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훈처(처장 피우진)는 독립기념관(관장 이준식)과 공동으로 독립운동가 최용덕을 2018년 9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공군참모총장 시절 최용덕. 국가보훈처와 독립기념관은 공동으로 독립운동가 최용덕을 2018년 9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사진 제공=독립기념관]
공군참모총장 시절 최용덕. 국가보훈처와 독립기념관은 공동으로 독립운동가 최용덕을 2018년 9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사진 제공=독립기념관]

독립운동가 최용덕은 군의관이었던 아버지 최익환과 어머니 태안 이씨 사이에서 1898년 3남으로 태어났다. 1910년 유학을 위해 베이징(北京)으로 건너가 공부하였다. 이후 난위엔(南苑)육군군관학교에 입학하여 체계적인 군사훈련을 받았고, 1916년 졸업한 후에는 돤치루이(段祺瑞)가 창설한 참전군 제2사단에서 근무하였다. 이러한 경험은 최용덕이 전개하는 무장투쟁에 큰 자산이 되었다.

1919년 3·1운동 소식을 접한 최용덕은 독립운동에 뜻을 품고, 대한독립청년단에 참여하여 베이징 일대 한인들을 규합하였다. 또한, 의열단에 가입하여 1923년 김상옥의사 의거를 위한 폭탄 확보와 운반에 조력하는 등 주요한 역할을 맡았다. 1924년에는 북경한교동지회를 조직하고 기관지 『앞잡이導報』를 발간하는 등 독립운동의 외연 확장을 위해 노력하였다.

중국 공군으로 활약하는 최용덕 독립운동가 소개 기사(1927. 10. 2.). [사진제공=독립기념관]
중국 공군으로 활약하는 최용덕 독립운동가 소개 기사(1927. 10. 2.). [사진제공=독립기념관]

최용덕은 대한독립청년단에서 함께 활동하던 서왈보의 권유로 공군의 필요성을 인지하고, 육군군관학교 졸업 후 바오딩(保定)항공학교에 입학하여 비행사가 되었다. 1924년에는 우페이푸(吳佩孚) 군벌의 전투기 조종사로 활약하며 일제에 맞서 싸웠다. 또한 1934년 신한독립당 창당에 참여하고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하는 등 지속적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공군사관학교 교장 시절 최용덕. 공군 창설에 기여한 최용덕은 공군이 육군으로부터 독립한 다음해인 1950년 5월 공군사관학교 교장으로 임명되었다. [사진제공=독립기념관]
공군사관학교 교장 시절 최용덕. 공군 창설에 기여한 최용덕은 공군이 육군으로부터 독립한 다음해인 1950년 5월 공군사관학교 교장으로 임명되었다. [사진제공=독립기념관]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자 최용덕은 1942년과 1943년 각각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총무처장과 참모처장을 맡으며 한국광복군의 운영과 실무를 책임졌다. 8·15광복 후 1946년에 귀국하여 군 항공부대 창설을 적극 추진하였다. 1948년 대한민국정부 수립과 동시에 초대 국방부차관으로 임명되어 국방력 건설에 힘쓰는 한편, 공군의 독립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공군이 육군으로부터 독립한 다음해인 1950년 5월 공군준장으로 승진됨과 동시에 공군에 복귀하여 공군사관학교 교장으로 임명되었다. 1952년 제2대 공군참모총장(공군중장)으로 취임하였다. 정부는 최용덕의 공적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화랑도 통계 조선군사보감' 에 실린  최용덕 친필 제자(題字)(1948년). 화랑도 계통 병법에 관한 서적으로 군사도서의 시초라 평가받고 있다. 초대 무임소장관 이청천이 서문을 쓰고 최용덕, 이범석 등이 제자를 썼다. [사진제공=독립기념관]
'화랑도 통계 조선군사보감' 에 실린 최용덕 친필 제자(題字)(1948년). 화랑도 계통 병법에 관한 서적으로 군사도서의 시초라 평가받고 있다. 초대 무임소장관 이청천이 서문을 쓰고 최용덕, 이범석 등이 제자를 썼다. [사진제공=독립기념관]

한편 독립기념관은 최용덕 독립운동가의 공훈을 기리는 전시회를 9월 1일부터 30일까지 한 달간 독립기념관 야외 특별기획전시장(제5, 6관 통로)에서 전시회를 개최한다. 전시회에는 최용덕 사진 등 7점이 전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