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일 오늘은 (사)우리역사바로알기에서 경복궁 답사를 하는 날이다. 경복궁  관람객들의 열기는 상당했다. 다들 활기차고 즐거워보였다. 서울에서 초ㆍ 중ㆍ고를 다녔다면 경복궁은 질리도록 갔을 것이다. 그만큼 경복궁은 친숙하고 익숙한 장소였다. 그러나 많이 가봤다고 해서 과연 경복궁을 잘 알고 있을까? 경복궁을 잘 아는 학생들이 몇이나 될까?

▲ (사)우리역사알기의 경복궁 답사 참가자들이 2일 경복궁 앞에 모였다.


내게는 경복궁과 관련된 잊지 못할 사건이 하나 있다. 고등학교 1학년 시절 내 동아리는 '서울역사 나들이반'이었다. 초여름 즈음 동아리 활동으로 경복궁에 왔다. 궁궐은 넓기만 하고 설명서는 얼마 없는데다가 현판은 온통 한자이고... 잔뜩 헤매다가 길도 잃어 친구들과 그늘에서 쉬고 있을 때였다. 어느 여인이 교복을 입은 우릴 향해 다가와 물었다. 유창하게 한국어를 구사하는 중국인이었다. "학생들, 혹시 여기가 뭘 하던 장소인지 알아요?” 우리는 모른다고 대답했다. 여인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학교에서 안 가르쳐줘요?" "네, 안 가르쳐줬는데요." 우물쭈물 아이들이 대답하는 사이에 여인은 등을 돌려 사라져버렸다.
아직도 내 뇌리에 '학교에서 안 가르쳐줘요?'라는 말이 생생하게 남아 있다. 충격이었다. 여인이 사라지고 나서도 우리는 한바탕 혼란에 휩싸여 있었다. '학교에서 안 가르쳐주는데 어떡하란 거냐.', '자기는 자금성 어디가 어딘지 다 아나.' 우리는 마냥 떠들어댔다. 그런데 확실한 건 우리는 경복궁을 모른다는 것이었다. 특히 당시 역사 선생님을 꿈꾸던 나에게 이건 거대한 충격이었다. 이때 내 결심은 더 단단하게 굳어졌다. 내가 선생님이 되면 반드시 아이들에게 우리의 문화유산을 알려주자고.

▲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에서는 조선시대 복식을 한 수문장 교대식을 한다.

 나 스스로가 알고 보는 것과 모르고 보는 것의 차이를 확연히 알기 때문에 이 결심은 시간이 갈수록 단단해지고 있다. 아직 부족한 게 많지만, 이번 경복궁 답사는 많은 지식을 습득하고 즐기다 온 답사였다.
경복궁의 정문 광화문에서는 수문장 교대식을 한다. 운 좋게 시간에 맞춰 볼 수 있었다. 시간은 다음과 같다.
수문장 교대의식 : 10시, 13시, 15시 / 1일 3회 / 소요시간 20분
광화문 파수의식 : 11시, 14시, 16시 / 1일 3회 / 소요시간 10분

어른, 아이, 외국인 등등 모두가 집중해서 보았다. 의상과 복식 모두 15세기의 것을 재현한 것이라 한다. 혹시 광화문 앞을 지날 때면 멋진 교대식을 볼 것을 추천한다.

 조정으로 들어가기 전까지 총 3개의 문을 거친다. 궁궐의 정문인 광화문은 임금이 세상과 소통하는 곳이었다. 두 번째로 중문이자 '예(禮)를 널리 편다'는 뜻의 흥례문, 그리고 세 번째는 정전의 입구인 근정문이다.

▲ 영제교라는 다리 난간 양쪽에 있는 4마리 중 한 마리 서수. 천록이라는 상상의 동물이다. 잡귀나 사악한 무리가 접근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영제교라는 다리 난간 양쪽에 있는 4마리 중 한 마리 서수. 천록이라는 상상의 동물이다. 잡귀나 사악한 무리가 접근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4마리 중 한 마리는 표정이 다른데, 혀를 쏙 내민 재미있는 생김새 덕분인지 아이들에게도 인기가 많다.

영제교 밑으로 금천이라는 물이 흐른다. 조선의 궁궐은 정전의 문 앞에 명당수가 흐르도록 하는 것이 정석이었다고 한다. 배산임수의 풍수에 따라 임금의 공간을 명당으로 만들기 위한 장치가 바로 금천이다.

'전'은 가장 격이 높은 건물에 쓰이는 호칭이다. 근정전은 경복궁의 법전으로 국왕의 즉위식과 대례 등이 거행되었던 곳이다.

▲ 근정전은 경복궁의 법전으로 국왕의 즉위식과 대례 등이 거행되었던 곳이다. 전각 앞에는 품계석이 줄지어 있다.


근정전을 둘러싼 돌로 된 단을 월대라고 하는데, 이 월대 밑에 있는 넓은 마당을 조정이라고 한다. 이 조정 마당에는 양 옆으로 품계석이 있다. 품계석은 총 24개로 동쪽에는 문신이 서쪽에는 무신이 선다. 고로 이 조정에 문무대신이 서게 되는데 그래서 조정대신이라는 말이 나왔다고 한다. 조정 마당에는 돌이 깔려 있는데 이 돌의 이름을 박석이라 한다. 처음에는 멋도 없는 박석을 왜 깔았는지 영문을 몰랐다. 알고 보니 깊은 뜻이 담겨 있었다. 박석 표면이 울퉁불퉁하므로 궁궐에서는 함부로 뛰어다니지 않고 예를 갖추라는 뜻을 알자 숙연해졌다. 또 박석은 폭우가 내릴 때 물이 한꺼번에 차지 않고 박석 사이로 흘러나가게 하는 기능도 있다.

▲ 경복궁 근정전은 회랑으로 둘러싸여 적절한 비례 관계를 유지하면서 주위 환경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조정 옆 회랑을 자세히 보면 층계가 있는데, 총 3단이다. 조정이 북에서 남으로 살짝 기울어져 있다. 최근 해마다 폭우로 인해 광화문광장 일대가 침수되는 것과 달리 경복궁은 침수되지 않고 무사하다. 그것은 경복궁 곳곳에 장치되어 있는 이러한 배수시스템 덕분이다. 600년 전 건축물에 침수피해를 막는 혜안이 담겨 있다니 정말 우리 조상의 지혜가 위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왕비의 생활공간인 교태전 후원에 있는 아미산의 굴뚝은 육각 모양에 십장생과 사군자의 무늬를 장식했다.


세자의 생활 공간인 자선당. 동쪽은 해가 뜨는 방향이므로 봄의 기운을 뜻했다. 그래서 자선당은 동쪽에 위치하고 동궁이라 하여 세자를 동궁이라 칭하기도 하였다.
비현각의 내부. 자선당 옆에 있는 비현각은 세자가 공부를 하고 업무를 보던 공간이다. 비현각의 내부를 보니 생각보다 훨씬 좁았다. 게다가 일국의 군주가 될 세자의 공간이라기에 몹시 검소했다.
왕비의 생활공간인 교태전 후원에 있는 아미산. 조선의 왕비는 궐 밖에 나갈 수 없었다. 그래서 왕비를 위해 궁 안에 만들어 둔 산이 아미산이라는 인공산이다. 경회루를 판 흙을 쌓아 만들었다고 한다. 아미산은 산이라고 하기에 야트막한 언덕에 가깝지만 무시할 수 없을 만큼 깊은 뜻이 담겨있다. 우리 민족의 혈인 백두산에서부터 북한산 아래 백악까지 이어지는 정기를 아미산에서 이어받아 건강한 원자를 출생하고자 하는 바람이 담긴 곳이다. 
아미산의 굴뚝은 유홍준 교수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굴뚝’ 이라며 극찬한 굴뚝이다. 육각 모양에 십장생과 사군자의 무늬가 있다. 정말 굴뚝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예술적인 미를 갖추었다.

 밖으로 나와서 경회루를 보았다. 경회루는 수많은 엽서, 사진 등을 통해 등장해 경복궁에서 가장 유명한 건축물일 것이다. 그 만큼 몇 번을 보아도 사람을 매료시키는 아름다움을 지닌 건축물이기도 하다. 유유히 흔들리는 버드나무 가지와 희미한 하얀 바위산을 배경으로 잔잔한 초록 연못 위 그림처럼 떠있는 경회루.
이런 경회루를 건축한 사람은 바로 박자청이다. 박자청은 노비출신이나 뛰어난 건축 기술로 종 1품까지 오른 인물이다. 실제로 한양도성 내 대부분의 건물은 박자청이 지은 것이다. 태종이 박자청에게 경회루를 지으라고 하며 2-3년의 시일을 줬는데 박자청은 설계부터 완공까지 단 10개월 만에 완성했다고 하니, 그야말로 천재 건축가이다.

▲ 자선당 옆에 있는 비현각은 세자가 공부를 하고 업무를 보던 공간이다.


경회루는 외국사신에게 연회를 열거나 과거 시험을 본 곳이었으며 왕이 허락한 신하들만 드나들 수 있는 공간이었다. 경회루와 관련된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세종 때 구종직이라는 하급 관리가 경복궁 숙직을 하게 되었다. 그는 소문으로 전해지는 경회루의 아름다움이 몹시 궁금해 몰래 경회루로 들어온다. 그 때 세종도 마침 경회루로 들어온다. 세종이 몰래 들어온 구종직의 담대함을 예사로이 보지 않고 글을 읊어보라 지시하자, 구종직은 그 자리에서 '춘추'를 처음부터 끝까지 외운다. 왕은 이에 흡족해 하여 구종직에게 높은 벼슬을 내렸다는 이야기이다.

▲ 경복궁 내 경회루는 외국 사신을 위한 연회를 열거나 과거를 치르던 곳이었다.

경복궁은 단순한 옛 궁궐이 아니다. 지금 근정전의 지붕은 우리도 탄복할 만큼 복잡한 구조 로 이루어져 있다. 일제가 광화문을 철거할 당시, 아이러니하게도 광화문 철거 반대 운동에 앞장선 것은 일본인이었다. 그는 ‘우리가 지금도 지을 수 없는 저 위대한 건축물을 보존하여야 한다.’ 고 말했다. 경복궁은 현대의 과학 기술도 따라 잡지 못한 문화유산의 산물 중 하나이다. 경복궁에는 건축 기술의 지혜 뿐 아니라 선조들의 우주와 인간, 자연을 내다보는 깊은 이치와 철학이 담겨 있다.
다사다난한 역사 끝에 우리의 곁에 남은 경복궁은 현재 고종 시절과 비교하여 25% 정도이다. 문화재청은 2011년부터 2030년까지 20년 동안 고종 시절의 75%까지 복원한다는 계획이다. 그 뜻은 우리 역사에서 경복궁이 계속 살아 숨 쉰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경복궁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유동적인 건축물이다.
서울 시내 한복판에 있어 누구나 친근하게 찾아올 수 있는 경복궁. 찾아오는 많은 사람들에게 매 순간마다 경복궁이 새롭고 신선한 의미로 태어났으면 좋겠다. 

베자민인성영재학교 2기 이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