 할까? 바로 세 개 이다. 세 번째 문인 근정문을 들어가기 전에 몇 가지를 알아보자. 지금은 물길이 말랐지만 궁궐에는 외부의 나쁜 기운이 왕의 공간 안으로 못 들어오게 막는 금천이 흐른다. 그 위를 건너는 다리인 영제교를 지나면서 좌우를 둘러보자. 물을 따라 들어오는 나쁜 기운을 겁주어 쫓아 버리려는 서수 또는 천록이라 부르는 전설 속 동물 네 마리가 지키고 있다. 그런데 이 네 마리 중 유독 한 마리만이 다른 얼굴 모습을 하고 있다.  이렇게 만듦으로써 네 귀퉁이에 모두 있으면서 완전한 숫자인 삼을 구성 할 수 있는 우리 선조들의 지혜와 해학을 한번 느껴보자.

▲ 5대 궁궐에 있는 금천교의 이름은 모두 다르다. 금천은 마을 앞에서 무서운 얼굴로 나쁜 기운을 막고 있는 장승과 같은 의미이다. 경복궁 금천교는 영제교라 한다. <사진 = 우리역사바로알기>.

근정문을 들어가기 전에 왼쪽 모서리에 위치한 기별청을 바라본다. 왕의 비서기관인 승정원에서 소식을 알리는 곳이다. 오늘날의 청와대 기자실이라고 할 수 있겠다.

"마지막 문인 근정문을 들어가기 전에 왕이 거닐었던 삼도를 조금 걸어볼까? 문신을 위한 오른쪽과 길과 일화문, 무신을 위한 왼쪽길과 월화문. 해가 달보다 격이 높지? 조선은 무신보다는 문신을 우대하는 유교국가였다. 문신과 무신 중 어느 신하가 되고 싶니? 어떤 문으로 갈까?"

이제 왕이 정치를 하는 공간을 만나자. 넓은 마당, 조정에서 있었던 세종대왕의 즉위식과 중국의 사신을 위한 연회, 왕과 신하가 새해를 맞이하는 의식을 하는 장면을 떠올려보자. 경복궁에서 가장 큰 건물인 근정전 안을 들여다본다. 신하들이 서서 왕을 알현하는 곳이기에 바닥은 전돌로 되어 있다. 화재를 막고자 했던 선조들의 지혜를 볼 수 있는 드므와 닫집의 연꽃을 놓치지 말자. 
 월대 위의 사방신과 12간지 동물들을 찾아보고 우리는 직진 방향이 아닌 동쪽을 향했다.

▲ 조정에 깔린 박석은 화강암이다. 왕을 향해 서 있는 신하의 눈을 부시지 않게, 배수가 잘되도록 일부로 표면이 울퉁불퉁하게 깔아 놓았다. <사진 = 우리역사바로알기>.

"동쪽에 거처하는 사람은 누구일까?" 장차 이 나라를 이끌, 떠오르는 태양과 같은 존재인 세자이다. 그가 머무르는 공간이 동궁이며 그를 동궁마마라고 부른다. 이곳 자선당에서 무려 28년간 세자 수업을 받은 문종은 성실히 아버지 세종을 도와 화차와 측우기를 제안했으며 아버지의 병간호를 극진히 하였다 한다.

"우리도 문종의 지극한 효심을 본받아야겠지?"

다시 근정전을 거쳐 왕이 신하들과 앉아 편하게 공부도 하고 보고도 받으며 나랏일을 논의했던 편전인 사정전을 들러본다. 아이들과 그 건물 앞에 설치된 해시계 앙부일구를 빙 둘러서 본다. 앙부일구는 간단한 원리를 이용하여 시각뿐만 아니라 절기까지 알 수 있는 대단한 과학 발명품이다.

이제 왕의 생활공간인 강녕전을 지난다. 이 건물에는 지붕 위 용마루가 없다. 정확한 이유가 나와 있는 옛 책은 없으나 왕을 상징하는 동물이 용이기에 용의 침소 위에 또 다른 용이 올라가 있지 못하게 그리고 어두운 밤에 달빛에 하얀 용마루가 없으면 건물의 위치가 드러나지 않아 보안에 유리하다는 두 가지 설이 설득력 있다.

▲ 멀리서 은은한 향기가 풍겨올 것 같은 향원정의 주인은 명성황후이다. 원래 향원정 다리는 북쪽에 놓여 있었으나 6.25 당시 폭격으로 남쪽에서 올라오는 관람객을 위해 남쪽으로 만들었다. <사진 = 우리역사바로알기>

왕의 부인인 왕비는 침소는 궁궐의 중심에 위치한다. 그래서 중전이라 한다. 교태전의 왼쪽으로 가면 함원전이라는 왕비와 대비가 주관했던 불교행사를 치르던 곳이 있다. 이곳에서 문종의 동생이자 단종의 작은아버지였던 세조와 문수보살이야기를 들려준다. 아이들은 옛 이야기 속으로 빠져든다.

향원지는 우리나라 최초로 전기가 설치되었던 연못이다. 근대화를 시키고자 했던 고종의 열정으로 아시아 최초로 전기불이 들어왔다. 전구는 시끄러운 수력발전기 소리에 '들들불' 자꾸 고장나고 비용이 들어 '건달불'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 수정전은 세종 때 집현전이 있었던 자리다. 세조는 단종을 복위운동의 중심에 집현전학자들이 있었기에 집현전을 폐지했다. <사진 = 우리역사바로알기>

이제 건청궁으로 가보자. 이곳은 고종이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영향에서 벗어나고자 개인 돈으로 지었다. 그런데 건청궁 안 옥호루는 우리 역사상 가장 비극적이고 치욕적인 사건의 현장이었다. 당시 자꾸만 세어지는 일본의 압박을 막고자 러시아에게 도움을 요청했던 명성황후를 일본의 자객들이 경복궁 안으로 난입해 죽이고 시신을 이 옥호루에 방치했다가 뒷 녹산에서 태우는 사건이 있었다. 나라가 힘이 없어 겪은 이 치욕을 절대 잊지 않고 나라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하기를 다짐해본다.

▲ 경복궁 현장학습을 마친 서울 금동초등학교 학생들과 우리역사바로알기 강사들이 기념촬영을 했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

이제 수정전 계단에 앉아 우리들의 동선을 되새겨 보며  퀴즈를 푸는 시간이다. 마침 가방에 있던 사탕의 개수는 9개였다. 우리 2조 9명은 모두 한 번씩 정답을 맞추었고 한 개씩의 사탕을 입에 문 채 모임 장소인 흥례문을 향해 씩씩하게 걸었다. 우리 문화재에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이 담겨 있는지를 알게 된 소중한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