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 군무총장으로 비행사양성에 힘쓴 독립투사
임시정부 군무총장으로 비행사양성에 힘쓴 독립투사
  • 정유철 기자
  • npns@naver.com
  • 승인 2020.01.22 13: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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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서울현충원에서 22일 계원 노백린 장군 추모식 봉행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무총장과 국무총리를 지내며 독립투쟁에 헌신한 계원 노백린 장군의 추모식이 열렸다.

국가보훈처(처장 박삼득)는 계원 노백린 장군의 순국 제94주기 추모식이 1월 22일(수) 오전 11시, 국립서울현충원(현충관)에서 열렸다고 밝혔다.

이날 추모식은 양홍준 서울남부보훈지청장과 유족, 독립운동 관련 단체장 및 회원, 시민 등 2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추모사, 헌화와 분향, 공군군악대 추모공연 등의 순으로 열렸다.

계원 노백린 장군(1875. 1. 10.~1926. 1. 22.)은 황해도 송화(松禾)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뛰어나서 장군감이라고 촉망받았다.

고향에서 한문을 배우다가, 상경하여 1895년 관비 유학생에 선발되어 이갑(李甲)·유동열(柳東說)·윤치성(尹致晟) 등과 함께 일본에 건너가 경응의숙(慶應義塾)을 수료하였다.

이어 1898년에 성성(成城)학교를 졸업하고, 다음 해에는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1900년에 귀국한 노백린은 육군 참위로 임관하여 한국무관학교 교관이 되어 후진양성에 전념하였다. 그 뒤 정령(正領)까지 승진하였으며, 육군무관학교장, 헌병대장, 육군연성(硏成)학교장, 군부(軍部) 교육국장 등으로 한국군 육성에 주력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면서 기울기 시작한 국권은 1907년 마침내 군대를 해산하기까지에 이르렀다. 노백린은 실의와 비운을 안은 채 조국의 운명을 안타까워하였으며, 1906년에 안창호 이갑(李甲)·전덕기(全德基)·양기탁·안태국(安泰國)·이동녕·이동휘·조성환·신채호 등과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여 구국운동을 전개하고, 만주에 독립운동 전초기지를 건설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또한 그는 고향인 송화(松禾)에 민립학교 광무학당(光武學堂)을 설립하고, 이어 1908년에는 김구(金九)·최명식(崔明植)·김홍량(金鴻亮) 등과 함께 해서교육총회(海西敎育總會)를 조직하여 구국교육운동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1910년 일제에 의해 마침내 국권이 침탈되자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1910년 6월 그는 박용만(朴容萬) 등과 하와이 오아후 가할루지방에서 국민군단(國民軍團)을 창설하여 김성옥 허용과 함께 별동대 주임으로서 3백여 명의 독립군을 훈련하였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동년 4월 10일 노백린은 군무부 총장에 임명되었으며, 이승만·안창호·박용만·이동휘·김규식과 함께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로 선발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앞으로의 승리는 하늘을 지배하는 자에게 있다고 확신하고, 1920년 2월 20일 캘리포니아주 윌로우스에 비행사양성소를 설립하였다.  이는 이곳 동포인 김종린(金鍾麟) 등의 적극적인 자금지원으로 이루어졌는데 설립 초기에는 비행기 2대, 미국인 기술자 1인과 비행사 6명을 교관으로 하였으나 생각했던 것만큼 큰 호응을 얻지는 못하였다. 1920년 7월 26일부터 30여명의 비행사를 양성했는데, 훈련생들은 농장에서 일하며 받은 임금으로 훈련비를 자비로 부담하며 훈련에 임하였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가 2004년 펴낸 『노백린의 생애와 독립운동』이라는 책에 따르면 최대의 후원자였던 김종림은 41명으로 ""비행사양성사(飛行士養成社)""라는 운영 조직을 설립하여 그 구성원(사원)들이 매월 10달러를 기부하게 하였고, 설립 당시에는 반대하던 현지 지역사회의 서양인 회사가 100달러, 중국인들이 20달러 등으로 적극 후원했다. 또한 1920년 11월 추수기의 대홍수로 타격을 입은 뒤에 1921년 4월 10일 박 희성(3·1운동민족대표 박희도의 동생)의 비행기사고 이후 사고 수습과 비행기 수리로 말미암아 비행사양성소 운영이 어려워지자 김종림이 눈물의 '청원서'를 국민회북미지회(회장 최진하)에게 보내 지원을 요청한 사실도 새롭게 밝혔다.

노백린은 이후 임시정부의 군무총장직에 있으면서, 계속 미국에 머물러 비행학교 육성에 종사하여 1922년 6월에는 학생이 41명에 달하였으며, 1923년에는 11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비행기도 5대로 늘어났으며, 비행기에는 무선통신장비까지 갖추게 되었다.

한편 그는 미국에 있었으므로 임시정부 군무총장으로서는 별다른 활동을 하지 못하였으나, 1920년 1월에 "전국민이 광복군 전투 대열에 참가를 당부"하는 군무부포고 제1호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이어서 상해로 돌아온 그는 1921년 2월 국민대표회 문제로 이승만과 안창호가 의견을 달리하게 되자 이의 중재에 나섰다.

그는 임시정부 군무총장으로서 노태연(盧泰然)·도인권(都寅權)·김훈(金勳) 등 무관학교 출신인 열혈청년들과 함께 일제에 대한 무력항쟁을 주창하는 한편 일반외교 활동을 통하여 조국의 광복을 성취할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1922년 1월에는 독립운동 선상에서 변심(變心)한 자와 소련 정부로부터 수령한 독립운동 자금을 공산계열의 조직을 위하여 사용한 이동휘(李東輝)·김립(金立) 등을 성토하는 임시정부포고 제1호를 국무총리 대리 신규식(申圭植), 내무총장 이동녕(李東寧), 교통총장 손정도(孫貞道) 등 각료들과 함께 서명하여 발표하였다. 이어 7월에는 국민대표회의 등의 개최에 따른 독립운동 단체의 분규와 알력을 수습하기 위해서 안창호·김덕진(金德鎭)·최일(崔日)·한진교(韓鎭敎)·최창식(崔昌植) 등 주요 인사들과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를 조직하여 통일된 의견과 행동으로 조국광복에 매진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해 10월에는 군자금 모집을 위하여 군무총장 명의의 격문 등을 작성하여 경북 일원에서 군자금 모집 활동을 벌이던 국내 특파원이 체포되었는데, 이를 의용단사건(義勇團事件)이라고 하였다.

1922년 6월에는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의 지명으로 국무총리 대리로 선출되었으며, 1923년 1월에 정식 국무총리로 추대되어 1924년 4월까지 임시정부를 이끌었다. 1924년 12월에는 대통령대리 겸 국무총리에 박은식(朴殷植)이 추대되고 그는 다시 교통 겸 군무총장에 임명되었다. 1925년 3월 대통령 이승만이 탄핵 면직되고 후임에 박은식이 당선되자 박은식은 그를 다시 국무총리로 추천하여 의정원의 동의를 거쳐 임명하였으며, 교통 겸 군무총장에 임명되었다.

이렇게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노심초사하던 그는 상해에서 병을 얻어 1926년 1월 22일 한 많은 일생을 마치게 되니, 임시정부에서는 정부요인 및 학생 등 8백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인성(仁成)학교에서 성대한 장의식을 거행하고 정안사로(靜安寺路)의 공동묘지에 안장하였다.

그 후 1993년 유해를 봉환하여 서울현충원에 안장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한편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는 2004년 4월 13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제85주년을 맞이하여 3·1운동 후 미국 캘리포니아주 윌로우스에서 비행사를 양성함으로써 대한민국임시정부 공군을 창설하여 일본 본토를 폭격하고자 했던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총장 계원(桂園) 노백린(盧伯麟) 선생의 전기를 새로 발간하였다.

『노백린의 생애와 독립운동』이라는 제목으로 신국판 320쪽의 이 책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본 연구소의 박민영·홍선표·조범래·이명화·김형목 연구원이 집필과 부록자료를 담당했다.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는 "독립운동가로서 노백린 선생의 역사적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노백린 선생은 민족의 선각자로서 한말 국난의 위기에 군인으로써, 교육가로서 나라의 명운을 구하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나라가 일제에 의해 유린당하자 중국으로, 하와이와 미주 본토로 건너가 민족의 독립을 위해 분투하였다. 특히 노백린 선생은 미주에서 일찍이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비행가양성소를 창설하여 일제와의 독립전쟁을 준비하였다. 또한 3·1운동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탄생되었을 때, 임시정부의 군무총장에 선임되어 일제와의 독립전쟁에 대한 포부와 열망을 실현하기 위해 중국 상해에 부임하였다. 임시정부가 독립운동의 이념상, 방략상의 차이로 혼란한 시기에 국무총리라는 막중한 직책을 맡아 임시정부를 수습하여 독립운동의 중심기관으로 다시 세우려고 노력하였다. 임시정부의 국무총리로서 노백린은 정부의 통합과 독립투쟁을 준비하면서 일신을 돌보지 않았으며, 그러는 동안 선생의 신병은 점차 악화되어 마침내 중국 상해에서 순국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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