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를 무대로 항일투쟁에 앞장서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를 지낸 ‘성재 이동휘 선생’ 서거 제85주기 추모식이 1월 31일(금) 오후 2시 (사)성재이동휘선생기념사업회(회장 류준형) 주관으로 국립서울현충원(현충관)에서 열렸다.

‘성재 이동휘 선생’ 서거 제85주기 추모식이 1월 31일(금) 오후 2시 (사)성재이동휘선생기념사업회 주관으로 국립서울현충원(현충관)에서 열렸다. [사진=정유철 기자]
‘성재 이동휘 선생’ 서거 제85주기 추모식이 1월 31일(금) 오후 2시 (사)성재이동휘선생기념사업회 주관으로 국립서울현충원(현충관)에서 열렸다. [사진=정유철 기자]

이날 추모식에는 양홍준 서울남부보훈지청장과 성재이동휘선생기념사업회 류준형 회장을 비롯한 임원, 독립운동 관련 단체장과 회원, 시민, 경문고등학교 학생 등 100여명이 참석해 이동휘 선생을 추모했다.

추모식은 어록낭독, 약사보고, 추모사, 헌화와 분향, 영상시청 등의 순으로 진행됐다.

어록낭독으로 기념사업회 김경태 감사가 성재 이동휘 선생이 1913년 10월 12일 권업회에서 한 연설 중에서 ‘나누면 망하고 합하면 흥하리라’라는 내용을 낭독했다.

국립서울현충원에서 31일 열린 성재이동휘선생 85주기 추모식에서 참석자들이 애국가를 부르고 있다. [사진=정유철 기자]
국립서울현충원에서 31일 열린 성재이동휘선생 85주기 추모식에서 참석자들이 애국가를 부르고 있다. [사진=정유철 기자]

 “나누면 망하고 합하면 흥하나니, 만경창파에 풍도가 위험한데, 같이 탄 배 안에서 서로 돕고 구제하지 아니하겠는가. 삼삼오오의 양의 무리가 갈 때 호랑이의 날카로운 톱을 만나면 서로 합하여 나갈 것이 마땅하지 아니한가. 과연 단합할지어다.”-이동휘 선생 어록

성재이동휘선생기념사업회 류준형 회장은 추모사를 통해 이동휘 선생이 평생을 바쳐 헌신해온 민족교육과 독립투쟁 활동을 소개했다.

(사)성재이동휘선생기념사업회 이상철 기획이사가 31일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열린 '성재 이동휘 선생 서거 제85주기 추모식'에서 이동휘 선생의 생애를 소개하고 있다. [사진=정유철 기자]
(사)성재이동휘선생기념사업회 이상철 기획이사가 31일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열린 '성재 이동휘 선생 서거 제85주기 추모식'에서 이동휘 선생의 생애를 소개하고 있다. [사진=정유철 기자]

 

양홍준 서울남부보훈지청장은 추모사를 통해 “평생 동안 조국과 민족을 위한 삶을 살다 가신 선생의 영전에 깊은 존경과 추모의 마음을 바치며 머리 숙여 명복을 빈다”며 추모했다. 이어 양 지청장은 “선생은 조국 광복을 위한 일이라면 모든 일에 앞장서며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진보적 행동성을 보여주었으나, 뜻을 다 이루지 못한 채, 1935년 63세 일기로 이국땅의 고혼이 되고 말았다”고 안타까워하고 “위대한 애국자, 눈물의 사회혁명가인 선생이 걸어온 길은 오직 독립과 민족번영을 위해 매진한 위국헌신의 삶 그 자체였다”고 말했다.

31일 오후 2시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관에서 열린  ‘성재 이동휘 선생’ 서거 제85주기 추모식에서 (사)성재이동휘선생기념사업회 류준형 회장이  추모사를 하고 있다. [사진=정유철 기자]
31일 오후 2시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관에서 열린 ‘성재 이동휘 선생’ 서거 제85주기 추모식에서 (사)성재이동휘선생기념사업회 류준형 회장이 추모사를 하고 있다. [사진=정유철 기자]

 

더불어 양 지청장은 “선생이 보여준 고귀한 뜻은 100여년이 지난 오늘도 우리 가슴에 깊이 새겨져 있고, 후세에서도 깊이 기억될 것이다”며 “국가보훈처는 애국선열들의 고귀한 위국헌신 정신이 바탕이 된 ‘보훈’을 구심점으로 새로운 국민통합 시대를 열어갈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성재 이동휘선생 85주기  추모식에서 양홍준 서울남부보훈지청장이 추모사를 하고 있다. [사진=정유철 기자]
성재 이동휘선생 85주기 추모식에서 양홍준 서울남부보훈지청장이 추모사를 하고 있다. [사진=정유철 기자]

기념사업회 임원, 내빈, 학생들의 헌화와 분향 후에는 이동휘 선생의 생애와 독립투쟁을 소개하는 영상 ‘100년의 유산 위대한 독립의 꿈 이동휘’를 시청했다.

추모식 후에는 선생의 위패를 모신 무후선열제단을 찾아 이동휘 선생 위패에 류준형 회장 등이 추모식 참석자들과 함께 참배했다.

이날 기념사업회 이상철 기획이사가 소개한 성재 이동휘 선생의 약전을 중심으로 선생의 생애를 정리한다.

성재 이동휘 선생(1873. 6. 20.∼1935. 1. 31.)은 함경남도 단천군 파도면 대성리에서 출생하였다. 본관은 하빈, 아명은 독립, 아호는 성재라 하였다. 선생의 생애는 네 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1873년부터 1905년까지 1단계는 초기 사상 형성 시기이다. 선생은 1880년 8월 향리의 사숙인 대성제에 들어가 한문을 수학하였다. 1896년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였으며 신사상과 근대 군사기술을 습득하는 한편 독립협회 활동을 목격하고 민권사상의 중요성을 인식하였다. 1897년 육군무관학교를 졸업하고 참위로 임관하여 궁전진위대 근위장교로 근무하였다. 1899년 7월 원수보 군무위원에 임명되었으며, 11월 부위로 승진하였다. 1900년 12월 정위로 승진하고 당시 원수부 회계총장 민영환에게 사숙하여 훈도받고 애국심을 고취하였다.

성재 이동휘 선생 85주기 추모식에 참석한 내빈들이  헌화와 분향을 한 후 묵념을 하고 있다. [사진=정유철 기자]
성재 이동휘 선생 85주기 추모식에 참석한 내빈들이 헌화와 분향을 한 후 묵념을 하고 있다. [사진=정유철 기자]

1901년 참령으로 승진하여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를 순찰·검사하는 삼남검사관으로 임명되었다. 1902년 안동영장을 역임하고 민영환, 이준, 이용익 등이 중심이 되어 비밀결사체인 개혁당을 조직하자 이상재, 이상설, 박은식, 이갑, 노백린, 남궁억, 양기탁, 장지연, 이도재 등과 함께 개혁당에 가입하여 개혁정치를 도모하였다. 1903년 5월 선생은 강화도 진위대장(進衛隊長)으로 임명되었으며 11월 강화도 최초의 근대 사립학교인 합일학교를 설립하였다.

1904년 대한보안회의 후신으로 이준이 개혁당 출신을 중심으로 조직한 대한협동회에 참여하여 일제의 토지침탈획책에 대항하는 반대투쟁을 전개하였다. 대한협동회의 조직을 강화한 후 선생은 평의장이라는 직책을 맡아 일제의 인권유린실태, 국법침탈행위 등을 강력히 성토하였다. 1905년 3월 3일 강화도 진위대장직을 사임하고 11월 을사늑약에 의해 나라의 운명이 위기에 처하자 12월 ‘유소(遺疎)’, ‘참매국공적성죄문(斬賣國公賊聲罪文) 등을 고종황제에게 상소하여 매국노의 처단을 촉구하고 ‘유고이천만동포형제서(遺告二千萬同胞兄弟書)’, ‘유고제법관서(遺告諸法官書)’ ‘유고진신소청서(遺告縉紳疎廳書) 등을 발표하였다.

이동휘 선생 85주기 추모식에 참석한 경문고등학교 학생들이 헌화와 분향을 한 후 묵념을 하고 있다. [사진=정유철 기자]
이동휘 선생 85주기 추모식에 참석한 경문고등학교 학생들이 헌화와 분향을 한 후 묵념을 하고 있다. [사진=정유철 기자]

이때까지 선생은 무인신분으로 개혁당과 대한협동회 활동에 참가함으로써 개혁사상을 확립해가는데, 봉건체제의 모순을 절감하고 이에 대한 뚜렷한 인식을 하게 되었다.

2단계인 1905년부터 1912년까지 선생은 왕조체제에 실망과 좌절을 느끼고 계몽운동을 통해 국권회복운동에 참여하였다. 1906년 4월 대한자강회의 지부를 강화도에 유치하여 지부장을 맡았고 6월 신채호가 주도한 국문 잡지인 ‘가정’ 발행에 주시경, 장지연, 유창준, 최광옥 등과 참여하여 언론인으로도 활동하였다. 10월 평안도 황해도 출신 인사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서우학회에 입회함과 동시에 강화도에 서우학회 지회를 설치하였다. 또한 국민교육회에 이갑, 현채, 유근, 권정수 등과 가입하여 지방유학생 지원, 국민계몽과 애국사상 고취에 주력하였다.

성재 이동휘선생 85주기 추모식에 참석한 기념사업회 임원, 내빈과 독립운동 관련 단체장, 회원들. [사진=정유철 기자]
성재 이동휘선생 85주기 추모식에 참석한 기념사업회 임원, 내빈과 독립운동 관련 단체장, 회원들. [사진=정유철 기자]

이준, 이종호, 오상규, 유진호, 소태희 등 함경도 출신인사들을 중심으로 한 한북흥학회 결성에 참여하여 평의장을 맡았다. 1907년 3월 한북흥학회의 부회장을 맡아 오상규 등과 지회설립을 독려하였으며 함경도 등 각 지역을 순회하며 신교육의 중요성과 학교설립을 촉구하였다. 강화도에 보창학교의 학생 수가 수백 명에 달하여 소학, 중학, 고등 3과로 나누어 가르치고 교명을 육영학교로 개명하였다. 이갑, 유동열 등과 비밀결사체인 신민회를 조직하고 신민회의 창건위원을 역임하고 평의원 및 함경도 총감으로 민중계몽운동에 주력하였다.

이동휘 선생 85주기 추모식에 참석한 경문고등학교 학생들이 류준형 기념사업회 회장, 양홍준 서울남부보훈지청장 등과 기념촬영을 했다. [사진=정유철 기자]
이동휘 선생 85주기 추모식에 참석한 경문고등학교 학생들이 류준형 기념사업회 회장, 양홍준 서울남부보훈지청장 등과 기념촬영을 했다. [사진=정유철 기자]

1908년 1월 안창호, 이갑, 유동열 등과 서우학회와 한북흥학회를 통합하여 서북학회를 조직하였다. 서북학회 창립 시 임시의장을 맡았으며 선거위원, 평양지회 총대를 역임하였다. 2월에는 보창학교의 소학교를 중학교로 개편하여 이 학교를 모델로 전국 각지에 자매학교를 설립하였다.

안창호 등과 비밀결사인 신민회를 조직하여 계몽운동과 항일투쟁을 전개하던 중 1911년 ‘105인 사건’으로 체포되어 인천 무의도에 유배되는 고초를 겪었다. 1912년 북간도로 망명한 뒤, 김립, 계봉우 등과 광성학교(光成學校)를 설립하여 꾸준히 민족주의 교육 활동을 전개하였다.

3단계로 선생은 1913년부터 1916년까지 북간도와 연해주에서 독립전쟁론을 구체적으로 실천하였다. 이 기간 선생의 독립운동은 독립전쟁론을 현실에서 구현하기 위해 일관된 노력을 한 시기이다. 1913년에는 러시아 연해주로 거점을 옮겨 블라디보스톡의 신한촌(新韓村)을 중심으로 조직된 권업회(勸業會)에 가담하여 이상설, 이갑, 신채호 등과 함께 ‘독립전쟁론’에 입각한 민족해방 투쟁활동에 적극 투신하였다.

국립서울현충원 이동휘 선생 85주기 추모식 후  무후선열제단을 찾아 기념사업회 류준형 회장 등 추모식 참석자들이 이동휘 선생 위패를 모신 제단 앞에서 묵념을 하고 있다. [사진=정유철 기자]
국립서울현충원 이동휘 선생 85주기 추모식 후 무후선열제단을 찾아 기념사업회 류준형 회장 등 추모식 참석자들이 이동휘 선생 위패를 모신 제단 앞에서 묵념을 하고 있다. [사진=정유철 기자]

1914년에는 대한광복군정부를 조직하여 부령으로 활동하였다. 1915년 신한혁명당을 조직하여 일제에 대항하려 하였으며 중국 왕청현(汪淸縣) 라자거우의 한인촌으로 거점으로 옮겨 대전무관학교(大甸武官學校)를 설립하고 독립군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마지막으로 1917년부터 1935년까지 선생은 임시정부 참여 등 새로운 활동을 모색하였다. 3·1운동 직후에는 블라디보스톡에서 문창범 등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고, ‘대한임시정부’ 군무총장으로 동녕현에 임시군집부(臨時軍執部)를 설치하여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1919년 8월말에는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총장과 초대 국무총리에 취임하여 항일 독립전쟁을 전개할 독립군 양성에 헌신하였다.

1921년 이후 국무총리직을 사임한 후에는 국민대표회(國民代表會) 집행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독립운동에 진력하였다. 이후 1935년 1월 31일 블라디보스톡 신한촌(新韓村)에서 고령과 피로로 63세를 일기로 서거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95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