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두빛 나뭇잎이 싱그러운 5월이다. 9일 (사)우리역사바로알기와 효창공원을 답사하기 위해 정문인 창열문 안으로 들어갔다.

▲ 서울 효창공원 입구 창열사에서 학생들이 관람을 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서울 용산구 효창동에 있는 효창공원은 원래 정조의 아들 문효세자와 의빈 성씨의 무덤인 효창원이었으나, 대일항쟁기 때 일제에 의해 강제 이장당하고, 이름도 효창공원으로 바뀌었다. 현재는 백범 김구 선생의 묘소를 비롯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인 이동녕·조성환·차리석, 독립운동을 위해 목숨 바치신 윤봉길·이봉창·백정기 의사의 묘소 등이 있다.

▲ 효창공원 정문인 창열문.

먼저 임시정부 요인 세 분의 묘역을 갔다. 왼쪽부터 군무부장을 역임한 조성환, 임시정부 주석과 의장을 지낸 이동녕, 국무원비서장이었던 차리석의 묘가 있다. 세 분 모두 생소한 이름이었다. 해설을 듣고 나니 교과서나 위인전에 나오지 않는 분들 중에 우리가 기억해야 할 분들이 많다고 생각했다. 조성환은 무오독립선언서의 민족대표 39인 중 한 사람으로 서명하였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한 분이시다. ‘단결은 약자의 무기다’라는 명언을 남기셨다는 것을 듣고 일제의 탄압 속에서 우리 민족의 단결을 위해 애쓰신 모습이 그려져 가슴이 뭉클해졌다.

▲ 임시정부 요인 묘역.

다음으로 백범 김구 선생의 묘를 방문했다. 조금 높은 돌계단을 올라 마치 산이 둘러싼 듯 조형을 한 묘소는 우리민족의 자주독립과 통일을 외치시는 김구 선생님의 모습이 보이는 듯 하다. 묘의 정중앙에는 넓적한 돌로 만들어 놓은 상돌, 그 앞에는 장명등이 있다. 양 옆에는 망부석이 있고 망부석과 장명등 사이에 비석이 있다. 망부석에는 도마뱀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꼬리를 잘라도 다시 재생하는 도마뱀의 불멸을 뜻한다.

▲ 김구선생 묘 앞 도마뱀.

김구 선생님은 나라가 독립을 할 수 있다면 나라에서 가장 미천한 자가 되어도 좋다고 하셨다. 김구 선생님의 묘소 앞에서 대한민국은 자주 독립을 이루어냈는가, 나는 대한민국의 통일에 관심을 가지고 노력했던가 반성해 보았다.
▲ 백범 김구 선생의 묘.

희미해져 가는 과거라고 해도 그들의 업적은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는 삼의사의 묘소를 방문했다. 왼쪽 끝에 가묘가 있는데 바로 안중근 의사의 빈 묘소이다. 광복 후 김구 선생님은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의사의 유해를 본국으로 안치했다. 그리고 안중근 의사의 유언에 따라 중국 뤼순감옥에 있는 유해를 다시 본국으로 되돌리려 했으나 안타깝게도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서거하셨다. 광복 후 7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안중근 의사의 유해는 찾지 못했다. 그런데 그 뤼순감옥의 부지에 아파트가 세워질 예정이라고 한다. 무척 안타까운 일이며 하루 빨리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찾아야 할 것이다.
▲ 삼의사 묘.

의열사는 평소에는 개방하지 않지만 미리 예약을 해 놓아서 들어갈 수 있었다. 의열사는 효창공원에 있는 일곱 분의 영정이 모셔져 있는 곳이다. 묵념 후에 방명록을 남길 수 있었다. 의열사는 일곱 분의 영정이 모셔져 있고 묵념하는 중요한 장소지만 기둥의 칠이 벗겨지거나 박석이 들려있는 등 관리가 미흡해 안타까웠다.

▲ 의열사 전경.

묵념을 하고 의열사 밖으로 나오자 선선한 바람이 햇빛과 함께 불어왔다. 뒤를 돌아보자 의열사는 언제나처럼 그곳에서 우리를 지켜주고 계시는 듯하여 괜스레 가슴이 뭉클해졌다.
▲ 효창공원.

효창공원을 나와 걷자 처음 창열문에 발을 들였을 때와 똑같이 산책하는 사람들이 보이고 자동차 소리가 들려왔다. 이렇게 평온한 휴일을 보내는 것이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일생을 바치신 분들 덕분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 분들의 유언과 정신을 잊지 말고 지금의 이 고마움과 감정을 잊지 말고 앞으로 몸과 마음과 혼을 깨워 우리나라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겠다는 결심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