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민족역사문화공원(충남 천안)에 자리한 홍암 나철 선생 동상 [제공=국학원]

홍암 나철 선생(弘巖 羅喆, 1863년~1916년)의 본명은 ‘나두영’ 또는 ‘나인영’이다. 근세조선이 기울어 가는 서기 1863(단기 4196)년 전라남도 보성에서 태어나 29세 때 문과에 급제한다. 이후 선생은 외교문서를 담당하는 승문원권지부정자를 역임하였다.

1894년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다음, 미국, 영국 등 열강들과 침략 상호 묵인체제를 구축하고 있었다. 1904년 2월, 일본은 러일 전쟁을 일으켜 러시아를 격파하고 본격적으로 조선을 핍박한다.

일본의 침략이 더욱 극심해지자 나철 선생은 관직을 떠나 호남 출신 지사들을 모아 ‘유신회’라는 비밀단체를 조직하여 구국운동을 시작한다. 을사늑약 체결 직전인 1905년 6월, 오기호, 이기, 홍필주 등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간다.

선생은 “동양의 평화를 위하여 한·일·청 삼국은 상호 친선동맹을 맺고 한국에 대해서는 선린의 교의로써 부조하라”는 의견을 일본의 정객들에게 제시하였다. 응답이 없자 일본 천황 궁 앞에서 3일간 단식투쟁을 하였으나 이미 기울어 가는 국운 앞에 모든 것이 여의치 않아 귀국한다. 이즈음, 선생은 서울에서 백전(伯佺)노인(혹은 도인, 백두산 도인 백봉의 제자)에게서 ≪삼일신고≫와 ≪신사기≫라는 두 권의 책을 받는다.

1905년 11월 17일, 결국 을사늑약으로 나라를 송두리째 빼앗기자 절치부심하던 나철 선생은 1907년 나라를 팔아먹은 ‘을사오적’을 처단하려 결심한다. 그러나 저격에 실패하여 결사대원 18명과 함께 현장에서 체포되어 10년의 유배형을 받고 무안군 지도(현 신안군 지도읍)에 유배된다.

이 사건으로 나철 선생은 일본의 침략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외교와 무력 저항보다는 민족의 재발견이 선행되어야 함을 간절하게 느낀다. 바로 단군을 정점으로 한 민족의 자긍심을 바로 찾아 국권을 회복해야 한다는 강렬한 의식전환을 하게 된다.

고종의 특사로 풀려난 선생은 동지들과 함께 서울 종로구 재동에서 ‘단군대황조신위’를 모시고 제천의식을 거행한 뒤 ‘단군교’를 공표한다. 나철 선생의 단군교는 당시 갈 곳 모르고 방황하는 지식인들에게 나갈 길을 높이 밝힌 혁명적인 미증유의 대사건이었다.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에서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고 다음 해 뤼순 감옥에서 31세의 나이로 순국한다. 같은 해 10월 24일 안동에서는 향산 이만도가 24일간 굶어 자정 순국(自靖殉國)을 감행한다.

주춤하던 독립운동이 나철 선생의 전 방위적, 적극적인 대처로 국내외에서 다시 불붙기 시작한다. ‘신단민사’와 ‘신단실기’ 같은 책들은 만주의 독립 운동가들은 한 권씩 그 책을 심장처럼 가슴에 품고 다니며 기꺼이 풍찬노숙하고 단 하나뿐인 목숨을 흔쾌히 바치게 되었다.

1915년 일제는 ‘종교통제안’을 공포하고 대종교를 불법화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교단이 폐지의 위기에 봉착하자 나철 선생은 1916년 음력 8월 15일 구월산 삼성사에서 유서를 남기고 폐식법(閉息法)으로 스스로 목숨을 거둔다.

그러나 선생이 뿌리내린 찬란한 단군조선의 정체성과 국혼회복을 위한 노력은 만주지역의 강력한 항일무장투쟁의 불을 지핀다. 1920년 홍범도 장군의 봉오동대첩,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대첩, 1933년 지청천 장군의 대전자령전투 승리 등은 모두 나철 선생이 뿌린 씨앗의 열매이다.

우리가 나철 선생의 위대한 홍익인간 정신을 기리는 것은 곧 단군의 정신을 전 국민과 전 세계에 널리 전파하는 일이다. 국학원은 전 세계의 약 1천여 곳에서 천부경과 선도 명상 등 홍익정신을 전수하고, 날로 그 영역을 넓혀 가고 있다. 그러기에 많은 국민들과 세계인들은 우리 한민족의 얼이야말로 바로 꺼지지 않는 영원한 한류가 될 것을 확신한다.


원암 장영주
(사)국학원 상임고문
전국민족단체 연합 대표회장
한민족역사문화공원 공원장
한민족원로회의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