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명운 의사 순국71주기 추모제 거행
전명운 의사 순국71주기 추모제 거행
  • 문현진 기자
  • moon_pt@naver.com
  • 승인 2018.11.19 15:4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1월 19일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전 의사의 숭고한 애국정신 기려

“일본의 한국지배가 한국에 유익하다. 또한 한국의 농민들과 일반 백성들은 일본인을 환영한다.” 1908년 3월 21일 대한제국 외교고문이면서 친일파인 미국인 스티븐스(Durham White Stevens)가 샌프란시스코 지역 신문사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이와 같은 망언을 하였다. 이를 안 한 한인청년은 이틀 뒤 스티븐스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으나 아쉽게도 불발되고 만다. 한인 청년의 이름은 바로 전명운 의사이다. 

11월 19일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묘역에서 '죽암 전명운의사 의거 110주년, 서세 71주기 추념식'이 열렸다. [사진=문현진 기자]
11월 19일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묘역에서 '죽암 전명운의사 의거 110주년, 서세 71주기 추념식'이 열렸다. [사진=문현진 기자]

죽암전명운의사기념사업회(회장 전무진) 주관으로 열린 전명운(1884~1947) 의사(義士) 순국 제71주기 추모제가 11월 19일(월) 오전 11시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관에서 2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되었다.

이날 추모식에는 오진영 서울지방보훈청장, 전용학 前국회의원을 비롯한 독립운동 관련 단체 대표와 회원, 시민 등이 참석했다. 추모제는 개회사, 약전보고, 추념사, 추모사, 추모헌시 낭독, 헌화·분향, 폐회사 등의 순서로 진행됐다. 

오진영 서울지방보훈청장이 추념사를 낭독하고 있다. [사진=문현진 기자]
오진영 서울지방보훈청장이 추념사를 낭독하고 있다. [사진=문현진 기자]

오진영 서울지방보훈청장은 추념사에서 “지난 세기 초 일제의 침략으로 대한제국의 운명은 급격히 기울고 있었다.”며, “전명운 의사는 국내에서 목격한 일본인들의 만행에 분노하였고 미국으로 건너가 신문물을 배우고자 했다. 그러던 중에 대한제국 외교고문이면서 일제의 국익에 앞장선 친일파 스티븐스의 천인공노할 망언을 듣고 그를 처단하고자 시도했다. 이 의거와 관련 법정에서 우리 민족의 울분과 일제의 부당함을 미국 사회와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고 추모했다.   

박유철 광복회 회장은 추모사에서 "우리 민족을 기만한 스티븐스를 처단한 후 미국의 법정에 서게 된 전 의사는 '일본이 한국의 독립을 확실히 한다고 선언하였는데 실상은 우리나라 국권을 빼앗고, 우리 재정을 흡수하고, 우리 관직을 차지하며, 헌병 순사가 전국에 가득 찼다. 그러던 중 대한제국의 외교고문이란 자가 한국인이 일본인을 환영하고 일본인에게 감복한다.'고 하니 이것은 한민족을 속이고 업신여기기는 일이라서 처단한 것이다'고 당당히 밝혔다."며, "많은 미국인까지도 전 의사의 애국심에 감탄했다."고 말했다. 

전용학 前국회의원이 추모사를 낭독하고 있다. [사진=문현진 기자]
전용학 前국회의원이 추모사를 낭독하고 있다. [사진=문현진 기자]

이어서 전용학 前국회의원은 추모사에서 “전 의사는 의거 후 일제의 집요한 추격때문에 평생을 음지에서만 생활하셔야 했다.”며, "전 의사는 일본인들의 위해(危害)를 피해 미국에서 연해주로 이주하여 안중근 의사를 만났다. 안 의사는 장차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는데 전 의사의 의거가 하얼빈 의거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알 수 있는 대목이다."고 밝혔다. 

이날 추모식에 참가한 전기수(성남, 82세)씨는 “전명운 의사 추모제에는 매번 참가하려고 한다.”며, “위태로운 우리나라를 위해 전 의사가 보인 애국충정에 항상 존경과 감사의 마음이 든다.”고 말했다.    

오진영 서울지방보훈청장이 전명운 의사의 영전에 헌화하고 있다. [사진=문현진 기자]
오진영 서울지방보훈청장이 전명운 의사의 영전에 헌화하고 있다. [사진=문현진 기자]

전명운 선생은 1884년 6월 25일 서울 종현에서 출생했다. 어려서부터 천성이 영민하고 용감하여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미였다. 1898년 10월 대한제국의 주권 수호와 근대적 민권 확대를 위해 열린 민중대회인 독립협회의 만민공동회를 참관하면서 신학문에 대한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1903년 1월 선생은 선진 강대국의 신문물을 수용하여 조국의 자주화와 근대화에 기여하고자 미국 유학길에 오르게 되었다. 

미국에서 선생은 학비와 자립자금을 모으려고 학업을 잠시 미루고 철도 공사장과 알래스카 어장 등에서 막노동을 하였다. 그러면서도 선생은 1905년 4월 안창호(安昌浩) 등이 샌프란시스코에서 조직한 항일 민족운동 단체인 공립협회(共立協會)에 가입하여 청년회에서 활약하였다. 특히 1905년 11월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되어 조국이 준(準)식민지 상태로 전락하자, 선생은 각종 토론회가 개최될 때마다 강력한 국권회복운동을 주장했다.

그러던 중 일본이 한국을 병합할 수 있는 길을 트는 데 크게 기여한 대한제국 외교고문 더램 스티븐스가 1908년 3월 21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해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일본의 한국 지배는 한국에 유익하다.”, "한국에 이완용 같은 충신과 이토 히로부미 같은 통감이 있으니 큰 행복"이라는 망언을 연이어 했다. 이에 격분한 전 의사는 그를 처단하기로 결심하고 실행에 옮겼지만 전 의사의 권총이 불발되었다. 그 때 전 의사와 같이 스티븐스를 처단하기 위해 기회를 엿보던 장인환 의사가 스티븐스를 저격하여 치명상을 입혔고, 스티븐스는 1908년 3월 25일 사망하였다. 전 의사 25세 때의 일이었다.  

전명운(1884~1947) 의사(義士)의 젊은 시절 사진 [사진=국가보훈처]
전명운(1884~1947) 의사(義士)의 젊은 시절 사진 [사진=국가보훈처]

전명운·장인환 의사의 의거 사실이 알려지자 재미 한인동포들이 양(兩) 의사의 후원회를 결성하였다. 재미동포들은 스티븐스 처단 사건의 재판 과정이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여기고 총력을 경주하였다. 전 의사는 애국심에 불타는 당당한 의거의 변(辯)으로 배심원들을 감복시켰다. 일제가 선생을 사형 또는 무기 징역을 받도록 책동을 했지만, 선생은 1908년 6월 28일 사건발생 97일 만에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 석방되었다.

전명운 의사의 의거는 의열투쟁의 첫 장을 여는 해외 거주 한인 최초의 의거로 이듬해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안중근 의거로 이어졌다고 평가한다. 정부는 전 의사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2
0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