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김상옥의사기념사업회(회장 민승)가 주관하는 김상옥 의사 항일독립운동 96주년 기념식이 1월 22일(화) 서울 현충원 현충관에서 열렸다. 행사에는 윤종오 서울북부보훈지청장과 독립운동 관련 단체 대표를 비롯한 시민 150여 명이 참석했다.

기념식은 개회사, 김상옥 의사 소개 상영, 추모사 및 기념사, 헌화 및 분향, 폐회사 순으로 진행되었다. 

서울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열린 '김상옥 의사 항일독립운동 96주년 기념식'에서 김상옥의사기념사업회 민승 회장이 개회사를 하고 있다. [사진=김상옥의사기념사업회]
서울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열린 '김상옥 의사 항일독립운동 96주년 기념식'에서 김상옥의사기념사업회 민승 회장이 개회사를 하고 있다. [사진=김상옥의사기념사업회]

 김상옥의사기념사업회 민승 회장은 개회사에서 "과거를 통해서 현재가 있고 현재를 통해 미래가 창조된다."며, "과거 역사를 모르는 나라는 희망이 없다. 뭐가 옳고 그른지는 우리의 과거사를 통해 알게 되고 그 과거사를 통해서 반면교사 삼아 현재를 더욱 아름답고 가치있게 뿌려나갈 수 있다. 오늘 이 자리는 조국 독립의 길을 걸은 한지 김상옥 의사뿐만 아니라 모든 애국 선열들의 족적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고 밝혔다. 

이후 참석자들은 일제의 탄압속에서도 오로지 조국 광복을 위해 목숨을 받친 한지 김상옥 의사의 영정 앞에 헌화하고 분향하였다. 

김상옥의사기념사업회가 주관하는 김상옥 의사 항일독립운동 96주년 기념식에 참가한 시민들이 김상옥 의사 영정 앞에 헌화와 분향하고 있다. [사진=김상옥의사기념사업회]
김상옥의사기념사업회가 주관하는 김상옥 의사 항일독립운동 96주년 기념식에 참가한 시민들이 김상옥 의사 영정 앞에 헌화와 분향하고 있다. [사진=김상옥의사기념사업회]

한편, 3ㆍ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회가 주관하는 ‘김상옥 의사 의거 96주년 기념식’이 현충원에서 열린 기념식과 별도로 진행됐다. 100주년 기념사업회의 기념식은 김상옥 의사가 일본 군경과 격전을 벌인 장소인 대학로 36-4번지(종로5가, 효제동, 당시 어의동)에서 열렸다.

기념식은 서울을 대표하는 독립운동사 중의 하나인 효제동 의거에 대해 알리고, 기념 조형물로 남겨 김상옥 의사의 업적을 기념하고자 마련되었다.

서해성 3·1운동 100주년 서울시기념사업 총감독은 “효제동 어귀는 김상옥 의사가 일제 군경과 맞서 1대1,000으로 전투를 치른 곳이다. 이 ‘단독대첩單獨大捷’ 현장을 우리는 잘 알지 못하고 있다. 그 불패의 용기와 불패의 전승을 기리고자 한다."며, "서울시 3·1운동 100주년 서울시기념사업 첫 행사를 이곳에서 시작하는 까닭이 이것이다.”고 말했다.

한지 김상옥(金相玉) 의사(1890∼1923)는 189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20세에 동흥야학교(東興夜學校)를 설립하는 등 사회계몽ㆍ민족교육에 헌신하였으며, 3ㆍ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윤익중, 신화수, 정설교 등 동지들과 함께 비밀결사조직인 혁신단(革新團)을 조직하고 기관지 혁신공보(革新公報)를 발행해 독립정신을 고취하였다. 

그러나 김 의사는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과 수탈이 이어지자 평화적 운동이 갖는 한계를 체감했다. 이윽고 1920년 1월 초순 만주 소재 독립군단체인 북로군정서의 김동순과 만나 암살단을 조직하였다. 일제 주요기관을 파괴하고 요인을 처단하는 등 의열투쟁을 통한 독립운동을 전개해 나갈 것을 계획했다. 

1920년 8월 거사를 함께 계획하던 한훈과 김동순 등이 일제에 피체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의사는 일경의 추적을 피해 그 해 10월 중국 상해로 망명, 김구ㆍ이시영ㆍ조소앙 등 임시정부 요인들과 교류하면서 의열단에 가입하였다. 1921년 7월에는 일시 귀국하여 충청과 전라도 등지에서 임시정부 지원을 위한 군자금을 모금하였다.

1922년 11월 말, 의열단원 안홍한과 함께 폭탄, 권총, 탄환 등의 무기를 휴대하고 12월 1일 서울 잠입에 성공하였다. 김 의사는 동지들과 함께 일제 식민통치의 골간을 이루고 있던 경찰력의 대표적인 본산이자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을 탄압, 압살하던 종로경찰서 폭파와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를 처단하는 거사 계획을 세웠다. 

드디어 1923년 1월 12일 밤 8시경, 의사는 일제 식민통치의 근간이었던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여 일경 여러 명을 부상시켰다. 김 의사는 의거 후 곧바로 삼판동(현 후암동) 소재 고봉근의 집에 몸을 숨겼고,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를 처단하기 위한 다음 계획에 돌입했다. 

김상옥 의사는 혁신단, 의열단 등의 단체에서 일제 기관 파괴, 요인 암살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3년 일본 경찰과의 교전에서 자결하였다. [사진=독립기념관]
김상옥 의사는 혁신단, 의열단 등의 단체에서 일제 기관 파괴, 요인 암살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3년 일본 경찰과의 교전에서 자결하였다. [사진=독립기념관]

그러나 동대문서 한인순사 조용수의 밀고로 의사의 은신처가 탐지되었고, 조총으로 무장한 일경 14명에게 포위당했다. 정확한 사격술과 침착한 대응으로 일경을 사살하고 포위망을 탈출한 의사는 효제동 이혜수의 집에 재차 몸을 숨겼다. 또 다시 일경은 4백여명의 무장경찰을 동원하여 1월 22일 새벽 5시 반경 이혜수의 집을 포위하였다. 김 의사는 1923년 1월 22일 양손에 권총을 들고 4백여명의 일본 경찰과 교전 끝에 장렬하게 순국하였다. 당시 김 의사의 나이 34세였다. 정부에서는 의사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