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명운의사기념사업회는 대일항쟁기에 친일파 처단에 앞장선 죽암 전명운의사의 서세 72주년을 맞아 11월 18일 오전 11시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관에서 추모식을 거행했다.

전명운의사기념사업회는 대일항쟁기에 친일파 처단에 앞장선 죽암 전명운의사의 서세 72주년을 맞아 11월 18일 오전 11시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관에서 추모식을 거행했다. [사진=전명운의사기념사업회]
전명운의사기념사업회는 대일항쟁기에 친일파 처단에 앞장선 죽암 전명운의사의 서세 72주년을 맞아 11월 18일 오전 11시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관에서 추모식을 거행했다. [사진=전명운의사기념사업회]

전명운 의사는 1884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1904년 겨울, 20대 초반의 전의사는 노상에서 일본인 노무자들이 한국인 부녀자를 희롱하는 것을 목격하고 이 일본인들을 구타 응징하였다. 이로 인하여 일본 관헌의 추적을 받게 됐고 종현성당 신부로부터 “젊은 청년들이 서양 학문을 배워야 일본과 대적할 수 있다”는 권유를 받자 가족에게는 편지 한 장을 써놓고 인천에서 떠나는 중국 상해행 기선에 올랐다. 이듬해인 1905년 1월 상해 천주교회의 알선으로 하와이로 가는 화물선 취사부로 고용되어 태평양을 건너 9월 18일에 하와이에 도착했다. 여기서 1년 가까이 사탕수수 등 농장 일을 하다가 1906년 9월 23일 학업을 위해 본토인 샌프란시스코로 거처를 옮겼다.

전명운 의사. 전명운의사기념사업회는 대일항쟁기 전명운의사기념사업회는 대일항쟁기에 친일파 처단에 앞장선 죽암 전명운의사의 서세 72주년을 맞아 11월 18일 오전 11시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관에서 추모식을 거행했다. [사진=전명운의사기념사업회]
전명운 의사. 전명운의사기념사업회는 대일항쟁기 전명운의사기념사업회는 대일항쟁기에 친일파 처단에 앞장선 죽암 전명운의사의 서세 72주년을 맞아 11월 18일 오전 11시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관에서 추모식을 거행했다. [사진=전명운의사기념사업회]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간 전 의사는 안창호 선생의 주도로 설립한 항일단체인 공립협회에 가입하여 주로 청년회에서 활약하였다.

1908년 3월 당시 대한제국 외교고문 미국인 스티븐스가 도착 후 기자회견에서, 일본제국주의의 한국 통치를 잘된 일이며, 일제의 통치만이 한국을 발전시킨다는 간악한 거짓 내용의 망언을 서슴지 않았다. 미국 내의 독립운동단체인 공립협회(公立協會)와 대동보국회(大同保國會) 회원들이 크게 분노하여 먼저 대표자를 선출하여 스티븐스에게 보내 그의 망언을 취소하도록 요구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들 대표의 요구가 묵살되자 공립협회와 대동보국회에서는 스티븐스 처단방법을 논의하였으며, 이때 전 의사가 자원하였다.

의거 직전의 전명운 의사. [사진=전명운의사기념사업회]
의거 직전의 전명운 의사. [사진=전명운의사기념사업회]

그리하여 전 의사는 이튿날인 1908년 3월 23일 오전 9시 30분경 스티븐스가 워싱턴으로 가기 위해 샌프란시스코 주재 일본영사(領事) 소지(小池)의 안내를 받으며 페리선창에 도착하자 권총을 발사하였으나 탄환이 발사되지 않았다. 이에 전 의사는 권총을 든 채로 스티븐스에게 돌진하여 권총으로 가격하면서 발악을 하는 스티븐스와 격투를 벌였다. 이때 장인환 의사가 총탄 세 발을 발사하여 두발은 스티븐스의 가슴과 다리에, 나머지 한 발은 전 의사의 어깨에 맞았다. 그와 중상을 입은 스티븐스는 미국 경찰에 의해 병원으로 급히 옮겨졌으며 장인환 의사는 붙잡혀 구속되었다. 치명상을 입은 스티븐스는 이틀 뒤 사망했다.

전 의사는 병원에서 스티븐스를 습격한 이유를 묻는 미국 경찰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일본이 러시아와 싸우기 시작하면서 한국의 독립을 확실히 한다고 선언하였는데 지금 와서는 우리 국권을 빼앗고, 우리 재정을 흡수하고, 우리 관직을 차지하며, 헌병 순사가 전국에 가득 찼다. 그러므로 내가 미국에 와서 학업을 닦아 국가에 헌신하려던 것인데 지금 스티븐스가 각처에 통신하여 말하기를 '한국인이 일본인을 환영하고 일본인에게 감복한다'고 하니 이것은 속이고 업신여기기도 심한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이 도적을 죽이려 한 것이다."

장인환, 전명운  두 의사의 의거 현장인 샌프란시스코 페리빌딩의 현재 모습. [사진=전명운의사기념사업회]
장인환, 전명운 두 의사의 의거 현장인 샌프란시스코 페리빌딩의 현재 모습. [사진=전명운의사기념사업회]

전 의사의 이와 같은 거사 동기는 미국의 각 신문에 보도되어 미국 내의 동포들은 물론이고 미국인들까지 그의 애국심에 감탄하였다. 전 의사는 병원에서 퇴원한 후 미국 경찰에 수감되어 심문을 받다가 재미동포사회의 끈질긴 구명운동 끝에 그해 7월 무죄를 선고받아 97일 만에 석방됐다.

그 후 전 의사는 9월 러시아 연해주(沿海州)로 건너가 그곳 독립운동단체인 동의회(同義會)에 가입하여 활약하였다. 안중근 의사를 만나 하얼빈 의거를 성공시키는 데 직접적 영향을 끼쳤다.

정제우 박사(전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은 ‘전명운의 의열투쟁과 연해주 활동’이라는 글에서 전 의사의 연해주 활동을 이렇게 소개했다.

전명운 의사의 가족. [사진=전명운의사기념사업회]
전명운 의사의 가족. [사진=전명운의사기념사업회]

 

“전 의사는 블라디보스토크 한인회의 환영을 받았으며, 러시아어를 가르치는 야학에 다니기도 하였다. 공립협회 회원으로 블라디보스토크에 먼저 와 활동하던 전의사와 김성무는 1909년 5월, 국민회[미주•하와이 지방총회 공동 결의]에서 특파되어 미주에서 온 이상설 등과 동반하여 ‘시베리아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 특파원’으로 연해주 한인의 결속과 조국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즉 전의사 등은 연해주지역에 머무는 동안 공립협회 지회 설치를 주도하였다. 특히 1908년 12월에 안중근이 해삼위지회에 가입함으로써 그와 이강 회장, 오주혁 부회장, 정순만학무, 한형권 등 임원진과 회원 이치권, 기산도 등과 밀접히 교유하였다.

1908년 10월 경 전의사는 해삼위 개척촌의 이치권이 경영하는 숙소에 기숙하면서 동의회(1908.5, 연추에서 조직된 의병 등 민족운동결사)에 가입하여 임원진인 부총장 이범윤, 평의원 안중근, 엄인섭 등과 같은 회원인 함동철, 정순만, 이홍기 등과 만나 활동하였다. 특히 동년 12월에 공립협회에 가입한 안중근과는 같은 숙소에서 머무르며 교류하는 인연도 가졌다.

1909년 10월 26일에 결행된 안의사의 이등 처단의거는 스티븐스 주살의거의 전의사의 영향도 있었다고 판단된다. 10월 27일자 《경성일보(제 2 호외)》에서 「범인은 누구인가?」 표제로 일제는 이등 처단의거가 발생하자 즉각 이는 ‘제2의 스티븐스 사살 사건으로 단정, 전명운이 연해주 해삼위에 1년간 체류한 일이 있기에 범인은 전명운일 것이라고 추측 보도하였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해야 할 점은 일제가 보석을 받아 해외로 도주한 전의사의 동태에 대해 유난히 신경을 쓰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스티븐스씨 조난사건’제하의 일본 문서에 따르면 상항영사관, 연해주영사관, 조선총독부, 일본외무성 사이에 전의사의 행방을 찾는 기밀문서들이 수없이 오갔고 현지의 한국인, 일본인 밀정을 고용해 정탐 보고를 받는 등 A급 배일당으로 분류해 놓고 있다.”

전 의사는 다시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와서 대한인국민회의 임원이 되어 군자금을 모아 상해임시정부에 전달하는 등 평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이후 활동상을 정제우 박사는 이렇게 소개했다.

전남 담양에 있는 전명운 의사 의거 100주년 기념 조형물. [사진=전명운의사기념사업회]
전남 담양에 있는 전명운 의사 의거 100주년 기념 조형물. [사진=전명운의사기념사업회]

"1918년 12월, 대한인국민회 샌프란시스코 맨티카지방회 회장으로 선출된 전의사는 이듬해 3월 9일 국내의 3•1운동 소식이 전해지자 맨티카와 스탁튼, 투레시 지방의 한인들을 모아 축하회 개최를 주도하고, 50달라의 의연금을 독립운동자금으로 기부하였다. 그리고 대한인국민회 윌로우스지방 부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927년 7월 부인이 병사하고 양자와 어린 아들까지 연이어 사고로 잃은 전의사는 큰 상심에 빠지기도 했으나 가정적 불행을 극복하려는 마음에서 더욱 조국의 독립을 위해 동분서주하였다. 일요일이면 한인 연합장로교회에 나가기도하였고 또 동지회 모임에도 참석을 하였다. 3•1절 등 행사 때는 교민 모임에 초청되어 애국강연을 하였다.

1941년 12월 7일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전시봉사회를 조직하여 기금을 모아 인근 군부대 위문활동을 하였고 1942년에는 57세의 고령임에도 로스엔젤레스에 한인국방경위대(맹호군)가 편성되었을 때 복무하였다."

이렇게 조국 광복을 위해 평상을 바쳤지만, 전명운 의사는 광복이 되어서도 고국 땅을 밟지 못하고 1947년 11월 로스앤젤리스에서 별세했다.

정부는 전명운 의사를 기려 1962년 3월1일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1994년 미국 로스앤젤리스에서 유해를 봉환하여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