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보성군은 10월 23일 홍암 나철기념관에서 ‘홍암 나철선생 순명 102주기 추모행사’를 개최했다. 추모제는 홍암 나철선양회(회장 정상우) 주관으로 기관·단체장, 나철 선양회, 나씨 종친회, 군민 등 2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경건하게 진행됐다.

정상우 회장은 “홍암 나철선생 기념관 개관 2주년과 함께 우리 민족의 정신적 지주로서 남기신 숭고한 정신과 사상을 기리고 받들며, 우리 고장이 의향의 성지로 거듭날 수 있도록 여러분의 많은 성원과 각별한 관심을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김철우 보성군수는 추모사를 통해 “통일에 대한 훈풍이 불면서 남북교류 사업에 대한 기대감이 한층 커지고 있는 만큼 나철선생님의 민족 사랑의 유지를 받들어 우리 보성도 농산물 재배기술 전파와 같은 방식으로 북한과 소통하고 교류해나가겠다.”고 말했다

보성군은 10월 23일 홍암나철선생순명102주기추모행사를 개최했다. [사진=보성군청]
보성군은 10월 23일 홍암나철선생순명102주기추모행사를 개최했다. [사진=보성군청]

보성군은 지난 2006년부터 선생께서 태어나신 금곡마을에 76억원을 들여 선생의 생애와 업적을 재조명하는 선양사업을 추진하여 생가 복원 등의 사업을 완료한데 이어, 사당과 기념관 건립 등의 선양사업을 적극 추진해 왔다.

보성군은 2016년 홍암 나철선생의 순명 100주기를 맞아 홍암 나철 기념관을 개관했으며, 한국 독립 운동사를 재조명하여 역사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앞으로 선열들의 애국‧애족정신을 계승하여 보성을 의향의 성지로 발전시켜 나갈 계획이다.

홍암 나철선생은 1863년 12월 2일 전남 보성군 벌교읍 칠동리 금곡마을에서 태어났다.  대종교에서 펴낸 '중광60년사'를 참고하면, 일찍이 국문을 해득한 나철은 10세에 호남의 유명한 한학자이자 술서(術書)에도 밝은 왕석보(王錫輔)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20세가 되자 나철은 대망을 품고 서울로 상경해 남산 시회에서 재능을 발휘하여 운양 김윤식의 집에 머물게 된다.

29세 때(1891. 10. 12.)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병조사정(兵曹司正) 승문원부정자를 지내다가 스스로 낙향하였다. 1895년 5월 12일 징세서장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나철은 1898년 1월부터 1901년 5월 14일까지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는 김윤식의 뒷바라지를 자진하여 맡아 신의로 돌본다.

서울로 돌아온 나철은 동양평화를 추진하고자 민간외교활동을 전개했다. 1905년 6월 동지 이 기(李沂)·오기호(吳基鎬) 등과 같이 일본에 건너가 정계요인을 역방하면서 "동양평화를 위해 한(韓)·청(淸)·일(日)이 동맹할 것과 일본은 한국에 대하여 선린의 교의로서 독립을 보장할 것"을 주장하였다. 귀국 후에는 참정대신(參政大臣) 박제순(朴濟純)과 내부대신(內部大臣) 이지용(李址鎔)이 정권 싸움을 하는 것을 보고 폭발장치를 한 상자를 보내 이들을 처단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에 다시 오적(五賊)을 제거하기로 모의하고 동지규합과 자금모집에 진력하였다. 그리하여 박대하(朴大夏)·이홍래(李鴻來) 등과 같이 권총을 구입하여 수차에 걸쳐 이들의 처단을 시도하였으나 결국은 실패하고 말았다.

그는 다시 재의거를 계획하였으나 서창보(徐彰輔)가 피체되어 사건전모가 폭로되자 평리원(平理院)에 자수하여 10년간의 유형(流刑)을 선고받아 그해 7월 12일 다수의 동지들과 함께 지도(智島)에 유배되었으나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그후 그는 평소에 믿고 있던 단군성도(檀君聖道)를 숭상하여 항일투쟁에 힘을 기울이다가 민족갱생의 도(道)는 국조단군(國祖檀君)의 교(敎)를 부활함에 있음을 깨닫고 1910년 7월에 단군교(檀君敎)를 대종교(大倧敎)로 창교(創敎)하여 제1세 교주에 추대되어 김 헌(金獻)·윤세복(尹世復)·이원식(李元植) 등과 같이 활약하였다.

그 전에 1905년 12월 30일 오후11시경 서울 서대문역에서 백두산지역에서 수도하고 있는 두암(頭巖) 백전(伯佺)을 만나다. 두암은 그의 스승 백봉(白峯)의 명을 받아 나철을 찾아와 대황조사상과 배달민족의 이상형이 담긴 ‘삼일신고’와 ‘신사기’를 주었다. 1908년 12월 5일(음력 11월 12일) 두일백이 나철의 숙소(동경 청광관)를 찾아왔다. 그는 나철에세 단군교포명서(檀君敎佈明書) 한 권을 주었다. 그리고 단군포명서에 관한 일이 나철의 사명이라고 말했다.

나철은 백두산 수도인들과의 만남을 통해 민족총화의 구심점이 대황조와 대황조의 밝고 밝은 사상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대황조사상인 홍익인간 재세이화의 이념을 부활시켜 보급함으로써 역사의 왜곡에 가려진 민족혼을 밝히고 그 불씨를 되살리려고 전력투구했다.

나철은 국수망이도가존(國雖亡而道可存: 나라가 비록 망했으나 도(정신, 국혼)는 가히 존재한다)는 신념으로 대종교 중광에 혼신을 다한다. 나철은 한민족의 민족의식 각성을 촉구했고 민족운동의 지도자들을 대종교인으로 만들어갔다. 대종교인이 중심이 되어 수많은 독립운동단체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는데, 1911년 중광단을 효시로 정의단, 불로군정서, 신민부, 서로군정서 등을 들 수 있다.

1910년 일제에 의하여 국권이 침탈되자 만주로 망명하여 북만주 10여 개소에 학교를 설립하고 교육사업을 펴는 한편 항일 구국운동에 헌신하다가 귀국하였다. 대종교 교세가 번창할수록 일제의 감시도 더욱 심해졌다. 1914년(음력) 5월 13일 나철은 30만 명 이상의 신도를 총괄하는 대종교 총본사를 백두산 가까이 있는 북간도 화룡현 청호(靑湖, 평강상리사 삼도구)로 옮겨 포교활동을 통한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그해 10월 3일 총본사에서 개천절 행사를 치렀다. 아울러 서간도 일대에 시교당을 설립하고 박달학원, 동창학교, 백산학교, 대종학원 등을 설립하여 민족교육을 실시하였다.

1915년 10월 1일 일제는 ‘조선총독부령 제83호로 종교통제안 공포’에 의거 ‘포교규칙’에서 대종교를 종교로 인정하지 않았다. 일제는 대종교가 공인종교가 아니고 민족종교로서 항일독립결사체로 보아 대종교 포교를 불법화시켰다. 나철은 그해 12월 21일 이의신청서를 총독부에 제출했지만, 일제는 대종교가 신교가 아니라는 이유로 기각했다.

대종교의 미래와 일제의 폭정에 시달리는 민족을 생각하며 심각한 고민에 빠진 나철은 1916년 8월 7일 단군이 어천하였다고 전해지는 황해도 구월산(九月山) 삼성사(三聖祠)에 가서 삼성사를 수리하여 경배식을 했다. 8월 15일 나철은 동포에게 유서를 남기고 일왕(日王)과 일의회(日議會)에 견책의 장서(長書)를 보낸 다음 국가와 교(敎)를 위하여 53세의 나이로 자결 순사(殉死)하였다.

나철의 대종교 중광과 포교활동은 그 자체로서 독립운동의 인적·사상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이는 한일병탄이후 종교단체, 언론기관, 학술단체, 독립단체를 중심으로 대종교민족운동이 활발히 추진되었다. 이로써 나철은 한국독립운동의 정신적 지주, 독립운동의 아버지가 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