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 탄압의 상징,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다
독립운동 탄압의 상징,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다
  • 정유철 기자
  • npns@naver.com
  • 승인 2020.01.22 17: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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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김구기념관에서 22일 김상옥 의사 항일독립운동 제97주년 기념식 개최

국가보훈처(처장 박삼득)는 일제강점기 의열단원으로 활동하며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고 일본 경찰과 교전을 벌인 김상옥 의사 항일독립운동 제97주년 기념식이 (사)김상옥의사기념사업회(회장 박수현) 주관으로 22일(수) 오후 3시, 백범김구기념관(컨벤션홀)에서 열렸다고 밝혔다.

이날 기념식은 김상출 서울북부보훈지청장과 유족, 독립운동 관련 단체장 및 회원, 시민 등 2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국민의례, 기념사업회장 이·취임식, 김상옥 의사 소개 영상 상영, 기념사, 유족인사 등의 순으로 진행됐다.

김상출 서울북부보훈지청장은 기념사에서 "의사는 일찍이 20세 때 동흥야학교를 설립하여 민족의 교육 운동에 심혈을 기울이셨고 3.1독립운동 이후 비밀결사인 혁신단을 조직하여 민족의 독립정신을 고취시키셨다"고 말하고 "이후 암살단을 조직하여 적 기관 파괴와 요인 암살 등의 직접적인 무력투쟁을 계획하셨으며, 마침내 1923년 1월 12일, 의열단 동지들과 함께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는 거사를 행하신 후, 수백 명의 일경과 교전 끝에

장렬하게 순국하셨다"고 김상옥 의사의 독립투쟁을 소개했다.

김상출 서울북부보훈지청장은 "의사의 의거는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을 뿐만 아니라 식민통치에 고통 받던 우리 민족에게 조국 광복에 대한 희망과 용기를 심어 준 민족적 쾌거였다"고 김상옥 의사의 의거가 지닌 의의를 언급했다.

이어 김상출 서울북부보훈지청장은 "의사께서 순국하신 지 어느덧 97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의사께서 남기신 위대한 업적은 불멸의 나라사랑 정신으로 우리 민족사에 영원히 살아 숨쉬고 있다"며 "의사의 희생이 결코 헛되지 않도록 이 나라를 더욱 부강하고 튼튼하게 발전시켜 나갈 것임을 굳게 약속한다"고 다짐했다.

광복회 김원웅 회장은 기념사에서 “항일무장 독립투쟁의 금자탑인 봉오동·청산리 전승 100주년을 맞이하여 또 다른 무장투쟁의 방략이었던 의열 투쟁에 기여하신 김상옥 의사를 생각하니, 깊은 감회가 느껴진다”며 “의사는 지방 순회를 하시는 과정에서 일제의 착취와 횡포의 현장을 많이 목격하시고 일제 헌병대를 기습하여 무기 탈취와 함께, 친일 부호(富戶)를 처단하기도 하셨다. 특히 1919년 3·1혁명 당시에는 맨손으로 무장한 경관을 때려눕히고 군도(軍刀)를 탈취했을 정도로 호협(豪俠)한 기질을 타고나신 의사는 군자금 모집에 힘쓰는 한편, 별도의 의열투쟁을 계획하고 광복단결사대 대원들과 연계투쟁을 모색하기도 하였다”고 김상옥 의사의 독립투쟁을 소개했다.

김 회장은 이어 “중국으로 망명하신 의사는 조선 총독 사이토 처단의 밀명을 띠고 다시 서울에 잠입, 종로경찰서 투탄과 조선총독 암살을 겨냥한 시가전을 벌여 일본 군경과 통치기관 관료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다.”고 말하고 “의사의 의거 직후 순국 소식은 1919년 3·1만세시위 이후 더욱 간교해진 일제의 핍박에 허덕이던 우리 국민에게 통쾌함과 비장함을 전해 주었을 뿐 아니라, 의열투쟁의 대표적인 본보기가 되어 조선의열단의 활약상을 대내외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고 김상옥 의사의 독립투쟁이 갖는 의미를 소개했다.

이어 김 회장은 “의사의 장렬한 순국 이후,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한 후세들은 부단한 독립투쟁으로 의사 의거 22년 만에 조국 광복을 되찾았다”고 말했다.

김상옥(金相玉) 의사(1890. 1. 5.~1923. 1. 22.)는 서울에서 태어나 20세에 동흥야학교(東興夜學校)를 설립하는 등 사회계몽, 민족교육에 헌신하였다. 이전부터 종사하던 철물공장을 설립하여 이윤을 분배하였던 그는 또 이종소(李鍾韶)·임용호(任龍鎬)·손정도(孫貞道) 등과 사회계몽·민족독립에 관한 일을 의논하고 실행하였다. 그리하여 백영사(白英社)를 조직하고 금주·단연운동을 크게 전개하며 말총모자공장을 설치하고 국산모자의 생산·보급에 힘쓰기도 하였다.

김상옥은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윤익중(尹益重), 신화수(申華秀), 정설교(鄭卨敎) 등 동지들과 함께 비밀결사조직인 혁신단(革新團)을 조직하고 기관지 혁신공보(革新公報)를 발행하여 독립정신을 고취하였다.

1920년 봄에는 만주에서 들어온 군정서원(軍政署員) 김동순(金東淳)과 만나 암살단을 조직하여 적 기관을 파괴하고 요인을 암살하는 등의 직접 행동으로 독립운동을 타개해 나갈 것을 계획하였다.

그해 8월에는 미국 의원단 일행이 서울에 들어오는 기회를 이용하여 한우석(韓禹錫) 등과 함께 의원단이 남대문역(지금의 서울역)에 하차하기를 기다려 시위와 총격전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의원단의 서울 도착 전날에 일부 동지들이 붙잡혀 실패로 돌아갔다.

김상옥은 일제 경찰의 수사망을 피하여 그해 10월 중국 상해로 망명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김구(金九)·이시영(李始榮)·조소앙(趙素昻) 등 임시정부 요인들과교류하면서 의열단에 가입하였고, 조국 독립을 위한 의열투쟁 의지를 키웠다.

1921년 일시 귀국하여 군자금 모집과 정탐의 임무를 수행하였고, 다시 1922년 겨울 의열단원으로 폭탄·권총·실탄 등의 무기를 휴대하고 동지 안홍한(安弘翰)·오복영(吳福泳) 등과 함께 서울에 잠입하였다. 이때 김상옥은 의열단장 김원봉(金元鳳)을 통하여 서울에 있던 의열단원 김한(金翰)과의 연락 협력을 당부받기도 하였다.

그리고 동지들에게 연락하며 거사의 기회를 노리다가 이듬해 1923년 1월 12일 밤 일제 식민통치의 근간이었던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여 여러 명을 부상케 하였다. 이후 일경을 피해 10여일간 은신하다가 1월 22일 일본 경찰과 교전 끝에 장렬하게 순국하였다.

순국 후 1924년 상해 임시정부 외교부장 조소앙(趙素昻)은 전(傳)을 지어 간행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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