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안중근의사숭모회(이사장 김황식)와 안중근의사기념관(관장 유영렬) 주관으로 안중근(安重根, 1879~1910) 의사(義士) 순국 109주기 추모식이 3월 26일(화) 오전 10시 서울 안중근의사기념관에서 6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되었다. 

이날 추모식에는 안 의사의 유족과 오진영 서울지방보훈청장, 정갑윤 국회의원, 권오성 前 육군참모총장, 박유철 광복회장, 김형오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회 회장을 비롯한 독립운동 관련 단체 대표와 회원, 시민 등이 참석했다. 특히, 안 의사를 추모하기 위해 스가와라 토시노부(菅原敏允, 86) 미야기현 구리하라시 국제교류협회 회장과 가와시마 야스미(川嶋保美) 전 미야기현 의회 의원 등 20여 명의 일본 인사도 참석했다.  

(사)안중근의사숭모회와 안중근의사기념관 주관으로 안중근(安重根, 1879~1910) 의사(義士) 순국 109주기 추모식이 3월 26일(화) 오전 10시 서울 안중근의사기념관에서 6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되었다. [사진=문현진 기자]
(사)안중근의사숭모회와 안중근의사기념관 주관으로 안중근(安重根, 1879~1910) 의사(義士) 순국 109주기 추모식이 3월 26일(화) 오전 10시 서울 안중근의사기념관에서 6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되었다. [사진=문현진 기자]

추모식은 개식사, 국민의례, 약전봉독, 최후의 유언 낭독, 추모사, 내빈추모사, 추모공연, 감사패 전달, 헌화, 폐식 순으로 진행됐다. 

유영렬 안중근의사기념관장은 약전봉독에서 “대한국인(大韓國人) 안중근 의사는 우리 민족의 위대한 영웅이며 민족정기의 표상으로, 후세에게 남긴 위국헌신의 정신과 불멸의 평화사상은 천추에 빛날 것"이라고 밝혔다.

김민재 육군사관학교 생도가 ‘최후의 유언'을 낭독했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옮겨 묻어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국권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고국으로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된 의무를 다하여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당부해 다오.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김민재 육군사관학교 생도가 ‘최후의 유언'을 낭독하고 있다. [사진=문현진 기자]
김민재 육군사관학교 생도가 ‘최후의 유언'을 낭독하고 있다. [사진=문현진 기자]

이어서 안중근의사숭모회 김황식 이사장은 추모사에서 “오늘은 안 의사가 대한의 독립과 동양평화를 염원하다 그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이역만리 타지에서 순국한 109주기가 되는 날이다”며, “작년 2월, 양국 관계를 우려하는 일본의 지식인 200여 명이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반성과 참회만이 한일관계를 지속 발전시키는 열쇠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러한 때에 109년 전 순국한 안 의사의 정신과 사상을 되새기는 것은 바람직한 한일관계로 나아가고자 하는 우리의 노력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안중근의사숭모회 김황식 이사장이 추모사를 낭독하고 있다. [사진=문현진 기자]
안중근의사숭모회 김황식 이사장이 추모사를 낭독하고 있다. [사진=문현진 기자]

피우진 국가보훈처장은 오진영 서울지방보훈청장이 대독한 추모사를  통해  "109년 전 안 의사는 형장에 이슬로 생을 마감하기 직전까지 오로지 조국 독립과 평화의 뜻을 지켰으며, 그 뜻을 동포들이 이어가길 당부했다"며, "이 같은 숭고한 뜻은 안 의사가 생전에 보여준 수많은 위업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마침내,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에 울펴러진 세 발의 총성은 일제의 탄압에 신음하던 우리 민족을 일깨웠다"고 말했다.  
  
박유철 광복회장은 기념사에서 "조선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며 일본 제국주의에 당당히 맞섰던 안 의사는 옥중에서도 동양평화론을 저술해 후세들이 평화의 뜻을 이어나갈 수 있도록 했다."고 말했다. 또한, "후손된 자로서 아직도 찾지 못한 안 의사의 유해를 하루 빨리 되찾기를 소원한다”고 강조했다.         

이어서, 안중근 의사의 일대기를 그린 뮤지컬 '영웅'의 출연배우 강태을과 리사가 추모공연을 진행했고, 안중근의사숭모회가 안중근 의사의 사상과 업적을 널리 알린 이들에게 감사패를 수여했다.    

안중근 의사의 일대기를 그린 뮤지컬 '영웅'에서 안 의사 역을 맡은 배우 강태을이 추모 공연을 하고 있다. [사진=문현진 기자]
안중근 의사의 일대기를 그린 뮤지컬 '영웅'에서 안 의사 역을 맡은 배우 강태을이 추모 공연을 하고 있다. [사진=문현진 기자]

감사패를 받은 3인은 서울 중산고교 교사 이봉규(58), 택시운전사 박상순(74), 前 요코하마 시립중학교 교사 스즈키 히토시(鈴木仁, 66)이다. 스즈키 히토시 교사는 재직했던 학교에서 수업을 통해 일본 내에서 암살자 또는 테러리스트로 인식되고 있는 안중근 의사를 올바로 알리기 위해 적극 노력해왔다. 또한, 매년 우리나라 전북 전주 근영중학교를 찾아 한국학생들에게도 안중근 의사를 제대로 알리는 데 힘을 쏟았다.

추모식에 참가한 최재혁(중산고, 17) 군은 "학교에서도 안중근 의사의 위업과 사상을 배웠지만, 오늘 추모식에서 안 의사가 의거를 하면서 느꼈던 감정이나 의식을 크게 공감할 수 있었다. 안 의사의 용기와 의지가 감동적이다"고 소감을 밝혔다.  

안중근의사숭모회 김황식 이사장이 안 의사의 사상과 업적을 알린  요코하마 시립중학교  스즈키 히토시(鈴木仁, 66)  前 교사에게 감사패를 수여했다. [사진=문현진 기자]
안중근의사숭모회 김황식 이사장이 안 의사의 사상과 업적을 알린 요코하마 시립중학교 스즈키 히토시(鈴木仁, 66) 前 교사에게 감사패를 수여했다. [사진=문현진 기자]

 스가와라 토시노부 미야기현 구리하라시 국제교류협회 회장은 "안 의사는 동양평화론을 주창한 위대한 인물"이라고 평했다. 또한, "일본 헌병이었던 치바 도시치(千葉十七)는 중국 뤼순 감옥에서 매일 안중근을 감시하다가 안 의사가 훌륭한 인물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며, "안 의사가 순국할 때 '나는 한국의 군인이기 때문에 한국을 위해 죽지만, 치바 당신은 일본의 헌병이니 일본을 위해 목숨을 바치라'고 말했다. 이런 인연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평화운동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스가와라 회장은 2013년부터 5년 동안 일본인 500여명에게서 성금을 모아 구리하라시에 안중근 의사와 치바 도시치의 이름을 새긴 추모비를 건립했다.

안중근의사숭모회와 안중근의사기념관 주관으로 안중근(安重根, 1879~1910) 의사(義士) 순국 109주기 추모식에 참석한 일본인 20여 명이 김황식 이사장과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사진=문현진 기자]
안중근의사숭모회와 안중근의사기념관 주관으로 안중근(安重根, 1879~1910) 의사(義士) 순국 109주기 추모식에 참석한 일본인 20여 명이 김황식 이사장과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사진=문현진 기자]

안 의사는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나 한학(漢學)을 배우고 무술을 연마하였다. 말타기와 사냥에 능했으며 포수들 사이에서도 명사수로 이름을 알렸다. 25세 때 평양에서 석탄상점을 경영하였으나 이듬해 을사조약이 체결되는 것을 목격하고는 사업을 정리하였다. 1906년 삼흥학교를 세우고, 남포의 돈의학교를 인수하여 인재양성에 힘썼다.

그러나 국운(國運)이 극도로 기울자 합법적인 방법으로는 나라를 바로세울 수 없다고 판단한 안 의사는 1907년 연해주(沿海州)로 가서 의병운동에 참가하였다. 1909년 동지 11명과 죽음으로써 구국투쟁을 벌일 것을 손가락을 끊어 맹세하고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를 결성하였다. 그해 10월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재무상과의 회담을 위해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처단하기로 결심하고 계획을 세웠다.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에 잠입한 안 의사는 러시아군의 군례를 받는 이토에게 세 발의 총알을 명중시켜 사살하였다. 또한 하얼빈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 궁내대신 비서관 모리 타이지로, 만철 이사(滿鐵理事) 다나카 세이타로 등에게 중상을 입히고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안중근 의사 생전 모습. [사진=국가보훈처]
안중근 의사 생전 모습. [사진=국가보훈처]

뤼순감옥에 수감된 안 의사는 1910년 2월 14일 일본 법정의 마지막 공판에서 사형이 언도되었다. 그 해 3월 26일 오전 10시 뤼순감옥 소장이 사형 집행문을 낭독하고 최후의 유언을 물었다. 안 의사는 “이토 처단은 동양평화를 위해 결행한 것이므로 앞으로 한일 두 나라가 화합하여 동양평화에 이바지하기 바란다.”고 말했다. 오전 10시 15분경 안 의사의 순국을 검시관이 확인했다.

일본정부는 안 의사의 유해가 밖으로 나갔을 때 독립운동의 상징이 될 것을 두려워하였다. 그래서 안 의사의 유해를 뤼순감옥 죄수 묘지에 묻고 유해를 찾지 못 하도록 아무런 표시도 해두지 않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안중근 의사의 업적을 기려 1962년 3월 1일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