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욕의 역사와 함께 자랑스러운 역사를 기억하자"
"치욕의 역사와 함께 자랑스러운 역사를 기억하자"
  • 정유철 기자
  • npns@naver.com
  • 승인 2018.08.29 2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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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술국치일, 독립유공자 후손과 시민들 '국치길'을 걷다

108년 전 병탄조약이 공포된 국치일인 8월 29일 서울시민, 독립유공자 후손들과 국치의 현장을 함께 걷는 역사탐방을 했다.

‘국치길’은 100년 넘게 우리 민족과 격리된 채 역사적 흉터처럼 가려져 온 남산 예상자락 속 현장 1.7Km의 역사탐방길은 쓰라린 국권상실의 역사 현장을 시민이 직접 걸으며 치욕의 순간을 기억하고 상처를 치유하자는 의미로 명명했다.

국치길 1.7Km는 병탄조약이 체결된 ‘한국통감관저터’를 시작으로 김익상 의사가 폭탄을 던진 ‘조선통감부·총독부’터(서울애니메이션센터), 노기신사터(남사원), 청일전쟁의 승전기념으로 일제가 세운 ‘갑오역기념비’터, 일제가 조선에 들여온 종교 시설 ‘경성신사’터(성의여대), 한양공원비석, ‘조선신궁’터(구남산 식물원)까지로, 발걸음을 옮기는 자체로 시대의 감정을 체험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참가자들은 오전 서울 남산, ‘거꾸로 세운 동상’ 앞으로 모였다.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듯한 날씨에도 국치일을 기억하고자 시민 등 50여명 참석했다.

국치일에 국치길을 걷는 역사탐방은 서울시에서 경술국치일을 기억하기 위해 2015년부터 4년 째 한국통감관저터 앞의 ‘거꾸로 세운 동상’에서 진행한다.

서울시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회 서해성 감독이 29일  ‘거꾸로 세운 동상’의 의미를 해설하고 있다.  국치일에 국치길을 걷는 올해 행사에는 독립유공자 후손이 함께했다. [사진=김경아 기자]
서울시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회 서해성 감독이 29일 ‘거꾸로 세운 동상’의 의미를 해설하고 있다. 국치일에 국치길을 걷는 올해 행사에는 독립유공자 후손이 함께했다. [사진=김경아 기자]

이번 국치길 답사에는 독립유공자 후손들이 함께했다. 우당 이회영 선생의 손자 이종걸 국회의원, 백범 김구 선생의 증손자인 김용만 씨 부부, 조소앙 선생의 후손 조인래 조소앙기념사업회 추진위원장, 윤봉길 의사의 손녀 윤주경 전(前) 독립기념관장, 장준하 선생의 아들 장호권 월간 사상계 대표, 권기옥 선생의 아들 권현 광복회 의정부지사 이사가 참가하여 시민과 함께 국치길을 걸었다.

12시가 되자 답사를 안내하는 서울시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회 서해성 감독의 소개로 남성 성악가그룹 라 클라세(La Classe)가 등장, ‘압록강 행진곡’(한유한 곡)과 ‘고향(채동선 곡)을 독립운동가들에게 헌정했다. 검은 양복에 하얀 셔츠를 입은 음악가들의 노래가 사뭇 비장하게 메아리치는 가운데 참가자들은 자리에 고정된 듯했고 침묵했다. ’대지의 진혼‘이라는 주제로 한 음악 공연에 이어 현장답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서해성 감독이 ‘거꾸로 세운 동상’을 해설했다. ‘거꾸로 세운 동상’은 1905년 을사늑약 체결에 앞장서며 남작 작위를 받은 일본인 외교관 하야시 곤스케의 동상에 사용됐던 돌 조각 3점을 활용하여 거꾸로 세워 2015년 제작했다. ‘거꾸로 세운 동상’은 서울시가 광복 70주년을 맞아 국가적인 치욕을 영원히 잊지 않겠다는 의미에서 건립한 표석이다.

“일제가 강제 병탄을 할 때 이토 히로부미는 큰 틀에서 추진했고, 실무자로 일한 사람이 외교관 하야시 곤스케이죠. 병탄한 공로로 남작이라는 작위를 주고 동상까지 세웠습니다. 살아있는 사람의 동상을 우리나라에서 세운 것은 이것이 처음일 것입니다. 글을 새긴 뒷면 돌은 광복이후 흔적이 없습니다. 그 내용이 남아있으면 안 되는 사람들이 그렇게 했겠지요.”

서해성 감독은 국치와 망국에 관한 설명을 덧붙였다. “조상들은 망국(亡國)이라 하지 않고 국치(國恥)라고 했다. 나라가 망한 것이 아니라 나라가 치욕스런 일을 당했다는 의미다. 국치라고 하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저 쪽에 통감관저가 있었는데, 그곳에서 강제병합 조약을 체결했다.”

거꾸로 세운 동상 뒤편으로 통감관저가 있었던 터가 있다. 1906년 통감관저로 설치되었으며, 1910년부터 1939년까지는 조선총독관저로 쓰였다. 1910년 8월 22일 이곳에서 3대 통감 데라우치 마사다케와 총리대신 이완용이 강제병합 조약을 조인한 경술국치의 현장이다. 1939년 이후에는 시정기념관으로 쓰였다.

서울시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회 서해성 감독이 노기신사터에서 남아 있는 흔적에 관해 설명을 하고 있다. [사진=김경아 기자]
서울시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회 서해성 감독이 노기신사터에서 남아 있는 흔적에 관해 설명을 하고 있다. [사진=김경아 기자]

서해성 감독은 “윤비는 순종의 비(妃)로 책봉되어 가례하고 존호는 순정효 황후라 하였다. 1910년 8월 22일 병합 조약에 서명 날인할 것을 강요하자 윤비는 옥새를 치마 속에 숨기고 버티다가 백부 윤덕영에게 빼앗겨 나라를 잃게 되었다. 이것만 보아도 강압에 의한 것이다.”고 덧붙였다. 통감관저 터는 현재 일본군 위안부 기억의 터로 조성되었다.

답사는 통감부터인 서울애니메이션센터로 향했다. 1910년 강제병합 이후 통감부가 폐지되고 조선총독부가 설치되었다. 이곳 도로변에는 1921년 이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투척한 의열단(義烈團) 단원인 김익상(金益相) 의사의 의거를 알리는 표석과 그 옆으로 조선총독부 터임을 알리는 표석이 있다.

국치길 걷기 참가자들이 통감부터(서울애니메이션센터)에서 김익사 의사의 의거에 관한 해설을 듣고 있다. 1921년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투척한 의열단(義烈團) 단원인 김익상(金益相) 의사의 의거를 알리는 표석과 그 옆으로 조선총독부 터임을 알리는 표석이 있다. [사진=김경아 기자]
국치길 걷기 참가자들이 통감부터(서울애니메이션센터)에서 김익사 의사의 의거에 관한 해설을 듣고 있다. 1921년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투척한 의열단(義烈團) 단원인 김익상(金益相) 의사의 의거를 알리는 표석과 그 옆으로 조선총독부 터임을 알리는 표석이 있다. [사진=김경아 기자]

“김익상 의사는 27세 때 1921년 11월 이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투척하여, 건물의 일부를 파괴하였다. 여기에 좀더 넓은 공간을 마련하며 젊은 김익상 의사의 마음을 느낄 수 있도록 하면 좋겠다.” 서해성 감독은 이런 뜻을 관계기관에 전했다고 한다.

이 자리에서 조소앙 선생의 후손 조인래 조소앙기념사업회 추진위원장은 “국치일에 시민과 함께 국치길을 함께 걷는 데 큰 의미가 있다. 함께해준 시민께 감사한다”고 말했다.

답사는 노기신사터(남산원)으로 향했다. 신사(神社)는 일본의 종교시설이고 노기는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를 말한다. 일본에서는 군신(軍神)으로 받들었던 인물로, 그를 모시는 신사를 남산에 세운 것이다. 남산원에서 서해성 감독은 신사 앞에 있었던 무지개 다리 터, 신사에 들어가기 전 손을 씻는 어수수사(御手水舍) 등 일부 유적을 소개하며 노기 마레스케를 군신으로 받는 일본인과 우리와는 다른 일본인의 생사관 등을 소개했다.

노기신사터를 나와 숭의여자대학교 앞에서 갑오역기념탑, 경성신사 해설을 들었다.

“갑오역기념비는 1895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승전을 기념하기 위해 1899년에 건립한 기념비입니다. 일본은 전쟁을 역(役)이라고 하지요. 숭의여대 저 부근에 있었을 거라고 추측합니다. 경성신사는 민간인을 위한 신사지요. 조선총독부 옆에는 노기신사와 경성신사 두 개가 있었습니다. 경성신사는 숭의여대 안에 지금도 흔적이 있습니다.”

경성신사는 1925년 조선신궁이 완공되기 전까지 식민정권의 국가제사를 대행했다.

서해성 감독은 남산 순환로가 본래는 신궁으로 가는 참도(參道)였다고 한다. 동참도와 서참도 두 개가 있었다. “조선인들이 강제노역에 시달려 만든 길이지요. 그런 의미를 생각하며 순환로로 가겠습니다.”

출발하기 전 서해성 감독은 윤봉길의 의사의 손녀 윤주경 전 독립기념관장을 소개했다.
서 감독은 “윤봉길 의사의 상해 훙커우 공원(虹口公園) 거사로 임시정부가 부활하는 계기가 되었다. 중국 정부가 이후 우리 광복군을 군수물자를 대주기 시작했다. 달리 말하면 윤봉길 의사가 준 것이다. 윤봉길 의사는 거사 때 무대 뒷자리를 배정받았다. 이것을 보면 하늘이 도운 것 같다. 윤봉길 의사는 던지기를 잘 했다. 물병 폭탄이 던졌는데, 공중에서 폭파해 위력을 발휘했다.”라고 설명했다.

윤주경 전 독립기념관장은 “역사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본받을 것은 본받고 다시 있어서는 안 될 일은 반복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또한, 우리의 역사를 소중한 역사로, 자랑스런 역사로 기억하기 위해서이다. 국치길을 걸으면서 오늘 서 감독을 통해 쓰러져 가는 나라를 어떻게 붙들려고 했는지를 들었다. 그것을 통해 자랑스러워해야할 역사를 배운 것 같다. 치욕의 역사만이 아니라 제국주의라는 역사의 흐름속에서 우리가 얼마나 저항했는지, 기억하고 자랑스러워해야 하겠다”라고 말했다.

한양공원비 앞에서 국치길 걷기에 참가한 독립유공자 후손들이 기념촬영을 했다. 왼쪽부터 윤봉길 의사 손녀 윤주경 전 독립기념관장, 조소앙 선생 아들 조인해 조소앙기념사업회 추진위원장, 권기옥 선생의 아들 권현 광복회 의정부지사 이사, 우당 이회영 선생 손자 이종걸 국회의원, 김구 선생 증손 김용만 씨 부부. [사진=김경아 기자]
한양공원비 앞에서 국치길 걷기에 참가한 독립유공자 후손들이 기념촬영을 했다. 왼쪽부터 윤봉길 의사 손녀 윤주경 전 독립기념관장, 조소앙 선생 아들 조인해 조소앙기념사업회 추진위원장, 권기옥 선생의 아들 권현 광복회 의정부지사 이사, 우당 이회영 선생 손자 이종걸 국회의원, 김구 선생 증손 김용만 씨 부부. [사진=김경아 기자]

 

참가자들은 남산순환로를 지나 회현동 1가 산 1-16 한양공원비석 앞에서 섰다. 한양공원 조성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으로 전면에는 고종황제가 쓴 ‘漢陽公園’이라는 명칭을 새겼다. 뒷면 비문은 죄다 쪼아 없애 읽을 수 없었다. 한양공원은 1910년 개장되었으며, 조선신공 건설계획에 따라 사라졌다.

서 감독은 “일본인들이 제멋대로 한양공원을 조성하니 고종황제가 비문을 내려주는 것으로 이를 인정했다. 이 흔적은 한국전쟁 때 상흔이다. 이 비석에 우리나라의 아픈 역사가 느껴진다”고 설명했다. 빗속에 보이는 한양공원 비석이 애처롭다. 

한양공원비석을 뒤로 하고 간 곳은 조선신궁터(구 남산식물원). 조선신궁은 일제가 한국에 세운 가장 높은 신격을 가진 신사였다. 1918년 조성하여 1925년 완공하였고 식민지 정부의 국가의례를 집전하며 조선인의 신사참배를 강제하는 기능을 수행했다.

“이 조선신궁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이 많습니다. 종교시설으로서 기능을 하고 개인의 추억의 공간으로 삼았던 곳이 이곳이지요. 광복 후 이 조선신궁은 우리 손으로 해체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서 감독은 아쉬운 듯 이렇게 말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자, 조선신궁은 이튿날 오후에 승신식(昇神式)이라는 폐쇄 행사를 한 후 9월 7일부터 해체작업에 들어가 10월 6일까지 마무리하여 이튿날 나머지는 그들의 손으로 소각하고 철수하였다.

국치일 독립유공자 후손과 함께한 국치길 걷기 행사는 남산 안중군 의사 동상 앞에서 막을 내렸다. 안중근 의사 동상으로 독립유공자 후손들이 한 줄로 나란히 선 후 후손을 보며 한 분 한 분 독립유공자의 이름을 불렀다. “윤봉길 의사님!” 윤주경 전 독립기념관장이 인사를 했다. "이회영 선생님!" 이종걸 의원이 인사를 했다. "김구 선생님!" 김용만 씨 부부가 인사를 했다.

8월 29일 국치일 독립유공자와 함께 걷는 국치길 행사는 안중근 의사 동상 앞에서 막을 내렸다. [사진=김경아 기자]
8월 29일 국치일 독립유공자와 함께 걷는 국치길 행사는 안중근 의사 동상 앞에서 막을 내렸다. [사진=김경아 기자]

 

서해성 감독은 “독립운동가 후손들과 국치날에 국치터, 조선신궁터 등 남산을 걷는 일은 치욕을 새겨 역사를 올바로 세우기 위한 걸음이다. 망국의 회한을 한탄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국치길이 조성되면 시민 누구나 안내나 설명 없이 이 길을 따라 오르게 될 것이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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