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 하얼빈 역에는 세 발의 총성이 울렸다. 우리나라 침략의 원흉이자 동양평화를 파탄시킨 이토 히로부미가 그 총성에 쓰러졌다. 이토 히로부미를 향해 총을 쏜 한국의군 참모중장 안중근은 “코레아 우레(한국 만세)”를 크게 세번 외치고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다. 

(사)안중근의사숭모회(이사장 김황식)와 안중근의사기념관(관장 이영옥) 주관으로 열린 안중근(安重根, 1879~1910) 의사(義士) 의거 제109주년 기념식이 10월 26일(금) 오전 10시 서울 안중근의사기념관에서 3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되었다. 

10월 26일 오전 서울 중구 안중근의사기념관 강당에서 '안중근 의사 의거 109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사진=문현진 기자]
10월 26일 오전 서울 중구 안중근의사기념관 강당에서 '안중근 의사 의거 109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사진=문현진 기자]

이날 기념식에는 피우진 국가보훈처장, 정갑윤 국회의원, 안건영 안중근함 부함장, 권오성 前 육군참모총장과 김형오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회 회장을 비롯한 독립운동 관련 단체 대표와 회원, 시민 등이 참석했다. 

기념식은 개식사, 국민의례, 약전봉독, 의거의 이유 낭독, 기념식사, 내빈기념사, 안중근장학금 수여식, 기념공연, 안중근의사 노래 제창, 만세 삼창, 폐식 순으로 이루어졌다. 

이용옥 안중근의사기념관장은 약전봉독에서 “대한국인 안중근 의사는 나라를 위하여 몸 바치는 숭고한 애국정신과 불멸의 동양평화사상을 우리들에게 남기셨다.”며, “민족정기의 화신이며, 장군이시며, 교육가이며, 사상가이신 안중근 의사의 업적은 우리 한민족과 아시아인 및 전 세계인에게 사랑받고 영원히 빛날 것”이라고 밝혔다. 

안중근함 임수훈 대위가 ‘의거의 이유’를 낭독했다. “내가 이토를 죽인 것은 한국독립전쟁의 한 부분이요, 또 내가 일본 법정에 서게 된 것도 전쟁에 패배하여 포로가 된 때문이다. 나는 개인 자격으로 이 일을 행한 것이 아니요. 한국의군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조국의 독립과 동양평화를 위해서 행한 것이니 만국공법에 의하여 처리하도록 하라.”  

안중근의사숭모회 김황식 이사장이 기념사를 하고 있다. [사진=문현진 기자]
안중근의사숭모회 김황식 이사장이 기념사를 하고 있다. [사진=문현진 기자]

이어서 안중근의사숭모회 김황식 이사장은 기념사에서 “안 의사의 하얼빈의거는 우리나라 국권을 빼앗고 동양평화를 짓밟은 이토 히로부미의 죄상과 일제의 야욕을 만 천하에 낱낱이 밝히고 처단한 위대한 항거였다.”며, “조국의 독립만이 목적이 아닌 동양평화, 더 나아가 세계평화의 길을 제시한 숭고한 정신의 실천으로 민족과 세계에 그 울림이 컸다.”고 말했다. 또한 “안중근 의사의 유해는 순국한 지 100년이 지나서도 찾지 못하고 있다.”며,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피우진 국가보훈처장은 기념사에서 "109년 전 오늘 하얼빈에서는 세 발의 총성이 울려 퍼졌다.”며, “처음 한 발은 우리나라의 독립을 향한 외침이었고, 다음 한 발은 동양 평화를 위한 경종이었고, 마지막 한 발은 세계 평화를 염원하는 울림이었다.”고 말했다. 또한 안 의사를 세계평화주의자라고 칭했다. 

국가보훈처 피우진 처장이 26일 서울 안중근의사기념관서 열린 하얼빈 의거 109주년 기념식에서 기념사를 하고 있다.  [사진=문현진 기자]
국가보훈처 피우진 처장이 26일 서울 안중근의사기념관서 열린 하얼빈 의거 109주년 기념식에서 기념사를 하고 있다. [사진=문현진 기자]

 

박유철 광복회장은 기념사에서 “잊지 못할, 잊어서는 안 되는 안 의사의 역사적인 의거가 109년 전 오늘 있었다.”며, “남과 북은 내년 3·1운동 100주년 남북 공동 기념행사 개최 및 안 의사의 유해 발굴 공동 조사와 생가복원에 한 뜻으로 움직이고 있는데 안 의사의 유해를 하루 빨리 되찾기를 소원한다.”고 밝혔다.         

이날 기념식에서 (사)안중근숭모회가 안중근 장학금을 수여했다. 육군사관학교 3학년 나호선 생도, 국민대학교 2학년 김현희, 건국대학교 3학년 원준기, 강원대학교 3학년 이명원, 경희대학교 3학년 이병원 학생이 장학금을 받았다. 2003년부터 장학생을 선발해 지급하는 안중근 장학금은 학생들이 안중근 의사의 고귀한 애국정신과 평화사상을 본받고 실천하도록 독려하기 위해서 지급된다.   
 
이후 서울대학교 비바 앙상블 그룹이 안용희가 작사·작곡한 ‘대한국인 안중근’ 노래를 제창했으며, 안중근의사숭모회 강덕기 고문의 선창을 따라 모든 참가자들이 만세 삼창을 외치며 기념식이 마무리되었다. 

안중근의사 의거 109주년 기념식에서 서울대학교 비바 앙상블 그룹이 기념 공연을 하고 있다. [사진=문현진 기자]
안중근의사 의거 109주년 기념식에서 서울대학교 비바 앙상블 그룹이 기념 공연을 하고 있다. [사진=문현진 기자]

안중근장학금을 받은 강원대학교 사학과 3학년 이명원(춘천, 25세)씨는 “2014년도에 만주에 가서 독립군의 발자취를 탐색해 보았고 올해 6월에도 다녀왔다.”며, “위대하고 용감한 안중근 의사의 정신과 숭고한 역사를 더 많이 공부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다.”고 소감을 밝혔다.   

안 의사는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나 한학(漢學)을 배우고 무술을 연마하였다. 말타기와 사냥에 능했으며 포수들 사이에서도 명사수로 이름을 알렸다. 25세 때 평양에서 석탄상점을 경영하였으나 이듬해 을사조약이 체결되는 것을 목격하고는 사업을 정리하였다. 1906년 삼흥학교를 세우고, 남포의 돈의학교를 인수하여 인재양성에 힘썼다.

그러나 국운(國運)이 극도로 기울자 합법적인 방법으로는 나라를 바로세울 수 없다고 판단한 안 의사는 1907년 연해주(沿海州)로 가서 의병운동에 참가하였다. 1909년 동지 11명과 죽음으로써 구국투쟁을 벌일 것을 손가락을 끊어 맹세하고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를 결성하였다. 그해 10월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재무상과의 회담을 위해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처단하기로 결심하고 계획을 세웠다. 

1909년 동지 11명과 죽음으로써 구국투쟁을 벌일 것을 손가락을 끊어 맹세하고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를 결성하였다. [사진=안중근의사숭모회]
1909년 동지 11명과 죽음으로써 구국투쟁을 벌일 것을 손가락을 끊어 맹세하고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를 결성하였다. [사진=안중근의사숭모회]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에 잠입한 안 의사는 러시아군의 군례를 받는 이토에게 세 발의 총알을 명중시켜 사살하였다. 또한 하얼빈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 궁내대신 비서관 모리 타이지로, 만철 이사(滿鐵理事) 다나카 세이타로 등에게 중상을 입히고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뤼순감옥에 수감된 안 의사는 1910년 2월 14일 일본 법정의 마지막 공판에서 사형이 언도되었다. 그 해 3월 26일 오전 10시 뤼순감옥 소장이 사형 집행문을 낭독하고 최후의 유언을 물었다. 안 의사는 “이토 처단은 동양평화를 위해 결행한 것이므로 앞으로 한일 두 나라가 화합하여 동양평화에 이바지하기 바란다.”고 말했다. 오전 10시 15분경 안 의사의 순국을 검시관이 확인했다.

육군사관학교 사관 생도생이 안중근 의사 영정을 바라보며 서있다. [사진=문현진 기자]
육군사관학교 사관 생도생이 안중근 의사 영정을 바라보며 서있다. [사진=문현진 기자]

일본정부는 안 의사의 유해가 밖으로 나갔을 때 독립운동의 상징이 될 것을 두려워하였다. 그래서 안 의사의 유해를 뤼순감옥 죄수 묘지에 묻고 유해를 찾지 못 하도록 아무런 표시도 해두지 않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안중근 의사의 업적을 기려 1962년 3월 1일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정부는 지난 8월 개최된 남북의 평양공동선언에서 남과 북이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공동으로 기념하고 안 의사의 유해를 함께 발굴하기로 합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